주말

축제의 밤
꽝된 복권
손 잡고 데이트
꼬리가 사라진 별자리
첫 만남에 낮술
멀리서 오는 바다
비틀거리는 계단
기억나지 않는 지명과 이름
파편이어도 좋다는 생각
사실은 헛웃음
흠 잡을데 없이
흘러가는 사람이 되버린
AND

낮술

점심 손님이 다 빠져 나간 식당
아구찜을 시킨다
늘어진 콩나물과 아구
나른한 나와 친구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꾸벅꾸벅 조는 주인장
파리와 선풍기의 궁합
고춧가루 붉게 타오르는 미더덕이
입안에서 뜨겁게 터지고
지 혼자만 냉정한 소주병
잠든 주인 머리맡에 꾸깃한 사 만 칠 천원을 곱게 펴두고 거리로 나선다
아구와 나 친구와 소주
폭염속에 생이 무르익는
8월의 오후 네 시
AND

바닷가에서

바닷가에는
사라진 것들의 영혼이 떠돈다
삼겹살의 영혼
가리비의 영혼
폭죽의 영혼
입맞춤의 영혼
웃음과 눈물의 영혼
온갖 사라진 것들이 한데 엉켜서
끝없이 이어지는 파도의 영혼을 타고 모래 위로 올라와
서로를 부르는

바닷가에서
나는 돌아오지 않는 당신을 울부짖는다
AND

어부

바다가 안방
바다가 부엌
바다가 화장실
바다가 재떨이
바다가 술친구
바다가 동반자 

바다가 삶
AND

인류 멸망

인간이 멸망해야 한단 말을 입에 달고 다니고
세상이 끝났다고 떠들고 다니며 막 살아도
같이는 죽어도 남들보다 먼저 죽긴 싫다
AND

제주도에서

1131번 지방도,
길에 번호를 붙이는 건 인간 뿐
어디 길 뿐이겠는가
518도로,
길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인간 뿐
어디 길 뿐 이겠는가
어디 인간 뿐이겠는가
사랑하지도 않았던 사람의 전화 목소리를 듣고
혼자 눈시울이 붉어지는 일이
오직 나 뿐이겠는가
오직 너 뿐이겠는가
그렇다면 누가 이 곳 바깥에 있겠는가
어디 번호와 이름 뿐이겠는가
의미란 의미는 누구에게 있는가
그게 당신이라 하면
그 당신이 당신이겠는가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인간 뿐 

 
AND



풍요 위를 걷는다
풋풋풋 가벼운 풋워크
수박 껍질은 둥글다
미끌미끌 미끄르르
여전한 가벼움으로
속이 붉게 멍들고
씨가 까맣게 타도 상관 없다
참외 껍질은 노랗다
바다는 푸르기에
노란색도 슬프지 않다
인류가 마음껏 퍼먹고
플라스틱만 떠다녀도
바다는 여전히 푸른 멍 덩어리
상처투성이로
풍요 위를 걷는다
비계 껍질의 푹신함이 좋아서
애써 속을 들여다보진 않는다
AND

섹스

그저 섹스라고 하면 될 걸
잠자리니 부부관계니
합방이니 사랑이니 한다
심지어는 그거라고도 한다

-> 키스랑 섹스는 만국공통어
AND

장례식장

누군가 죽었다고 하면
이상하게도 장례식장에 가고 싶다
절을 하고 사진 앞에 두 손을 모으며
얼굴도 모르던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생을 살아내고 죽음을 마주한 경이를 느끼고
고깃국 한 그릇과 소주 한 잔으로 살아 있다는 비릿함을 비워 내고 싶다
도떼기 시장 같은 웅성거림 속에서
오늘도 이만큼이나 살아남았다고
그 중에 나도 있다고
기다릴 것 없다고
먼저 떠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AND

평생
 

하루가 지나가는 게 별 거 아니라는 걸 아는데 40년
담배까지 피우며 심각하게 살 필요 없다는 걸 아는데 20년
내 모든 말과 행동이 외롭기 때문이라는 걸
외로움이 병이란 걸 아는데 20년
당신이 내 운명이라는 걸 아는데 40년 걸렸다

