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고등어의 몸에 날개를 달면 갈매기가 된다
그 유선형의 몸뚱아리는 스즈키 이치로의 송구만큼이나 아름답다
그 매끈한 몸이 바다와 수평을 이루며 날 때
바다는 온전히 그의 것이 된다

갈매기한테 고등어 통조림을 먹이고 싶다

자, 바다에 가자

AND

동굴


어젯밤에는 모처럼 당신 옆에서 잠을 청했네
새벽빛이 내리고 나는 당신곁을 떠나네

당신은 동굴 속의 겨울잠처럼 잠들었네
나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당신에게 입을 맞추네

내 혀가 당신 입술에 닿을 때
나라는 동굴이 허물어지네

나는 바다를 사랑하고
당신의 몸에서는 메마른 바다냄새가 난다네

우리는 열정도 없이 몸을 섞지만
사랑은 열정도 없이 몸을 섞기도 하는 것이라네

당신의 동굴을 나오며 나는 행복하네

AND

나무


사람들은 나를 지나쳐 간다
저 언덕 너머에는 바다가 있을까
누구도 뒤를 돌아 나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외롭다

사람들은 나를 지나쳐 간다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몸을 떤다

저 언덕을 넘어 바다에 가고 싶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그렇지만 나는 나무
천개의 눈을 가졌지만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

나는 나무

AND

사랑의 어원은 사람
사람의 어원은 사랑

사람은 사랑이고 사랑은 사람이다

사랑사랑해
사람사람해

사람들은 사랑사랑해

AND

벼베기


벼 벨 때가 됐다고 기러기떼가 찾아왔다
기러기들은 어째서 공중에서 짝짓기를 하는가
어째서 무리를 지어 나는가

들판의 벼가 금빛 춤을 춘다
스륵스륵 춤사위에 맞춰 사각사각 낫을 놀린다

- 어렸을 때부터 하면 그렇게 되는 거에요?
- 어렸을 땐 안 했어. 너도 한 이십년 하면 이렇게 돼
- 올해 볏값이 많이 싸다는데, 문제 없어요?
- 아, 몰라. 어떻게 되겠지 뭐.

오전 참에 한 잔
점심 먹으며 한 잔
오후 참에 두 잔
저녁 먹으며 또 한 잔 마신다

취기가 돌고
저녁달이 붉게 흔들린다

갠지스 강에서 흰 빨래를 하는 노인이 아니더라도
벼를 베고 술에 취해 잠드는 오늘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망각 속에 잠드는 오늘은
꿈 속에서도 벼 냄새를 맡는 일은
아카시아 향기 속에 모를 내고 새떼들의 군무 아래 벼를 베는 일은
이 벼로 밥을 지어 먹는 일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AND

여보


새근새근 내 옆에 잠든 사람
이를 갈며 잠든 사람
여보, 가만히 불러본다
여기보시오 친구여
여보(如寶), 보석 같은 사람, 나랑 같은 사람아
눈뜬 내가 잠든 너를 나지막이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여보

AND

믹스커피


눈 뜨자 마자 물도 마시기 전에 한 잔
어제 널 힘들게 했던 일들은 잊어
오늘은 달콤하고 향기로운 날이 될거야

아침엔 출근길 토스트랑 한 잔
점심엔 해장국 집에서 한 잔
저녁엔 소주에 삼겹살 먹고 한 잔

이발소에서 면도 마치고 한 잔
병원에서 차례 기다리며 한 잔
거래처에서 김 부장님과 한 잔

담배 태우며 한 잔
속 쓰려서 한 잔
달콤한 것 먹고 싶을 때 한 잔

커피, 설탕, 프림의 아름다운 조화처럼
그 순간 순간 조화롭게
인생은 이렇게 조화롭게 사는거야
한 잔, 한 잔 마시면서
한 고비, 한 고비 넘는거야

아버지 제삿상에 한 잔
모처럼 만난 어머니와 한 잔
당신이 그리워서 한 잔

기쁨도 슬픔도
보고 싶은 사람마저도
그렇게 커피 한 잔에 지나가는거야

AND

바람


바람이 나를 민다
바람에 밀려 걷는다

휘청거리는 내가 싫어
방향을 바꾼다

세상만물에는 인력(引力)이라는 것이 있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이 숙명이라는데

바람은 나를 밀어내기만 하고
나는 그런 바람이 야속하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생각한다

