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형이 교통사고로 죽자
어머니는 홧병으로 죽었다
둘째 형은 자살을 하고
얼마 후 아버지는 암에 걸려 죽었다.
죽은 신들이, 살아있는 나를 내려다 보았고
나는 꿈에서 관을 짰다
누군가, 관을 짜는 꿈은 집을 사는 꿈이라고 했다
그래서 빚을 내서 다 같이 살 던 집을 샀다
점심을 먹다가 식사예절 타령을 하는 동료에게 욕설을 퍼붓고 집에 왔다
일용직 처지에 대출 이자 내기도 빠듯하니 내일 또 그 인간의 얼굴을 봐야한다
셋째 형이랑 저녁을 먹었다
가족이란 게 오랜만이다
장애인 직업 재활 시설에서 일하는 형이 밥값을 냈다
누워서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 잠들었다
삶이 물처럼 흘러간다
안쓰러워 하고 애쓰는 일들이 다 아무것도 아니다

AND

고요


빛의 반대편은 어둠
오른쪽의 반대는 왼쪽
어둠의 왼편은 빛의 그림자
너는 빛이 없는 곳에서 온 존재
나는 너의 그림자

너를 사랑하는 건,

너와 나만이 있는 고요
너와 내 숨소리만 있는 고요
그 조차도 사라진 고요
그 고요 속에서
텅빈 반대편을 보면서
평행선의 한쪽을 걷는 일

AND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 애인이 다가와 내 무릎 위에 앉았다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여자의 손이 내 목을 감쌌다
부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품안의 여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입을 맞췄다
혀가 뜨거웠다
그때 아내가 도착했다
나는 얼른 애인을 안은 팔을 풀었다
애인은 내 무릎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셋이서 인생에 대해서 얘기했다

우리는 평생 사는 일에 서툴다
AND

봄비

벚꽃 지기전에 사랑을 마치려
아침부터 고양이들이 슬프다
꽃 진 자리 언제나 참혹하다
AND

먹다


너는 나랑 기역자로 앉아서 밥을 먹고 싶고
나는 너랑 니은자로 앉아서 술을 먹고 싶다
기역을 아무쪽으로나 두 번 돌리면 니은이다
그래서
나는 너랑 기역자로 앉아서 술을 먹고
너는 나랑 니은자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마주보지 않아도
나란히 앉지 않아도
그대로 좋은것이다
친구가 함께하여 디귿자로 앉아도
거기에 한 친구가 더하여 미음자로 앉아도 좋은것이다
아무렇게나 앉아도
함께 먹는 일은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 > 5.18에 이런 걸 썼네.


AND

봉합


느슨해진 나사를 죄듯이
드라이버로 관자놀이를 조였다
삐걱삐걱 쓰걱쓰걱
기름칠을 해가며 머리를 조였다
머릿속에 가득한 당신 생각을 쥐어짰다
눈물이 피고름이
눈으로 귀로 코로 입으로 흘러나왔다
아프다
시원하다
아프다



너를 다 쏟아낼 때까지
나사 대가리가 뭉개질 때까지
머리가 반토막이 될 때까지
손에 힘을 꽉 주고 관자놀이를 조였다
그리고나서
귀를 접고 못을 박았다
눈코입을 순서대로 꿰맸다
항상 당신을 향하는 팔다리를 순간접착제를 써서 몸에 붙였다
너는 대못과 망치를 들고 내게로 오는 중이다
너로 내 상처를 봉합하던 시절이 가고
지금부터 너도 자유 나도 자유다


- > 마지막이 별로네

AND

흔한 사랑 이야기


세상에 흔한 것이 물건이다
옷이며 자동차며 아파트까지
많은 것들이 많다
널리고 널린 게 물건이고
버리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빠르다
세상에 귀한 것이 없다
흔한 것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들도 흔해 빠졌다
사랑도 한 번 입고 옷장에 둔 옷처럼 흔해 빠졌다
사랑한다는 말이 비 오는 날의 입맞춤이 지난 밤의 열기도 다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에 흔해 빠진 게 사랑이어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
흔해 빠져서 귀하지 않더라도
버리지 않고 쌓아두지 않고
평범하게 평범하게만
너를 사랑하고 싶다
AND