그런 당신과 헤어지는데 하루 걸렸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가는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아는데 평생 걸렸다
AND

바닥

지금 여기가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이 아니고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이
이 세상의 가장 밑바닥이 아닌 걸 알기에
바닥이란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몇 번이고 손바닥 위에 적어만본다
바닥이 없이는 바다가 없다
그곳엔 하늘도 땅도 없다
아무 의미를 날지 못하는 새들은 끝없이 추락하고
누구도 누군가에게 닿을 수 없다
아, 바닥을 치지 못하는 삶이여
지금 여기서
한 발 더 아래로 내딛는 일로만
나는 너에게 닿을 수 있고
그때라야 우리는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AND

전성기

어차피 해피엔딩인데 주인공이 곤란을 겪는 영화
힘든 사람은 더 힘들어지거나 죽는 것이 현실
이르던 늦던 꽃은 피는 때가 제 때
한 번도 피어보지 못하고 일촉즉발의 상황같은 것도 없이
말 없이 지기만하는 생들의 틈바구니에서 싹을 틔우는 작은 씨앗
제 때가 오지 않아도 지금을 그때로 남기고 싶은
지금이 우리의 전성기
AND

마른

빈 콜라캔에 마른침을 뱉는다
몇 번째 외로움인가
치이익, 마지막 연기와 함께 담배가 죽었다
몇 번째 절망인가
몇 번째 죽음인가
다만 사랑인가
아니면 삶인가
기계가 찍어낸 것 같은 의문의 나열 속에서
나는 심장이 뛰는 존재
다시 담배를 꺼내 문다
마른 입술 사이로
몇 번째 추억인가
몇 번째 그리움인가
AND

종아리

우연히 본 그녀의 뒷모습
이름모를 고깃집 뒤편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던 그녀의 종아리
견고하고 단호한 삶이 느껴지는 근육질의 종아리
어떤 시절을 견뎠기 때문에 지금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종아리
버티는지 즐기는지 모를 세월에
체념과 우연에만 기대는 날들에
동그래진 내 배를 쓰다듬게 만드는
종아리
AND

물고기

고기는 인간의 말
인간이 먹는 것
인간은 육고기
인간도 인간의 말
인간이 인간을 먹기도 하고
물에 사는 고기
그래서 물고기
발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말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물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물고기  song ver

고기는 인간의 말
인간이 먹는 것
인간도 결국은 고기
인간도 인간의 말

인간이 인간을 먹기도 하고
인간이 인간을 사기도 하고
인간이 생선을 사기도 하고
물고기가 인간을 먹기도 하고

물에 사는 고기
그래서 물고기
뱃속을 헤엄쳐
그래서 물고기

발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말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물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너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AND

콧구멍

콧구멍을 닮았다
눈도 귀도 발가락도 아니고
코도 다르게 생겼는데
하필이면 콧구멍을 닮았다
잠든 엄마를 가만히 보다가
실실 웃는다
엄마랑 나
콧구멍이 닮았다
AND

술꾼

특별히 기쁜일도 슬픈일도 없는 그저 그런날
말도 안되게 술을 많이 마시고
다음날 약간의 후회를 하지만
그날도 그저 그런날
AND

점유율 100%


다정한 손짓
발끝으로부터의 떨림
차오르고 또 차오르는 충만함
세상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일

이제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모든 만남은 헤어져야 하니까
그건 너로 족하니까
너는 나에게만 독점적이니까

AND

여름산

여름산은 겁이 난다
초록에 질식할 것 같다
볕을 피해 무심코 들어갔다간
나무가 내뿜는 수증기에 둘러쌓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다가
해 저무는 바람 소리에
나무가 잠을 청하려고 깊은 숨을 들이쉬면
그 찰나에만 부리나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누군가 삶에서 달아나듯이
AND