우리에게 인력이 머물던 시절에
나는 바람이 되고 싶어 했고
당신은 나무가 되고 싶어 했다

바람은 그 시절의 나처럼 
나를 모질게 밀어낸다

바람, 하고 불러도
바람아, 하고 달래도
바람이여, 라며 애원해도

그것은 대꾸도 없이 나를 때리고
나는 여전히 당신의 원망을 이해할 수 없다

바람이 강하게 분다

AND

고구마 꽃


사람들에게 잘못한 일들이 쌓이면
고구마 밭에 들른다

부끄러움을 아는 나이가 되고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어떤날은 너무도 부끄러워서 스스로에게 민낯을 보일 용기조차 없다

새벽에 혼자 들르는 고구마 밭은
모든 것에 솔직한 시간이다

세상에 잘못한 일들이 많아 밭에 들렀다
안개속 고라니 발자국 사이로 고구마 꽃이 피었다

꽃말이 행운인 고구마 꽃이 피었다
100년에 한 번 핀다는 꽃이 100송이 피었다

10000년치의 행운을 어찌할까
모든 잘못을 씻어 달라고 할까
복권을 살까
사업을 시작할까
이웃들에게 나눠줄까
먼곳의 친구들에게 전할까

이런 바보 같은 나를 안아주는 당신에게 전해야겠다
미안하고 미안하고 고맙고 또 고마운 당신에게 전해야겠다

꽃 지기 전에 전해야겠다

AND

석모도 - 보문사에서


연등에 달려있는 이름들
주렁주렁 매달린 풍전등화 같은 삶들
내 삶도 저들 옆에 매달아볼까

사람들의 염원이 입장료 2000원
불전 앞에 놓인 초코파이와 함께 모여든다

마음이 모여 산을 이루니 못할 일이 없지
마음이 모여 구름을 만들고 비를 내리지

하지만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지
장사 중에 마음 장사만한 것도 없지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헤헤
염불을 읽는 목소리가 슬프고 경박하다

어젯밤 누군가에게 바람을 맞았을까?
첩은 마음이 아니라 옷자락만 붙잡는다는데

염불 소리 따위 누구도 신경쓰지 않지
마음을 모으는 일이란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지

AND

바램


알짜배기 땅에 알짜배기 농사를 짓고 싶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누구라도 놀러올 수 있는 흙집을 짓고
감자, 고추, 옥수수, 오이, 참외, 수박, 호박, 가지, 토마토, 당근, 콩, 참깨, 들깨, 배추, 무, 양파, 마늘을
내 멋대로 심고 길러서 내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나눠 먹고 싶다

봄이면 쑥을 캐고
가을엔 칡을 캐서
속 아프고 몸이 찬 우리 엄마에게 보내야겠다
여름이면 오디 술을 담가서
친구들과 함께 먹어야겠다
가을에는 산딸기 술을
겨울에는 뱀술을 먹어야겠다
누룩을 띄워서 막걸리도 담가야겠다
막걸리엔 꿀을 넣어 먹어야겠다

엄마는 병이 낫고
친구들과 나는 낮술에 취해 평상에 누워 하늘을 볼 것이다

집 앞에는 냇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장마비가 내리면 물과 같이 넘쳐 땅에 펄떡이는 고기를 잡아야겠다
집 뒤에는 뽕나무, 자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를 심어야겠다
나무 아래에 아버지를 모셔야겠다
철마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열매를 따 먹어야겠다

집엔 손님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손님들과 함께 밭에서 일하고 함께 밥을 해 먹어야겠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솥을 걸고 닭을 잡아야겠다
나만 아는 곳에 심어둔 인삼도 닭과 함께 솥에 넣어야겠다
손님들과 같이 논김을 매다가 지쳐서
논두렁 옆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늘어지게 자는 날도 있을 것이다

봄에는 취나물을 뜯으며 당신을 생각할 것이다
여름에는 손모를 내며 당신을 생각할 것이다
가을에는 도토리를 주우며 당신을 생각할 것이다
겨울에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당신을 생각할 것이다
친구들이 술에 취해 잠든 밤에도 당신을 생각할 것이다
어느날에는 너무 생각나서 울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몸의 털이 다 허옇게 세고 머릿속도 그리되는 때가 오면
이렇게도 즐겁게 살았노라고
세상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다
그리고는 얼큰히 취해서 아버지 숨겨놓은 바로 옆 나무에 기대서
조용히 눈을 감고 싶다

