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구에서

바다와 강이 서로를 밀어낸다
한쪽으로 넘치거나
반대쪽이 마르지 않도록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조금 약하게
낮과 밤이 서로를 밀어내는 만큼만
달이 지구 주위를 돌고 지구가 태양을 도는 만큼만
닿으면 부서져 버리는 거리만큼만
딱 그만큼의 힘으로
딱 그만큼의 사랑으로
흐릿하게 무너지는 경계에서도
바다는 바다고 강은 강이어서
나도 나일 수밖에 없어서
두 눈 감아버리는 하구에서
사랑이라고 사랑이라고
바다와 강이 서로를 밀어낸다
AND



입술에 닿지도 못한 술 한 잔에
세상의 모든 활자가 나에게로 오는 밤
세상의 모든 시가 나에게로 오는 밤
세상의 모든 글이 나에게로 오는 밤

생의 비밀을 안다고 생각했던
나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
누굴 만나도 자신 있었던
나는 단 한 음절만 적어 낼 뿐이다

너,
너 쉼표

잠깐 쉬었다가 다시
너.

이번엔 쉬어갈 틈 없는
너?

나인지 너인지
너!

단호하게 마치는


네가 나에게로 오던 밤의
너...
AND

배탈


크릴새우가 플랑크톤을 먹고
정어리가 크릴새우를 먹고
백상아리랑 범고래가 정어리를 먹고
인간은 정어리 통조림과 상어 지느러미와 고래 내장을 먹는다

지렁이가 흙을 먹고
잠자리가 모기를 먹고
닭이 지렁이랑 잠자리를 먹고
개가 닭을 잡아 먹고
인간은 닭개장도 개장국도 먹는다

결국 인간이 인간을 먹는다
더 배고픈 인간이 덜 배고픈 인간을 먹는다
사실은 배부른 인간이 배고픈 인간을 먹는다
합법적으로도 불법적으로도 먹는다

그래야 인간이라고
그게 인간이라고
새우 뱃속의 플랑크톤이
지렁이처럼 길게 까무러친다

이 지극한 순환에
배고픈 나는 배탈이 났다
AND

가물다. 생수 판매를 금지시키면 좋겠다. 수세식 변기를 다른걸로 대체해야 한다. 바닷물을 손쉽게 식수로 바꾸는 방법이 필요하다. 물을 아껴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한다. 딱 일 년만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인류가 자연에 의해서 그 생을 마쳐가고 있다. 전 인류가 석유 문명을 거부하는 삶을 산다면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70억이든 80억이든 지표 위에 사람이 너무 많다. 그렇다면 멸망의 레일 위에서 맛있는 거나 사 먹고 놀러나 다니면서 이 시대의 마지막을 즐겨야 할까?

스탠스란 단어를 좋아한다. stance 좌우의 균형을 잡는듯한 단어의 모양새가 좋다. 스탠스 하고 읽으면 다리를 벌리고 안정적으로 서 있는 느낌이 든다.

2017년, 마흔살, 나는 언젠가부터 멈추어 있다.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할까?

담배는 끊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가급적 채식을 하려고 한다. 뱃속이 편안한 상태에서 건강하게 멸망하고 싶다.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결국 인간은 저 하고 싶은대로 할 뿐이다.

어제 술을 마셨는데, 남자들끼리 하는 얘기에 잘 끼는 것만으로도 나쁜놈이 되는 기분을 느꼈다.

나 하고 싶은대로 하는 내가 싫다.
AND

주말

축제의 밤
꽝된 복권
손 잡고 데이트
꼬리가 사라진 별자리
첫 만남에 낮술
멀리서 오는 바다
비틀거리는 계단
기억나지 않는 지명과 이름
파편이어도 좋다는 생각
사실은 헛웃음
흠 잡을데 없이
흘러가는 사람이 되버린
AND

낮술

점심 손님이 다 빠져 나간 식당
아구찜을 시킨다
늘어진 콩나물과 아구
나른한 나와 친구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꾸벅꾸벅 조는 주인장
파리와 선풍기의 궁합
고춧가루 붉게 타오르는 미더덕이
입안에서 뜨겁게 터지고
지 혼자만 냉정한 소주병
잠든 주인 머리맡에 꾸깃한 사 만 칠 천원을 곱게 펴두고 거리로 나선다
아구와 나 친구와 소주
폭염속에 생이 무르익는
8월의 오후 네 시
AND

