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지금 여기가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이 아니고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이
이 세상의 가장 밑바닥이 아닌 걸 알기에
바닥이란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몇 번이고 손바닥 위에 적어만본다
바닥이 없이는 바다가 없다
그곳엔 하늘도 땅도 없다
아무 의미를 날지 못하는 새들은 끝없이 추락하고
누구도 누군가에게 닿을 수 없다
아, 바닥을 치지 못하는 삶이여
지금 여기서
한 발 더 아래로 내딛는 일로만
나는 너에게 닿을 수 있고
그때라야 우리는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AND

전성기

어차피 해피엔딩인데 주인공이 곤란을 겪는 영화
힘든 사람은 더 힘들어지거나 죽는 것이 현실
이르던 늦던 꽃은 피는 때가 제 때
한 번도 피어보지 못하고 일촉즉발의 상황같은 것도 없이
말 없이 지기만하는 생들의 틈바구니에서 싹을 틔우는 작은 씨앗
제 때가 오지 않아도 지금을 그때로 남기고 싶은
지금이 우리의 전성기
AND

마른

빈 콜라캔에 마른침을 뱉는다
몇 번째 외로움인가
치이익, 마지막 연기와 함께 담배가 죽었다
몇 번째 절망인가
몇 번째 죽음인가
다만 사랑인가
아니면 삶인가
기계가 찍어낸 것 같은 의문의 나열 속에서
나는 심장이 뛰는 존재
다시 담배를 꺼내 문다
마른 입술 사이로
몇 번째 추억인가
몇 번째 그리움인가
AND

종아리

우연히 본 그녀의 뒷모습
이름모를 고깃집 뒤편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던 그녀의 종아리
견고하고 단호한 삶이 느껴지는 근육질의 종아리
어떤 시절을 견뎠기 때문에 지금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종아리
버티는지 즐기는지 모를 세월에
체념과 우연에만 기대는 날들에
동그래진 내 배를 쓰다듬게 만드는
종아리
AND

물고기

고기는 인간의 말
인간이 먹는 것
인간은 육고기
인간도 인간의 말
인간이 인간을 먹기도 하고
물에 사는 고기
그래서 물고기
발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말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물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물고기  song ver

고기는 인간의 말
인간이 먹는 것
인간도 결국은 고기
인간도 인간의 말

인간이 인간을 먹기도 하고
인간이 인간을 사기도 하고
인간이 생선을 사기도 하고
물고기가 인간을 먹기도 하고

물에 사는 고기
그래서 물고기
뱃속을 헤엄쳐
그래서 물고기

발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말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물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너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AND

콧구멍

콧구멍을 닮았다
눈도 귀도 발가락도 아니고
코도 다르게 생겼는데
하필이면 콧구멍을 닮았다
잠든 엄마를 가만히 보다가
실실 웃는다
엄마랑 나
콧구멍이 닮았다
AND

술꾼

특별히 기쁜일도 슬픈일도 없는 그저 그런날
말도 안되게 술을 많이 마시고
다음날 약간의 후회를 하지만
그날도 그저 그런날
AND

 언제부털까?

 내가 생각하는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다. 나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그다지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 출퇴근, 식당밥, 술, 사소한 취미가 전부인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도 다 마찬가지인 것이 위안이 되지 않는다. 당연하다. 남들의 남들이 이 세상 모든 남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걸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좋은 걸 쓰려면 좋게 살면서 좋은 생각을 해야 한다. 명료하다. 나는 현재 그다지 좋게 살고 있지 않다.

 그래서 너를 생각하고 사랑에 파고드는 일만 메모장에 가득한걸까?

 여기까지 생각하고 슬퍼졌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키운 작물로 밥을 해 먹고, 넓은 마당에 강아지가 뛰어놀면 다 좋아질까? 그 다음에는? 

 앞으로 어떡하지? 그냥 생각하지 말까? 계속 사랑에만 파고들까?