아무일도 없이 살다가 아무일도 없이 간다고
나에게만 나에게만 말하고 싶다

AND

억새밭


단풍이 유행처럼 번지는 계절
숲길을 걷는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기만 한 오후
한 사내가 억새밭에 들어앉아 울고 있다

햇살을 맞은 억새들은 은빛으로 울고
그 한 가운데 사내의 눈가도 반짝거린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주저앉아 덩달아 울고 있는

나를 깨달았다

눈물도 유행처럼 번지는가
혹여, 저 사내가 내가 아닌가 생각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내는 그림자도 없고
노을아래 억새만
붉게 타고 있었다
AND

악몽 3


얼음 가시로 가득 덮힌 절벽을 오르고 있다
알몸으로 이유도 모른채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바닥으로 떨어지면 날카로운 얼음 송곳들이 온몸을 관통할 것이다
차갑다
아프다
두렵다
가시에 찔린 온 몸이 피투성이다
손에서 흐른 피가 얼음 송곳 위에 붉게 물든다
아름답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올라야 한다
이제 마지막이다
최후의 힘을 짜내서 절벽 끝에 고개를 내민다
또 다른 얼음 절벽이 눈 앞에 서 있다
절벽을 오르다 떨어진 사람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다
절망이다
두 손에 힘을 빼고 아래로 떨어진다
이유도 모르고 위로 올랐기에
이유도 모르고 추락한다
이것이 꿈이라면
어서 끝내고 싶다
낙하하는 어둠 속에서 내 눈동자를 보았다
피눈물을 흘리는 내 눈동자를 보았다

AND

악몽 2


소녀와 나는 어느 방에 갇혔지
우리는 번갈아 노래를 불렀지
텅빈 변기에 머리를 집어 넣고 노래를 불렀지
이유도 모른채 노래를 불렀지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지
소녀의 아름다운 노래가 끝나면 내가 이어 받았지
우리는 언제 끝내야 하는지 모를 노래를 불렀지

어느날 나는 생각했지
어째서 계속 노래를 부르는가
우리의 노래가 끊기면 어떻게 되는걸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소녀의 얼굴이 보고 싶다
나는 소녀를 구해주러 온 영웅일지도 몰라

그날 소녀의 노래가 끝나고 나는 노래를 이어가지 않았지
나는 불안에 떨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보았지
나와 똑같이 생긴 소녀를 보았지
우리의 노래가 멈춘 변기에서는 우리가 불렀던 노래가 흘러 나왔지
노래와 함께 귀가 없고 입만 달린 괴물들이 튀어나왔지
나랑 똑같이 생긴 괴물들이 튀어나왔지
우리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지
그곳은 또 다른 방이었지
우리랑 같은 얼굴을 한 괴물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

나는 이제 궁금한 것이 없지

AND

악몽


심하게 취했다
지하철 출구를 나오며 우산을 편다
비바람이 분다
발걸음이 무겁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 무겁다
시지프스가 나와 같았을까
뒤집어 지려는 우산을 붙잡고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짜낸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산처럼 무겁다
10분만 걸으면 집이다
얼른 가서 쉬고 싶다
온 몸을 우산과 함께 앞으로 기울인다

나를 막아선 것이 바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비만 내린다
그런데도 우산이 뒤집힐 지경이다
대취한 줄 알았는데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방금 내 옆을 지나간 미녀에게
오늘밤 시간이 있는지 말을 걸어야 한다
그러자면 발을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제길

내 집이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텅빈 거리에 나만 혼자 남있다
나를 막아선 것이 빗방울인 줄 았았는데
이제 보니 비는 처음부터 내리지 않았다
화가 나서 우산을 집어 던졌다
우산이 빛이 되어 달을 향해 사라졌다
중력이 사라진 듯 내 발걸음이 바람보다도 빠르다
내 걸음이 내 시선을 따라 달에게로 갔다

AND

관람차


관람차 사업을 해야겠다
어디에나 내가 만든 관람차가 돌아가겠지
그러면 나는 돈을 벌고 더 많은 관람차를 만들 것이다

지구 위 어느 곳이든 내가 만든 관람차가 돌아가고
그 안에서 연인들은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겠지
짝을 잃은 누군가는 새로운 인연을 생각하겠지
위험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몸을 섞기도 하겠지
어린아이들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마냥 좋아하겠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자신들의 호시절을 내려다보겠지

