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군다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는 이런 대목을 읽었다.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으로서의 일치와 함께 현대 생활의 다른 요인, 곧 일상적인 노동과 일상적인 오락의 역할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평균화되고 노동력 또는 사무원이나 관리자의 관료적 힘의 일부가 된다. 그는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그가 하는 일은 이 일을 관리하는조직에 의해 지시된다. 계급의 높고 낮음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들은 모두 조직의 전체적 구조에 의해 지시된 일을 지시된 속도로 지시된 방식에 따라 수행하고 있다. 심지어 감정조차도 지시 받고 있다. 쾌활함, 믿음직함, 모든 사람들과 마찰 없이 지내는 능력까지도. 오락도 비록 격렬한 방법으로는 아니더라도 역시 상투적인 것으로 된다. 책은 독서 클럽에 의해 선택되고 영화는 필름이나 극장의 소유자에 의해 선택되고 광고의 스로우건도 그들로부터 지불을 받는다. 휴식 역시 일정하다. 곧 일요일의 드라이브, 텔레비젼의 연속물, 크다놀이, 사교파티 등이 다.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월요일부터 다음 월요일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활동은 일정하고 기성품화되어 있다. 이러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그는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고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 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것인가?
예의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관료적 힘안에 일단은 들어가 보자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런 대목을 읽고 뼛속까지 무언가를 느끼는 내가, 6월까지 농촌에서 지냈던 내가 청년인턴이 되어서 일을 한다니 많이 한심한 것도 사실이다.
지후가 내 힘이다. 사랑에 대한 갈망과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주는 사람이다.
그러한 '내 힘' 때문에 지난주에 조금 괴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후가 내 힘이다.
에리히 프롬은 50년 전에 이런걸 썼다. 표준화된 인간들 중에서 특이한 개인이 되기 위해서 요즘 초식남이 유행인 것 같다. 프롬의 말에 의하면 초식남의 취미들도 일정하고 기성품화 되어 있는 상품속에 있다.
그냥 쭉쭉 건너 뛰면 결국 문제는 '매체'라는 답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