어쩌면 사랑


부엌에 난 작은 쪽창으로 담장 끝이 뜯어져 나간 자리가 보인다
그 뜯긴 틈으로 빛이 들어와 밥상 위에 올라 앉는다
햇살이 반찬이다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웠다


차가운 당신 발등에 따뜻한 내 발바닥을 비빈다
내 발이 당신 발을 사랑한다

너는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너는 나를 위해서 태어났고
나는 너를 위해서 태어났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듯이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가끔은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싶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그뿐이다

AND

선이 굶고 섬세한 삶


어머니, 저는 선이 굵고 섬세한 삶을 살고 싶어요
아들아, 그러려므나 그런데 뭐라구?
어머니 그건 람보의 몸에 이소룡의 근육을 붙이는 것과 같아요
배리본즈의 몸에 스즈키 이치로의 근육을 달고 사는 것이기도 하고요
아들아, 넌 숨쉬는 것도 힘들어 하잖니
오늘부터 운동을 열심히 할 셈인게냐?
어머니, 그게 아니고요 외유내강 모르세요
아들아, 너는 나한테만 강하잖니

부끄러운 아들은 숨을 죽인다

아들아, 엄마는 일하러 갈 시간이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니
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때 보던 지리부도를 보고 계세요
아들아, 뭐라구
어머니, 그러니까 아버지는 몇 년째 방에서 나오지 않고 지도책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아들아, 바닥에 달라붙은 네가 뭘 알겠니
넌 우선 숨이나 제대로 쉬어라

아버지를 닮아 부끄러운 아들은 숨을 죽이고 굵고 가는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 4월 8일에 엄마한테 전화했다. 어버이날인 줄 알았다.


AND

낮은데로만


오른쪽이 동쪽 왼쪽은 서쪽이다
지도에는 4자가 있고 두 선의 끝이 맞닿은 곳이 북쪽이다
제삿상 오른쪽에는 사과를 왼쪽에는 배를 놓는다
나는 항상 앞으로만 걷는다
공원에는 뒤로 걷는 아주머니들도 있다
나는 항상 북쪽으로만 걷는다
오른쪽은 동쪽 왼쪽은 서쪽이다
가장 높이 나는 새도 결국은 지상에서 삶을 마친다
위로 흐르는 물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새들이 사는 높이에서 산다
그 사람들도 나와 같은 물을 마신다
그런데 나는
북쪽으로만 위쪽으로만 걷는다
앞만 보며 위만 보며 걷는다

뒤로 걷고 싶다
지도를 뒤집고 싶다
낮은데로만 낮은데로만
걷고 싶다 기고 싶다 살고 싶다

- 5월 6일 것 고침
AND

애무(愛舞)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마음이 춤을 추는 시절이었다
그 춤이
네 어깨 위에 내려 앉았다
너는 먼지를 털듯
어깨 위의 춤을 가볍게 털어내고
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의 춤을 추었다

AND

허명이어도 좋으니 명성을 얻고 싶다
나쁜 평판이어도 좋으니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싶다
허명과 나쁜 평판을 가지고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해서
불온한 나에 대해서 잔뜩잔뜩 적어서
그것으로 조금이라도 생활비를 벌고 싶다
이런 소박하면서 불손한 마음으로 쓴 문장을 불온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해주면 좋겠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란 놈이나 너란 놈이나
다 씨발이다
씨발 소리가 절로 나오는 밤이다
이새끼나 저새끼나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씨발이다
씨발 소리가 잘도 나오는 날들이다)

하늘에 달리는 열매는 없다
물은 아래로만 흐른다
헌데
높은곳에 있는 사람은 낮은 곳을 보지 않고
낮은곳에 있는 사람은 높은 곳만 본다
끝까지 올라간 새도 결국은 지상에서 생을 마치고
하늘에 묻히는 사람은 없다

