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도
서로 등을 돌렸던 날도
눈이 내렸다
가장 따뜻했던 겨울과
가장 시린 겨울이
같은 선상에 있다
입동이 지났어도 겨울은 아니다
첫눈이 오기까지는 겨울이 아니다
해마다 절기에 맞춰 눈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오늘
세상에 더 가질 것 없이 눈이 내린다
발 아래 싸박싸박 무언가 쌓인다
행복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고
지금 불행한 것도 아니다
생에 좋았던 날은 며칠 뿐이었다
BLOG ARTICLE 전체 글 | 1793 ARTICLE FOUND
- 2024.11.20 20241120 - 어쩌다 하나씩
- 2024.11.18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 - 클레어 키컨
- 2024.11.18 20241118 - 어쩌다 하나씩
- 2024.11.17 20241117 - 꿈에서 아버지가
- 2024.11.11 20241111 - 집안 잔치와 인기 많은 아버지
이제 태양이 기울어서 일렁이는 물결에 우리가 어떻게 비치는지 보여준다. 순간적으로 무서워진다. 나는 아까 이 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 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맡겨진 소녀 -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In October there were yellow trees. Then the clocks went back the hour and the long November winds came in and blew, and stripped the trees bare. In the town of New Ross, chimneys threw out smoke which fell away and drifted off in hairy, drawn-out strings before dispersing along the quays, and soon the River Barrow, dark as stout, swelled up with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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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버터와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들면서도 펄롱의 생각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내일, 그리고 누구한테 받을 돈이 얼마인지, 주문받은 물건은 언제 어떻게 배달할지, 누구한테 무슨 일을 맡길지, 받을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받을지에 닿아 있었다. 내일이 저물 때도 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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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들이 있지, 펄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 이처럼 사소한 것들 -
-> 클레어 키컨. 좋네.
신의 산
아버지는 '신의 산'이란 책을 들고 있었지
우리는 그 책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나눴다
현실에서의 모든 대화를 합친 것보다 더 깊은 얘기를
꿈 속에서,
세상 어딘가에는 정말로 '신의 산'이란 소설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부터 산은 신의 영역이었고
산의 신은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아버지의 모든 기억을 먹어 치운다
아버지는 산골에서 태어났고
나는 산에서 일하는 사람이 됐다
나는 모든 산은 신의 산이라는 걸 안다
길에서 태어난 사람은 길로
바다에서 태어난 사람은 바다로
산에서 태어난 사람은 산으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신이 되어 산으로 가는 중이다
어제 아버지 면회 다녀왔다. 아버지는 지난 주말에 고모랑 찍은 사진을 보더니, 누나라면서 고모를 알아봤다. 그런데 사진 속 고모 옆에 본인이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동생이랑 영상통화 했을 때, 동생의 첫 마디가 '이제 나도 못 알아봐?' 였다. 요양원에서 한 달에 한 번 우편물이 오는데 그 안에 기록지가 있다. 매달 그래왔듯이 이번달 기록지에도 아버지 인지능력이 급격하게 안 좋아진다는 내용이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다 잊을수가 있나? '어떻게' 가 참 슬픈말이구나. 요양원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평소엔 이런 생각 안 하는데, 어제는 생각했다. 아이고, 아버지
새벽에 꿈을 꿨다.
- 요양원에 면회 가서 아버지를 엄마랑 나랑 JJ 삼촌이 있는 집으로 데려왔다. 같이 시간 보내다가 요양원에 도로 데려다 주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멀쩡해져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요양원에 돌아가기로 했다. 밤에 자다가 아버지가 사라진 걸 알았다. 다급하게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가 베란다 쪽으로 나가는 미닫이 문을 열었을 때, 유리로 만든 네모난 상자에 발가벗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아버지를 차에 태워서 요양원으로 돌아가로 했다. 내가 운전하고 엄마가 옆에 앉고 아버지가 뒷자리에 앉았다. 요양원까지 가는 길이 유난히 길었다. 운전 중에 문득 뒤를 돌아봤는데, 아버지가 사라졌다.