AND

p.32~33

 그림속의 여인은 관객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욕망하는 남자를, 연인이라 생각하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그 남자는 드로스트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드로스트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림 속 바로 그 여인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박물관에서는 보통 떠오르지 않는 생각이 떠올랐다.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 욕망이 또한 상호적이라면 - 그 대상이 되는 이의 두려움을 없애 준다. 아래층 전시실에 있는 그 어떤 갑옷을 입는다고 해도, 그 정도로 완벽하게 보호 받는 느낌은 가질 수 없다.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살아서 경험할 수 있는 느낌 중 불멸의 느낌에 가장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p.70

 로잘리와 루카는 그가 출장을 다니며 발견한 몇몇 도시로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손주들과 시간을 보내고, 옛 친구들도 만나고, 자신이 구상했던 몇몇 발명품의 시제품을 한두 개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은퇴 후 몇 년이 지나고, 로잘리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가끔 집을 나서서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따라 헤매다가,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했다. 결국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루카는 직접 아내를 보살폈지만, 로잘리는 서서히 기능들을 하나씩 잃어 갔고 마침내 병원에 입원했다. 루카는 매일 찾아가, 숟가락으로 저녁식사를 먹여 주었다. 가끔 아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그녀는 그를 완전히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안 가면, 안 왔다는 건 알지 않을까요? 루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p.85

 깊이있는 정치적 저항은 부재하는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고, 미래에는 그 정의가 세워질 거라는 희망과 함께한다. 하지만 이 희망이 저항이 이루어지는 첫번째 이유는 아니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바리케이드를 세우고, 팔을 들고,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인간 사슬을 만들고, 소리치고, 글을 쓰는 것)은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다.

 

p. 109~

 할인 슈퍼마켓에 와 있다. 유럽에서 가장 큰 식품연쇄소매점의 지점이다. 지점 수가 팔천 개가 넘는다. 다른 슈퍼마켓의 절반 가격에 물건들-예를 들면 사과 주스 한 상자-을 살 수 있다. 슈퍼마켓은 도시 외곽 자동차 전용도로가 시작되는 곳에 있다.

 슈퍼마켓 여기저기에 육십여 명 정도의 직원이 있고, 비슷한 숫자의 감시 카메라가 있다. 어떤 물건도 제대로 진열되어 있지 않다. 한쪽 면이 뜯어진 상자에 담겨 있다. 손님들 대부분은 정기적으로 찾는 사람들이라,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손님들 중에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는 가난한 노인들도 있고, 아이들이나, 파트너(파트너가 있는 경우), 본인 혹은 부양가족을 위해 물건을 사는 젊은 여자들이 많다. 모두들, 각자 형편에 맞춰 물건을 최대한 많이 사는데, 일 주일에 한 번-혹은 기껏해야 두번-이상 이곳에 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선 수레에는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고, 언제나 똑같은 음식들-예를들면, 마카로니, 멕시칸 토르티야, 소고기 아시 파르망티에 등-이 몇 개씩 들어 있다. 일부의 노인들만 현금으로 계산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신용카드를 사용한다. 월말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다들 신중하다.

 가끔씩, 따라온 아이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말이 없다. 우리 모두-손님과 직원들- 용의자이고, 우리의 움직임을 하나한나 관찰당한다. 모두 물건을 집어 들고, 수레를 밀고, 물건을 살피고, 코드를 입력하고, 조절하고, 야채 무게를 달고, 일정을 생각하고, 계산한다.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는 거대한 창고는, 절도(竊盜)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

 길거리 시장의 정반대다. 그곳에서 핵심은 흥정이다. 길거리 시장에서는, 모두가 최선의 거래를 하과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창고형 슈퍼마켓에서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도둑놈으로 여겨진다.

 자유공간은 거의 없고-물건 더미가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계산대 앞에 늘어선 수레의 줄도 빽뺵하다. 내 앞에 수레를 쥐고 있는 사람은 임신부이다. 키가 크고 밝은 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폴란드 출신으로 보이고, 곧 태어날 배 속의 아이는 첫째가 아닐 것 같다. 수레에 담은 물건들을 계산대에 내려놓을 때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다.