낮은데로만 낮은데로만
가고 싶다 가고 싶다
기고 싶다 살고 싶다

AND

달아날까


달아날까 달아날까
너에게로만 너에게로만
달아날까 달아날까
너에게서만 너에게서만

날아갈까 날아갈까
너에게로만 너에게로만
날아갈까 날아갈까
너에게서만 너에게서만
AND

탕수육을 배달 시켜서 아내랑 먹었다
배달 탕수육은 결혼하고 처음이다
우적우적 고기를 씹으면서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 곳이 미안한 일이 미안한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런데도 탕수육 접시를 깨끗히 비우고는 태연하게 커피를 마셨다
커피콩을 갈면서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다
인스턴트 커피를 마셨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4월에 하루도 못 쉬어서 온몸과 마음이 뻐근하다
배 부르고 뻐근뻐근한 채로 이부자리에 누웠다
누워서 이런걸 적어 내려가는데, 계속 미안하다
이러다 자겠지,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으로 바뀐다
한심하다가 잠들겠지
아침이면 미안함도 한심함도 뻐근한 마음도 잊겠지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면 또 미안하겠지

이 비관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평년기온*


어제의 꽃과 오늘의 꽃이
작년의 나무와 올해의 나무가 다른 것처럼
언제나 그보다 높거나 낮은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다
누군가는 알코올 중독으로 죽고 누군가는 술은 입에도 안 댔지만 간암에 걸려 죽는다
오직 삶과 죽음만이 평균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어제의 사랑과 오늘의 사랑이 다르니
나는 매일 태어나고 매일 죽는다
그렇게 순간순간 평균에 다가간다
언제나 그보다 높거나 낮다가 그것에 다다르는 것이 인생이다

*최근 30년 간의 평균 기온

AND

구름 사내


사내는 구름 위에서 살았다
구름을 뜯어 먹었다
구름에 파묻혀 낮잠을 잤다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오줌을 갈겼다
그 오줌이 비가 되어 땅을 적셨을까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흘러흘러 걱정이 없었다
어느날 사내는 구름이 점점 작아지고 있음을 알았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오줌도 마렵지 않았다
그러다가 외로워졌다
외로워서 울었다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펑펑 울었다
그 눈물이 비가 되어 땅을 적셨을까

사내는 구름에서 몸을 던졌다
그 몸은 낮은곳으로 낮은곳으로 향했고
추락중인 사내는 구름을 보며 웃고만 있었다
AND

다음 생에는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
한 여름 동네 사람들 쉬어가는 버드나무도 좋고
한 겨울 실연당한 어느 여인을 안아주는 자작나무도 좋다
잣나무가 되어서 잣을 떨궈도 좋고
소나무가 되어서 어느 집의 기둥이나 서까래가 되어도 좋다
젊은 농부의 희망이 될 과수원의 어린 사과나무도 좋고
고로쇠나무가 되어서 뼈가 약한 사람들에게 물을 퍼주어도 좋다
시집갈 딸을 위해 심은 오동나무도 좋고
누군가의 유골을 묻은 층층나무도 좋다
어느 작은 선술집 앞 벚나무가 되어 꽃피는 계절에 피로에 찌든 여주인의 얼굴에 웃음을 주면 참 좋겠다

다음 생에는
말없이 비바람을 견디고
가만히 모두를 보듬어주는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

AND

4월


이 계절을 조금 더 걷고 싶다는 애인의 성화에
몸을 굽혀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키려던 담배를
허겁지겁 손에서 놓치고
고개를 들어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기도 전에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 위로 벚꽃이 떨어지는 시절

AND

이발사의 노래



나는 노래하는 이발사
기타로 단련된 손으로 남의 머리를 자르지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도 나에게는 정수리를 보이지
나는 남들의 정수리 냄새를 맡고 저녁이면 그 냄새를 노래하지

나는 겸손한 이발사
내 손님들은 모두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지
미국 대통령이 와도 예외란 없지
나는 손님들에게 빨대를 꽂은 요구르트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건내지
나는 어른들이 떡손이라고 했던 두터운 손으로 남의 머리를 떡 주무르듯 하지
기타를 다루듯 세심하게 머리칼과수염을 잘라내고 저녁이면 낮에 잘라낸 머리칼에 대해 노래하지

나는 노래하는 이발사
세상에게 겸손한 노래하는 이발사

-> 어제 머리를 잘랐고 오늘은 노래하는 이발사를 만났다


AND

나무


나무는 언제부터 나무였을까
나는 언제부터 나였을까
나무가 나였을까
사람이 죽으면 나무가 될까
나무 나무 나무, 하고 부르면
내 몸에서 나무 냄새가 난다
나무 나무 나무