-> 꿈에 동생이랑 내 아내는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랑 같이 있던 집은 우리가 살아본 적이 없는 오래된 한옥을 개량한 형태의 주택이었다. 아버지는 첫 등장부터 '신의 산'이라는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책에 대한 대화를 아버지랑 했는데, 뭐였는지 기억이 안난다.
인상적인 꿈을 꾸면 내용 해석을 좀 해보려고 하는 편인데, 이 꿈은 해석이 잘 안되네. 벌거벗은 아버지는 이번달 우편물에 옷을 벗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버지가 들고 있던 책은 어째서 제목까지 구체적으로 등장했는지 조금의 실마리도 없다.
심란하네.
지난 토요일에 강릉 고모(작은 고모) 아이 결혼식이 강릉에서 있었다. 형 때문에 담배 배웠으니 책임지라고 나한테 장난치던 그 아이가 올해 서른 아홉이다.
구미 고모(큰 고모)는 3주전부터 아버지 면회를 기대하고 있었고, 동생은 아버지한테 아이들 보여주려고 벼르고 있었다. 엄마는 둘째 이모랑 함께 강릉에 오게 됐다. 아버지는 만나면 항상 애들(동생 아이들) 얘기를 한다. 둘째 이모는 나에겐 엄마나 마찬가지이고,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오래 못 살 수도 있다. 또 이모는 아버지가 요양원으로 옮기기 전까지 한 동네에서만 45년 이상을 같이 살았기에 아버지에게는 처형 이전에 절친이다. 큰 고모는 아버지의 누나고 아버지 동생들부터는 엄마가 다르다. 고모가 서울에 올라와서 살 때, 둘째 이모랑 이웃에 살았고 아버지는 누나집에 엄마는 언니집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하는 바람에 지금의 내가 있다. 누구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내 임무는 요양원과 연락해서 면회 시간 등을 조율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 얼굴을 보게 하는 일이었는데, 시작부터 잘 안됐다. 요양원 근무하시는 사회 복지사 선생님과 금요일부터 통화를 했는데, 이 선생님이 1층 면회실이 아니라 4층 생활실에서 3명씩 짝을 지어서 2타임, 한 타임당 10분씩만 면회를 하는 게 좋겠다고 단호하게 말하기에 알았다고 했다. 요양원은 입소자 때문에 운영이 되지만 입소자의 보호자와 요양원 사이의 관계에서는 보호자가 을이 되는 현실을 잠깐 생각했다.
암튼 엄마, 이모, JJ삼촌이 먼저 도착해서 4층에서 면회를 추진하려고 했는데, 마침 4층에서 응급상황이 발생해서 구급차가 오고 1층 사무실도 소란스러웠다. 해서 1층 면회실에서 면회를 하게 됐다. 응급상황이 럭키가 되는 아이러니. 이모는 아버지를 만나자 마자 눈물이 터지고 이모 딸아이는 엄마 심장 터진다고 울지 말라고 하고 아버지는 처형을 알아봤고 처형이 우니까 따라 울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엄마랑 이모한테 '내가 미안해요'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모가 또 울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우연히 그 모습을 보고 '어르신이 예민하니까 울면 안돼요'라고 했다. 그 후에 이모는 구석에서 혼자 울었다. 아버지는 면회 시간이 30분 정도 지나면 슬슬 지겨워 하면서 이제 그만 가라고 할 때가 많은데, 그날은 계속 뭔가를 얘기했다. 그때 마침 고모가 요양원에 도착했고 요양원 원장 선생님이 '아버님이 인기가 많네'라고 하시면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다 만나라고 했다.
우는 문제에 있어서 고모가 가장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모는 울지 않았다. 아버지는 고모가 마스크를 벗자마자 '누나'라고 불렀다. 핏줄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고모는 요양원에서 아버지 괴롭힐까봐 걱정하는 타입인데, 아버지의 평온한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누나 입장에서는 동생이 자주 보고 싶겠지만 구미에서 강릉은 너무 멀다. 암튼 고모가 아버지 보고 안심한 일로 내가 안심이 된다.