물의 꿈

모든 강물을 막고
몰려온 비구름을 몰아내고
온통 태양 태양 태양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얕은 곳으로
대륙붕이 먼저 드러나고
한 번도 빛이 닿지 않았던 곳까지
바다가 마른다
새우떼가 먼지가 되고
물고기들이 마른 아가미를 놀린다
신화 속의 괴물마저 포효 끝에 마지막 숨을 멈추면
생명이 사라진 땅 위에
건드리면 부서지는 새 삶이 태어난다
매일 무너져 내리는 삶이
메마른 바다의 끝에서
물의 꿈을 꾼다
AND

저기 어디

저어기 어어디
서울 사람들 생소한
지역민들도 잘 모르는
강원도 백복령 자락 어딘가
강릉 옥계면, 정선 임계면, 동해 신흥동 중간에
이 만 평쯤 내 밭이 있어서
아내랑 같이 감자 심고
밭째 사러온 양반한테 밭떼기로 팔아 버리고
겨울엔 배 두르리며 동네 사람들이랑 어울려
술추렴이나 하며 살았으면
저어기 어디서
삶이 삶인 삶을 살었으면
AND

카레

오늘은 카레를 먹을까
감자랑 당근을 씻는다
제주도에서 실려온 흙이
하수구로 빠져 나간다
하수도 바닥에 쌓였다가
홍수가 나면 바다로 간다
폭풍우에 실려 태평양을 건너간다
전남 무안 생산이라고 적혀 있지만
어쩌면 중국에서 서해를 건너왔을 양파껍질도 마찬가지다
돼지고기라고 다를까
카레가루라고 다를까

캘리포니아산 오렌지를 먹는 우리는
다 어디로 흘러갈까

뱅글뱅글 생각하는 동안 완성된 카레를
맛있게 먹는 수밖에 없다
AND

봄봄

봄이 봄봄하는 날
물가를 거닐었다
개구리들은 부둥켜 안고 짝짓기를 하고
돌틈에 홀로핀 제비꽃이 예뻤는데
당신이 없어 나만 서글펐다
AND



전생에 자살을 했다
벼랑에서 떨어지고도 살아 있으니
그제서야 꿈인 줄 알았다
한 여인을 사랑하였으나
그 끝에 닿지 못하였고
밥을 굶지는 않았으나
배불리 먹지도 못했다
세상에 점 하나 남기지 못하고
두려워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이생이라고 다를까

사랑의 언저리를
생의 귀퉁이를
꿈이 꿈인 줄 모르고

그저 맴맴돈다
AND

35번 국도

2017년 4월 11일 화요일 오전 11시 35번 국도
회사도 때려치고 정선에서 당신이 있는 강릉으로 가는 길
내 뼛 속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반칙 같은 날씨
이 생에 어디가 지금보다 아름다울까
만나면 부서질 환상속을 홀로 달린다
2017년 4월 11일 여전히 오전 11시 35번 국도
AND

더디다

술이 더디다
시간이 더디다
나이를 먹어선가
세상이 할배들 자전거 굴러가듯 더디다
술 취한 내가 더디다
AND

장마

이제 막 담배를 꺼내 물었는데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종이컵 안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네 얼굴이 커피색으로 번진다
어느새 세상은 잿빛이구나

흠뻑 젖은 채
AND

수선화

나는 이제 시작하려는데
너는 꽃잎을 땅으로 기울이고
네가 시드는 일이 내 탓인 것만 같으니
너는 너만 사랑하다 저물고
나도 너만 사랑하다가 지겠구나
AND

비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어둠 소리
바다는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생명
너와 함께 했던 바다
갈매기가 소리지르던 바다
언젠가의 바다
그밤의 바다
기억속의 바다
지금은 네가 없는 바다
파도 위로 부서지는 빗소리
나는 물 속에서 비를 맞는 물고기
바다는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생명
AND

울다

인간의 한 평생 보다 오래된 버드나무 아래
봄이 올라오는 자리에서
당신은 울고 있다
어쩌면, 의 여지도 없이 울고 있다
버드나무 이파리 향하는 방향따라 울고 있다
벌들이 올해의 첫 번째 꽃으로 달려드는 시간에
억지로 짜내지 않아도 모든 풍경이 글이 되는 때에
봄비 그치고 오만데서 봄이 쏟아지는 순간에
당신은 봄을 맞으며 울고
나는 우는 봄을 바라보고 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