지국총 - 황인찬

2017. 6. 16. 13:45

지국총

 

호수 공원의 주변을 걷고 있었다 아이를 잃은 엄마가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걸어간다 나는 연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물 위에서 노를 젓고 어떤 사람들은 물 위를 걷는 주말이다 물 위의 사람들은 신나 보이는군 호수 공원의 주변을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공원의 모두가 은총 아래 있다 나란한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는 노부부도 물 위를 홀로 걷는 고독한 남자도 모두 완전하다 나는 은총 아래 연인을 기다렸다 주말 오후의 빛이 공원을 비춘다 돌이킬 수 없는 평화가 공원에 서려있다 호수 공원의 주변을 걷고 있었다 연인은 물속에서 나올 줄을 모른다

AND

바닷가에서

바닷가에는
사라진 것들의 영혼이 떠돈다
삼겹살의 영혼
가리비의 영혼
폭죽의 영혼
입맞춤의 영혼
웃음과 눈물의 영혼
온갖 사라진 것들이 한데 엉켜서
끝없이 이어지는 파도의 영혼을 타고 모래 위로 올라와
서로를 부르는

바닷가에서
나는 돌아오지 않는 당신을 울부짖는다
AND

어부

바다가 안방
바다가 부엌
바다가 화장실
바다가 재떨이
바다가 술친구
바다가 동반자 

바다가 삶
AND

인류 멸망

인간이 멸망해야 한단 말을 입에 달고 다니고
세상이 끝났다고 떠들고 다니며 막 살아도
같이는 죽어도 남들보다 먼저 죽긴 싫다
AND

제주도에서

1131번 지방도,
길에 번호를 붙이는 건 인간 뿐
어디 길 뿐이겠는가
518도로,
길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인간 뿐
어디 길 뿐 이겠는가
어디 인간 뿐이겠는가
사랑하지도 않았던 사람의 전화 목소리를 듣고
혼자 눈시울이 붉어지는 일이
오직 나 뿐이겠는가
오직 너 뿐이겠는가
그렇다면 누가 이 곳 바깥에 있겠는가
어디 번호와 이름 뿐이겠는가
의미란 의미는 누구에게 있는가
그게 당신이라 하면
그 당신이 당신이겠는가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인간 뿐 

 
AND



풍요 위를 걷는다
풋풋풋 가벼운 풋워크
수박 껍질은 둥글다
미끌미끌 미끄르르
여전한 가벼움으로
속이 붉게 멍들고
씨가 까맣게 타도 상관 없다
참외 껍질은 노랗다
바다는 푸르기에
노란색도 슬프지 않다
인류가 마음껏 퍼먹고
플라스틱만 떠다녀도
바다는 여전히 푸른 멍 덩어리
상처투성이로
풍요 위를 걷는다
비계 껍질의 푹신함이 좋아서
애써 속을 들여다보진 않는다
AND

섹스

그저 섹스라고 하면 될 걸
잠자리니 부부관계니
합방이니 사랑이니 한다
심지어는 그거라고도 한다

-> 키스랑 섹스는 만국공통어
AND

장례식장

누군가 죽었다고 하면
이상하게도 장례식장에 가고 싶다
절을 하고 사진 앞에 두 손을 모으며
얼굴도 모르던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생을 살아내고 죽음을 마주한 경이를 느끼고
고깃국 한 그릇과 소주 한 잔으로 살아 있다는 비릿함을 비워 내고 싶다
도떼기 시장 같은 웅성거림 속에서
오늘도 이만큼이나 살아남았다고
그 중에 나도 있다고
기다릴 것 없다고
먼저 떠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AND

평생
 

하루가 지나가는 게 별 거 아니라는 걸 아는데 40년
담배까지 피우며 심각하게 살 필요 없다는 걸 아는데 20년
내 모든 말과 행동이 외롭기 때문이라는 걸
외로움이 병이란 걸 아는데 20년
당신이 내 운명이라는 걸 아는데 40년 걸렸다

그런 당신과 헤어지는데 하루 걸렸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가는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아는데 평생 걸렸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