이 면회의 아수라 장에서 동생은 결국 그날 면회를 포기했다. 다음에 큰 아이 데리고 따로 온다고 한다. 동생이 와서 아이들까지 보여주는 진행이 됐으면, 너무 소란스러웠을 것 같다. 땡큐 브로.
외가집 친척들 다 같이 모여서 놀던 시절에(주로 우리집에서 많이 만남) 이모들이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늘 하던 얘기가 '일우 아바이는 너무 착해서 탈이다' 인데, 너무 착한 덕분에 본인 인생에 모질지 못했던 아버지가 그 덕분에 아직까지는 착한 치매라서 너무 다행이다. 아버지, 지금처럼만 쭉 가보자구요.
잔치는 즐거웠나? 나는 신랑측 축의금 받고 돈 셌다. 동생네 애들하고 얘기를 제대로 못 나눈게 아쉽네. 엄마랑도 많은 얘기는 못 나눴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니까. 작은 고모가 아들 결혼식은 처음이라 - 큰 아이는 딸인데 몇 년 전에 결혼함 - 많이 긴장했길래 좀 웃겨드렸다. 작은 고모는 우리 집안에 어떻게 이런 애가 있냐면서 평상시에도 나를 듬직하게 생각하고 내 유머를 좋아하신다. 밥먹으면서 5촌 고모들을 비롯해서 집안 어른들이랑 이런 저런 얘기 나눈 게 기억에 남는다. 고모님 한 분 큰어머니 한 분과는 기념셀카를 찍었다. 이 두 어른은 몇 년 전에 집안 어른 장례식 끝나고 무덤가에 나란히 앉아 계시길래 내가 사진 한 컷 직어뒀다. 그 컷이 구글포토에 남아 있을 것이다. 밥 다 먹고 예식비랑 식대 계산하고 어르신 두 분 내 차에 모시고 예식장을 떠났다. 그 어르신들 중에 한 분은 나랑 셀카 찍은 큰어머니고 한 분은 누군지 몰랐는데, 올해 97세 이신 큰 고모란 걸 나중에 알았다. 97세면 27년생 정도 되는건가? 밥 먹을 때 고모님이 내 농담에 '아가 재미있다'고 맞장구 쳐주실 때는 고모 나이가 70대 중반 정도일거라 생각했다. 건강이 이렇게 중요하다. 97세 시누이랑 70년 이상의 세월을 함께 보내고 있는 큰어머니를 생각해본다.
고모를 집앞에 내려드리고 기쁜일이 될지 슬플일이 될지 모르지만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인사드렸다.
살아 있다면 다음에 또 만날 수 있는 거구나, 깊게 생각했다. 아버지도 엄마도 다들...... 살아 있다면..... 그날은 이 정도 까지만 생각했는데, 이 글을 마치려는 지금
오랜만에 죽음을 생각한다.
몇 년 전 컷을 굳이 찾아서 올린다. 왼쪽이 큰 어머니, 오른쪽이 서해(왜 이렇게 불리는지 모름) 고모다. 큰 어머니는 기본 심성이 너무 고우신 분이고 고모는 10여년 전에 내가 농사 짓는다고 강릉 내려와서 작은집에 얹혀 살 때, 객지에 와서 얼마냐 고생이 많겠냐면서 나한테 만원짜리 한 장 용돈으로 주신 멋진 분이다. 몇 년 전 강릉 산불 때 두 분의 집이 모두 탔다. 큰 어머니는 아파트로 이사했고 고모는 집을 새로 지었다.(고모네 집은 터 좋음) 일제치하에 태어나 어려서 전쟁을 치르고 늙어서는 산불에 집이 탔다. 살면서 몸의 주름 갯수 보다 많은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겠지. 헤아릴 수 없지만 헤아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