관람차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을 살겠지

나와 내 연인은 관람차가 올라가는 동안 김밥을 먹을 것이다
관람차가 정상에 우뚝 섰을 때 나는 정지 스위치를 누를 것이다
새들은 날개를 인간은 무게를 짊어지고 살지만
그 순간 우리는 새들의 높이에서 무게 따윈 잊을 것이다
해는 저물어 가고 멀리 기러기 떼가 날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이야기 하고 구름 위를 걷는 키스를 할 것이다
우리의 키스는 황혼이 저물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날이 저물면 우리의 미래도 함께 저물고
우리는 그제야 땅에 내려와
그때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추억할 것이다

AND

결혼 전날


때밀이 아저씨에게 몸을 맡겼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아저씨 손길을 따라 움직이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몸을 씻고 면도를 하고 머리를 잘랐다
내일부터 새 사람이 되려고 오늘 새 사람이 됐다

어머니가 밥 먹자고 하면 밥 먹고
목욕 갔다 오라고 하면 목욕 갔다오고
양치하라고 하면 양치하고
저녁 먹으러 나가자고 하면 나가고
김치 더 먹으라고 하면 더 먹었다

그렇게 착한 아이가 됐다
엄마 말 잘 들은 하루, 결혼 전날

AND

데이트


6월, 대관령 양떼 보러 가는 길
차창 밖의 산들이 여름산이 되어간다
나도 산처럼 봄에는 봄이 되고 여름에는 여름이 되고 싶다

- 오늘 휴게소 날씨가 참 좋네요
- 그러네요
- 구름은 사람들의 소망이 모여서 생기는 거 아세요
- 그런가요? 마음들이 예쁜가 보네요.
- 저희 집에 어미 없이 자란 고양이가 있어요

그 고양이가 태초부터 엄마였다는 듯
갓 태어난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듯
산이 구름의 그림자를 품고 있다

당신 옆에 누워서
손을 잡고 나란히 누워서
나무가 되고 싶다
당신 품에 안겨 나무가 되고 싶다
산이 되고 싶다

AND

협의이혼 2


어머니는 밤새 한숨도 못 잤다고 하고
아버지는 상기된 얼굴로 웃는다

지방법원 대기실에
한 이불에 들던 사람들이 잔뜩 들어앉았다

법이라는 이름 앞에 엄숙해진 사람들은
판결의 시간만을 숨죽인 채 기다린다

꿀꺽,
어디선가 침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쾅쾅쾅

법원문을 나서는데 우연처럼 비가 내린다
사람은 셋인데 우산은 하나다

방금 이혼한 두 사람이 자연스레 한 우산 아래 든다

아버지는 이제부터 미쓰 김이라고 불러야 하냐며 농을 치고
어머니는 배꼽을 잡고 웃는다

불안한 마음에 밤은 지샌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의 품에 들었다

바다에 노니는 푸른 생선 같았을 두 사람의 꿈이
우산을 때리는 빗방울 되어 흩어진다

나는 두 사람의 꿈에 갇혔다

AND

볼음도 생활 - 뻘그물(건강망)


저마다의 호시절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억하며 갯벌에 나간다
대통령이 누구였건 시절이 어땠건
젊은 몸뚱이를 마음껏 부리던 그때가 호시절이다

밤새 망둥이 배를 땄던 일
가오리를 잡다가 쏘였던 일
한 경운기 다 싣고도 넘칠만큼 밴댕이를 잡았던 일
담배를 안 챙겨 나와서
갈매기가 그물에 든 고기 다 뜯어 먹거나 말거나
바다 가운데서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나갔던 일
경운기가 뻘에 빠져서 맨몸으로 혼자 걸어 돌아온 일
경운기 안에서 잠이 들었다가 바닷물이 들어와서 죽을 뻔 했던 일
어느해에 복어를 먹었다가 같이 먹은 사람 중에 자기만 살아난 일

가장 슬픈 일은
조개잡던 어머니가 바다에서 돌아가신 일

비바람이 불고 안개가 바다를 사로 잡아도
무엇에 사로 잡힌 듯 하루에 두 번씩 바다에 나간다

오늘은 어떤 게 잡혔을까?
귀한 생선은 식구들이랑 먹어야지
암만 흉어라도 반찬거리는 잡겠지
누구네보다는 많이 잡았으면 좋겠는데

저마다의 호시절은 지났어도
저마다의 생각으로
하루에 두 번,
물 때를 맞춰 바다에 간다

AND

아내


핵전쟁에서 살아남은 아이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
갓초경을 한 소녀의 몸을 가진 발가락이 예쁜 사람
달팽이가 입술을 걷는 듯한 키스를 건내는 사람