 

song ver


나무는 언제부터 나무였을까
나는 언제부터 나였을까(1 3 2 6)
나무가 나였을까
내가 나무였을까(1 3 2 6)

1 6 2 5

사람이 죽으면 나무가 될까
나무가 죽으면 사람이 될까(1 3 2 6)
나무가 나였을까
내가 나무였을까(1 3 2 6)

나무 나무 나무, 하고 부르면(1 4 5 1)
내 몸에서 나무 냄새가 난다(1 3 2 6)

나무 나무 나무 나무(1 4 5 1)
나무 나무 나는 나무(1 4 5 1)

AND

2015년 춘분, 팽목항

황사인지 미세먼지인지 뿌연하늘
보리싹이 올라온 남도의 들판
광양에는 매화축제
파랑인지 초록인지 검은빛인지 모를 바다
그 바다에서 노란 리본을 달고 피어오르는 검은 꽃들
꽃이 된 사람들과 별이 될 사람들
물수제비 뜨는 아이들과 낚시꾼들
새월호 관광객들은 예의가 없어서 주차를 아무데나 한다고 하는 현지인

인사를 하러 왔다가 인사만 하고 돌아가는 나

산사람도 살아야하고 죽은 사람도 살아야하는 세상
언젠가 마멸될 것을 알지만 그래도 살아야지
감사할 일이 없는 세상에 감사하며 살아야지
언젠가 꽃과 별, 바다와 하늘, 사랑과 증오, 삶과 죽음, 너와 나까지
한 통속인 모든것이 사라질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지
AND

그날


그날,
너는 술을 먹다가 대학교 운동장의 100미터 트랙을 달렸다
네가 일으킨 바람에 빈 과자 봉지와 종이컵이 나뒹굴고 쏟아진 술은 잔디에 스며들었다
팔을 휙휙 올리며 걷던 아주머니와
아이와 공놀이를 하던 아빠와
농구를 하던 한 무리가
너의 질주를 지켜봤다
우리는 일순간에 구경꾼에서 구경꺼리가 됐다
너는 상기된 얼굴로 몇 초냐고 물었고
나는 14초라고 답했다
나는 네가 달린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연인이었고 이유가 필요없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날,
내가 너에게 초시계를 건내고 나도 너를 향해 달렸더라면
나는 너에게 닿을 수 있었을까

너의 뜀박질로 하늘을 올라
너의 날개로 나를 너에게 데려가 줘
이유를 묻지 않는 나를
아무런 이유도 없는 너에게 데려가 줘

-> 맘에 안든다. 열심히 써야지.
AND

겨울나기


기름값이 싸다지만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
이번 겨울은 따뜻하다
방한 텐트 안에서 잔다
잠든 아내가 이를 간다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멀리서 옆집 아저씨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담배를 태울까
텐트 밖으로 발을 뻗어본다
차가운 공기가 살갗에 닿는다
몸을 떤다
냉큼 이불 안으로 들어온다
쓰레기차 지나는 소리 들린다
가난에 대해서 생각한다
가난한 겨울에 대해서
가난한 이웃에 대해서,
새벽의 쓰레기차를 운전하는 사람과 쓰레기 봉투를 차 뒤에 옮겨 싣는 사람에 대해서
거리에서 자는 사람들과 망루와 철탑에 오른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아내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뺨을 어루만진다
온기를 느낀다
이런 나를 모르고 잠든 아내가 고맙다

겨울아 겨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네 옆에 누워서 이를 갈며 자는 사람

AND

안경, 흐르다


마주앉아 밥을 먹다가
흘러내린 당신의 안경을 올려준다
당신이 나를 똑바로 볼 수 있도록
내 사랑을 바로 볼 수 있도록
흘러내린 당신의 안경을 올려준다
뱃속에서 아래로 아래로만 흘러내리는 밥알처럼
안경이란 것은 흘러내리게 돼있다
사랑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당신이나 내가 빈곳과 마주보고 밥을 먹으며
당신의 안경을 올려주던 순간을
안경을 올리던 내 손끝을 떠올릴 것을 생각한다
그때, 다른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눈물이 흘러내릴 것이다
AND

왼손잡이

 

 

애인과 방파제 위를 걷고 있었다. 파도의 포말이 주는 포만감에 먹은 것도 없이 배가 불렀다. 고래 한 마리가 불뚝 튀어올라 내 오른팔을 뜯어 먹었다. 고래는 배가 고팠다고 했고 나는 알았다고 했다. 구멍난 어깨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다. 그믐달이 바다를 비추고 피를 먹은 바다는 분홍빛으로 물들었다배고픔을 몰라서일까. 팔이 떨어져나간 자리가 아프질 않았다. 왼팔로만 애인을 안고 피가 멎을 때까지, 해가 떠오를 때까지 입을 맞췄다. 나는 이제 왼손잡이다.