 우리가 있는 이 창고형 할인 슈퍼마켓을 사로잡고 있는-다른 생각은 거의 모두 배제해 버리는-, 이 절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쇼핑하는 손님들의 도둑질. 종종 회사에서는 '수상한 손님'을 상점에 들여보낸다. 이들의 임무는 몇몇 물건을 몰래 가지고 나오는 일, 즉 계산원들이 얼마나 잘 감시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직원들의 도둑질. 직원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사야 할 때면 계산서에 관리자의 서명을 받아야 하고, 아무 때나 몸수색을 당할 수 있다. 회사에 의한 체계적인 도둑질은 직원들의 초과근무 시간에 대해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다. 계산원들은 적어도 일 주일에 두 시간 이상 임금을 받지 않고 일을 해야 한다. 가끔 더 해야 할 때도 있다. 많은 직원들이-관리자급부터 그 아래로- 근무시간이 아닌 때도, 필요한 경우에는 밤낮으로 긴급 상황에 불려 나와야 한다. 병가는 허용되지 않는다. 법적으로 보장된 교대 시간 사이의 휴식도 없고, 역시 보장된 주중 휴무도 없다. 직원들의 권리에 대한 도둑질. 마지막으로 농산물 업계, 전 지구적인 식품 유통업계와 연결된 그 회사의 도둑질. 한때는 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쥐고 있던 주도권, 어떤 작물을 재배할지, 변종과 종자, 비료, 기를 가축들 등에 대한 결정권을 뺏어 간 것. 한때 이런 것은 지역 내에서 현실에 맞춰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오늘날은 거대 기업이 생산자를 공급하고, 생산될 게 무엇인지 지시한다. 전 지구적인 농업이 미리 계획되고 있는데, 목적은 자연 전체를 상품으로 바꾸는 것이다.

 폴란드 출신일 거라고 짐작한 임신부가 줄 맨 앞에 있다. 계산원들에게 주어진 분당 목표 계산량은 서른다섯 개다! 아무도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모두들 근무 평가에서 감점을 당한다. 계산할 준비를 마친 임신부가 신용카드를 긁는다.

 고개를 든 임신부가 내 뒤에 줄을 선 누군가를 알아본 모양이다. 어쩌면 둘이 같이 온 것일 수도 있고, 같은 시각에 이곳에서 장을 보기로 약속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상하게 조심스러워진 나는 고개를 돌려 그 누군가를 확인하지 않는다. 짐작에 남자는 아닐 것 같다. 아마 여자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폴란드 여성이 고개를 들고 머리를 흔들며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여자는 계속 미소짓는다.

 그녀의 미소는 순수한 행복의 표현으로, 빛을 내면서 동시에 빨아들인다. 갑작스런 행복이 모두 그렇듯, 그 미소도 예측할 수 없다.

 그녀의 미소는, 한순간 다시 현실이 되어 버린, 잊어버린 약속들을 담고 있다.

 내가 그녀의 미소가 담고 있는 약속에 대해, 혹은 도둑질로 가득한 창고에 대해 과장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둘 다 존재한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존재하고 있다.

 

-> 와, 존 버거

AND

점유율 100%


다정한 손짓
발끝으로부터의 떨림
차오르고 또 차오르는 충만함
세상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일

이제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모든 만남은 헤어져야 하니까
그건 너로 족하니까
너는 나에게만 독점적이니까

AND

여름산

여름산은 겁이 난다
초록에 질식할 것 같다
볕을 피해 무심코 들어갔다간
나무가 내뿜는 수증기에 둘러쌓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다가
해 저무는 바람 소리에
나무가 잠을 청하려고 깊은 숨을 들이쉬면
그 찰나에만 부리나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누군가 삶에서 달아나듯이
AND

물의 꿈

모든 강물을 막고
몰려온 비구름을 몰아내고
온통 태양 태양 태양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얕은 곳으로
대륙붕이 먼저 드러나고
한 번도 빛이 닿지 않았던 곳까지
바다가 마른다
새우떼가 먼지가 되고
물고기들이 마른 아가미를 놀린다
신화 속의 괴물마저 포효 끝에 마지막 숨을 멈추면
생명이 사라진 땅 위에
건드리면 부서지는 새 삶이 태어난다
매일 무너져 내리는 삶이
메마른 바다의 끝에서
물의 꿈을 꾼다
AND

저기 어디

저어기 어어디
서울 사람들 생소한
지역민들도 잘 모르는
강원도 백복령 자락 어딘가
강릉 옥계면, 정선 임계면, 동해 신흥동 중간에
이 만 평쯤 내 밭이 있어서
아내랑 같이 감자 심고
밭째 사러온 양반한테 밭떼기로 팔아 버리고
겨울엔 배 두르리며 동네 사람들이랑 어울려
술추렴이나 하며 살았으면
저어기 어디서
삶이 삶인 삶을 살었으면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