운명을 믿는 나
그 운명에 약간의 틈이 생겼을 때, 그 틈으로 들어와 내 운명이 된 사람

당신을 보면 너무 좋아서 이를 앙시물게 된다
어떤 야동은 너무 몰두해서 보게 되는데, 당신에게 미안하다

나는 똥두 싸야되구 오줌두 싸야되구 싸야될 게 많아
더럽구 웃기다며 당신이 웃는다

가끔 당신은 운다
당신이 울면 나도 운다

하루끝, 피곤한 당신은 이를 갈며 잔다
나는 그 옆에 누워서 당신 정수리에 손을 갖다대고 잠든다

모든것이 완전한 시간, 이것이 사랑

AND

빚더미


땅을 사려고, 집을 사려고, 차를 사려고, 맛있는 것을 먹으려고, 아이를 학원에 보내려고 돈을 빌린다
집과 땅은 안 팔리고 차는 중고가 되고 흰 쌀밥에 간장만 비벼 먹어도 맛있고 아이는 공부가 싫다
땅이 안 팔려서, 집이 안 팔려서, 차가 헐값에 팔려서, 집에 쌀이 떨어져서, 그런데도 아이 학원은 보내야해서 돈을 빌린다

빌린 돈으로 빌린 돈을 갚는다
빌린 것 없이 태어나 빌린 삶을 살고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몸뚱이를 버린다

너도 나도 빚더미
우리 모두 빚더미
나라도 빚더미
세상도 빚더미
어차피 빚더미

빚은 삶에 덤으로 얹히는 것
삶은 빈손으로 태어나 마이너스로 가는 것

그래도

월급 받아서 월세를 살았더라면
버스를 타고 다녔더리면
옆구리가 미어져 나오도록 먹지 않았더라면
아이가 마음껏 놀게 놔뒀더라면

잠이 오지 않는 날들이
건물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날들이
다리 위를 지날 때마다 생기는 어떤 마음이

지금보다는 적었을텐데

AND

황소인력


김포시 대곶면 황소인력 
황소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다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고
침을 뱉고
수군거리고
커피를 마신다

장맛비 내린다
어제부터 내린 비로 바닷물도 불었다
비를 맞은 소들은 할 일이 없다

사람들은, 건물벽에 바짝 붙어서
고개를 숙인 채 담배를 피우고
바닥에 침을 뱉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수군거리고
자판기 커피를 마신다

사람들은, 눈을 끔뻑이며
해가 뜨기를 황소가 되기를 기다린다

AND

여름 - 바닷가에서

노인들도 조심스럽게 쌍쌍바를 가르고
아토피 어린이도 쭈쭈바를 먹는 계절
누구든 붙잡고 시원하게 한 대 치고 싶은 더위
식어버린 냉커피를 파는 할머니
방파제 위를 사라질 듯 걷는 젊은 연인들
아빠 손을 잡고 뒤뚱거리는 아기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낚싯대
바람에 날리는 붉은 원피스의 끝자락
잘록한 허리 아래 그것을 추스르는 몸짓
벤치에 애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가려지지도 않을 흰 다리를 가리는 여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홀짝홀짝 사라지는 구름 조각들

사람들은 바다에 오면 바다만 보는데
나는 바다를 보면 당신만 생각납니다

AND

울었다 2


당신을 생각하다가
술에 취했다
오토바이에 올랐다
평소엔 넓던 길이 점점 좁아졌다

아프지 않다
일으켜 세우는 오토바이가 무겁다
이런, 피가 나잖아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
정말 아프지 않다
이런, 피가 멈추질 않는다
그래도 아프지 않다

길이 좁으니 조심해서 가자
아프지 않다
를 되내이며 집에 왔다
아픈것을 참으며 몸을 씻었다

아프다고
아프다고
너무 아프다고
옆에 없는 당신을 붙잡고 울었다

 