AND

뜻도 모르고 쓰는 말 4

새누리

새 - bird
누리 - ‘세상’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새들이 사는 높이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니 자기 눈높이에 없는 것들은 다 하찮게 생각하는가?
날지 못하는 새가 너희들 대장이란다
그러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던진 돌팔매에 날개가 부러진다




-> 뜻도 모르고 쓰는 말 시리즈를 시작했다.
AND

입장(立場)


공룡이 천 만년 동안 서서히 멸망해 가는 것을 지켜본 지구를 생각한다
지구의 입장을 생각한다
일 만년 동안 흥망인지 멸망인지를 하고 있는 인류를 바라보는 지구를 생각한다
지구의 입장을 생각한다
지구에서 이것저것 꺼내 쓰고 있는 인간의 입장을 생각하고
그것을 내버려 두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는 지구의 입장을 생각한다

너와 헤어진지 20년이다
내 안에서 아직 멸망하지 않은 너를 생각한다
너의 입장을 생각한다
나의 입장을 생각한다

입장 입장 입장
지구와 인간과 당신의 입장
그리고 나의 입장
오늘따라 입안이 쓰다

AND

금연


밥을 먹고 옥상에 올라왔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마지막 담배를 태우는 지금을 마음속 깊숙히 담아운다
들이킨 연기들이 마지막 인사를 폐속에 새긴다
그 동안 고마웠다고

눈을 뜨고 밥을 먹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고
거나하게 취하고 그래서 토하고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해장술을 먹고
어느 선술집의 처마밑에서 떨어지는 비를 피하고
키스를 하고
네 몸에 내 몸을 찔러 넣고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배가 고프고 마음이 텅 비고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뜨기까지

너와 함께한 순간들은
나의 일상은
나의 인생은
이제 어디에 기록될까
어떻게 기억할까
기억조차 거부하는 삶을 살까

오늘 담배를 끊었다



- 열심히 하자는 결심으로 어쩌다 하나씩이라도 올려야겠다.
AND

그저


누군가에겐 고맙고
누군가에겐 미안한 일들이 엉켜 있다

세상에는 어쩌면 이리도
고맙고 미안한 일 밖에 없을까

나의 모든 고마움과 미안함이 사라지는 때가
나와 나의 세상이 사라지는 순간일 것이다

그저

나는 당신들이 고맙고
당신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살아간다는 것이
누군가가 고맙고 누군가에겐 미안한 것이라면

나는 그저

당신이 고맙고
당신에게 미안할 뿐이다

 

 처음으로 뭔가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런 걸 썼다. 아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나는 좋다. 볼음도를 떠나려니 여기저기에 고맙고 미안한 일들이 많다.

AND

가을 하늘

 

슬픔이 없는 가을 하늘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만이 그 눈물을 보았다
구름 끝에 맺힌 눈물을 쇠기러기 떼가 지우고 갔다

내일이 없는 우리를 위해 오늘도 해가 진다
바다 너머로 태양이 사라지고 나서야
넌 웃음을 보였다

내일이면 사라질 그 웃음속에
오늘도 나는 잠 못 이룬다

절망조차 마음껏 누릴 수 없는 이번 생이
나는 너무도 가엽구나
너무도 가여워서
우는 법 조차 잊었다

네가 사라진 가을 하늘에서 눈물이 흘렀고
오직 나만이 그 눈물을 보았다

AND

추석


섬을 나가는 뱃표를 사며
일면식도 없던 표파는 여인에게
시어머니 욕을 하던 여인이,
배 위에서 엉엉 울었다
빨간색 렌트카 안에서 울었다
아이를 옆에 읹혀 놓고 울었다
펑펑 울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