울었다 1

AND

불안


손톱끝이 엉망이다
어제도 엉망이 되도록 마셨구나
돌아오던 길의 기억은 없지만
아기가 어미젖을 빨듯 손톱끝을 물어 뜯은 기억만은 생생하다

동지 지나고 해가 길다
어느덧, 문득, 어느샌가, 돌아보니
해는 길고 나는 어른이라 불린다
자고 일어나면 새는 울고 날은 바뀌고 해는 길어진다

그러다가 나는 사라진다
사라지니까 사람이다

오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눈이 내린다
눈 내리는 아침
어딘가에서 들려올 불행한 소식을 기다리며 담배를 피운다
휴대전화 안에는 불행들이 넘쳐난다
다행이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세상을 향해 분노의 헛발질을 하는 내 모습에 헛구역질이 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AND

있었다



닦아도 닦아도 계속 휴지에 묻어 나오는 똥처럼
날이 지나고 지나도 자꾸자꾸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메뉴도 간판도 없는 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손을 잡고 천변을 걸어보기도 전에 끝나버린 연애가 있었다
해바라기 향기가 나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개 물그릇에 나뭇잎을 띄워주던 마음이 있었다
내게 발가락을 내어줄 것 같던 사람이, 돌이 될때까지 말없이 나를 안아줄 것 같던 사람이

있었다
AND

협의이혼


오늘은 우리엄마 미쓰김 되는 날
부모님과 함께 법원에 간다

법원 문을 나서며
아버지가 밥을 먹자고 한다

마침 장날이다
사람들이 택배처럼 장터로 쏟아진다

방금 이혼한 두 사람과 그 아들이
시장 구석의 순댓국집에 앉는다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부부가 자주 먹었다는
말캉한 고깃덩어리와 뜨거운 국물을

한때 내장까지 쏟아낼 것처럼 사랑했을 두 사람과
서른을 훌쩍 넘긴 그들의 큰 아이가

30년 전의 그때처럼 셋이서 먹는다
후후 불어가며 먹는다

아버지는 ‘특(特)’으로 먹는다
나와 내 어미에게는 여전히 그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엄마랑 나는 보통으로 먹는다
하지만 나는 보통으로 사는 게 어떤 건지 모른다

각자의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우리는 각자의 세계로 흩어진다

무거운 하늘 위로
새들이 무리지어 날아간다

AND

무방비


벌에 쏘였다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당했다
엊그제 집안의 벌들을 태워 죽였다
그네들도 급작스럽게 당했다
자식을 잃은 것에 대한 복수였을까
따끔했던 손 끝이 아리고 또 아리다

인간이고 곤충이고 다 무방비다

발정났던 고양이가 울음을 그쳤다
며칠만에 나도 녀석도 집안도 조용하다
온기가 그리웠을까
내 품에 안겨 그르렁댄다
차마, 저린 다리를 풀지 못했다

인간이고 동물이고 다 무방비다

화력발전소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배가 기울어 사람들이 물에 잠겼다
공장에서 일하고 병에 걸린 사람들이 죽었다
군대에서는 사람이 맞다 죽기도 한다
어제 나는 아차, 하는 순간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다
떨어지고 잠기고 죽어가는 순간에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인간이란게, 인생이란 게 다 무방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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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음도 생활 - 조개잡이


조선시대 임금님도 먹었다는 상합을 캔다
조개중에 으뜸이라 하여 上字를 쓰는 상합을 캔다
질기기만 하고 맛이 없어 우리들은 잘 먹지 않는 상합을 캔다
바다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상합을 캔다
백까지 빛깔이 나서 백합이라고 블린다는 상합을 캔다

먹지도 않을 거 맛이야 아무려면 어때
많이만 잡으면 그만이지
조갯값만 으뜸이면 그게 상합이지

일년에 단 한 번 북한 땅이 보이는 갯벌에서 상합을 캔다
캔 것을 지고 나갈 힘이 없는 노인들도 캔다
부부가 함께 나와서 캔다
아이도 데려와서 캔다
쉬지도 않고 캔다
땅만 보고 캔다

떼돈을 줘도 내일은 안 나온다는 일
그래놓고 떼돈을 안 줘서 내일도 나오는 일
다리에 마비가 오고 온몸에 뻘흙이 묻어도 조개 꾸러미를 짊어지고 나와야 하는 일
굴껍데기에 발바닥이 다 찢어져도 내 힘으로 뭍으로 나와야 죽음을 모면하는 일
다음날 아침 뱃터에서 내가 제일 많이 잡았다며 자랑해야 하는 일
모두가 많이 잡아서 부자가 되는 일
꿈이 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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