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어둠 소리
바다는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생명
너와 함께 했던 바다
갈매기가 소리지르던 바다
언젠가의 바다
그밤의 바다
기억속의 바다
지금은 네가 없는 바다
파도 위로 부서지는 빗소리
나는 물 속에서 비를 맞는 물고기
바다는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생명
AND

울다

인간의 한 평생 보다 오래된 버드나무 아래
봄이 올라오는 자리에서
당신은 울고 있다
어쩌면, 의 여지도 없이 울고 있다
버드나무 이파리 향하는 방향따라 울고 있다
벌들이 올해의 첫 번째 꽃으로 달려드는 시간에
억지로 짜내지 않아도 모든 풍경이 글이 되는 때에
봄비 그치고 오만데서 봄이 쏟아지는 순간에
당신은 봄을 맞으며 울고
나는 우는 봄을 바라보고 있다
AND

평범 

내가 말했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도 평범할 뿐이다
나는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는데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묻어둔 사랑은 점점 단단해지고
사진속의 당신은 내 마음속의 당신과 다른 사람

그래도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흔 살
지난밤 꿈 속의 나는 모든 불의를 그냥 넘기는 사람
십 년 후의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쉬흔 살
나는 언제나 어제와 같은 꿈 속에 있는 비겁자
여전히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당신의 연인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평범한 사람
AND

도서관


눈을 감고 고개를 들면
다가오지 않은 것을 포함한 모든 과거가
빛바랜 종이를 타넘고 내 안으로 파고든다
죽은 왕의 비탄과 살아남은 왕비의 슬픔
잊혀진 마술의 희생자와 그 마술사의 조수
지옥을 떠도는 방랑자와 그를 뒤쫓는 켈베로스
존재했던 모든 사랑과 아직 여기에 머무는 이별까지
가장 먼 곳에서의 시작과 소멸이 나에게 전해진다
다 지겨워져 눈을 뜨면
과거가 되버린 미래가 허공을 떠돈다

내 마음처럼
AND

사랑

당신이 방금 몸을 씻고 나온 욕실에 들어가서
당신이 씻은 온도와 똑같은 온도로 내 몸을 씻고
그새 잠든 당신 이마에 조용히 입술을 갖다대면
그 순간만 영원한 지금으로 존재하는 일

불온

당신이 방금 몸을 씻고 나온 욕실에 몰래 들어가서
당신이 씻은 온도와 똑같은 온도로 내 몸을 씻고
그새 잠든 당신 입술에 조용히 입술을 갖다대면
그 순간만 영원한 지금으로 존재하는 상상
AND



'상처투성이의 배' 란 제목이 붙은 사진 한 장
가라앉고 올라오는 장면이 생중계 된 배
칠흑같은 물 속에서의 삼 년만 가라앉은 운명
씨팔, 불사의 지옥으로도 모자란 죄를 지은 새끼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지금 숨을 쉬니
내가 그저 사니까 너희들도 사니
사람들이 울부짖어도 너희들은 그냥 사니
살고 살아 지옥이 되려고 사니
내가 차마 살지 못해도 니들은 사니
파렴치인 줄도 모르고 세월이란 이름의 끝을 사니
씨팔, 상처투성이의 배
AND

오늘, 밤

이 글을 마치기 전까지
오늘은 끝나지 않는다
세상은 오늘의 연속
어제의 오늘과 내일의 오늘
나의 오늘과 당신들의 오늘
밤의 정적안에 냉장고 소리
냉장고의 오늘
모두가 잠든 시간에 냉장고가 깨어있다
나랑 냉장고만 잠들지 못하는
오늘, 밤
내가 잠들기 전까지
오늘은 끝나지 않는다
AND

18. 회식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빈 잔이나 채워주지
더럽게 왜 술잔을 돌리고 지랄이야
AND

오줌

새벽,
급하게 바지를 내리고
지친 몸을 변기에 얹고
오줌을 눈다
쏴아, 시원한 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수도꼭지에 비유하는 일이 거짓이 아니구나
오줌을 누는 동안 세상이 끝나는 일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지금이라면 좋겠다
똑똑, 오줌이 멈추고
나도 세상도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과음의 흔적만 세상에 남겼다
AND

포장지

 

모든 상품에는 포장지가 있다
생명조차도 상품인 시대에
맨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당신
나는 당신의 껍데기가 되고 싶다

AND

금연

담배를 끊은지 이십년인데
너와 마지막 담배를 피웠던
그날 새벽만
우리 사랑의 마지막 순간만
자꾸 기억 난다
껄렁한 고등학생의
파고다 공원 할아버지의
삶에서 만나는 모든 담배 냄새가
새 애인이 피우는 담배 냄새조차
세상의 모든 담배 냄새가
너와 연결이다
네가 마지막이었다
AND

편지


너에게 편지를 쓴다
과거까지 전해질 수 있게
옛날식으로 또박또박 적어나간다
잘 있니?
한참을 울어버렸다
그리고 또,
잘 있니?
잘 있니?
대답할 수 없는 너에게
부칠길 없는 편지를 쓴다

AND

사탕

투, 사탕을 뱉는다
툭, 깨져서 흩어진다
이것도 생이라면
아직 달콤할 때 부서졌으니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까
자음 하나 차이로
사랑은 달콤하게만 끝나지 않고
끝나지 않는 밧줄을 올라도
운명은 한 길로만 향한다
입안에 씁쓸한 단내만 남았다

AND

봄, 사랑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에
봄이 온 것을 알았습니다
봄, 이라 적고
봄, 이라 불러봅니다
네 번째의 봄을 적으려는데
봄이 내 머리 위에 앉았고
봄이 내리는 사이에
당신이 내 앞에 서 있고
당신을 안으려는데
우리 발치에 꽃잎 흩날립니다
이렇게 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AND

낮잠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다
춥다
잠들면 식고 식으면 죽는다
불멸은 영원한 불면
식은밥, 식은 정신, 식은 사랑
식으면 죽는다
사랑은 한쪽만 식어도 끝난다
그러니 아가,
어서 그 차가운 물에서 나오렴

AND

만두

돼지고기를 잘게 다지고
부추, 숙주, 쪽파, 김치도 다진다
다져진 것들에 달걀을 섞어서 굳게 다진다
다져진 만두속을 만두피로 감싸면
만두 빚기 완료
쪄서 먹고 구워서 먹고
뱃속으로 들어가면 녹아내리고
다시 단단하게 다져져서 똥으로 나온다
산다는 건 먹고 싸는 것
만두가 똥이 되도록
다지고 다지고 또 다지는 일
똥이 거름이 되어
다시 만두가 되는 일
AND

사랑

누구나 작은 관심에 일렁이고
그렇게 사랑이 시작된다
누구나 토씨 하나에도 흔들리고
그렇게 사랑이 끝난다
AND

봄비

동풍에 실려온 온기 거리에 가득하고
모퉁이를 돈 매화향이 골목 끝집 대문을 넘는다
지붕 아래 아기고양이는 애미를 따라 살퐁살퐁 걷고
움트는 가지마다 새들 지저귀는데
이 빗 속에 네가 울면
우산도 없는 나는 어떡해
이 봄을 나는 어떡해
AND

밀폐

물이 차오르는 방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물이 방을 가득 채우도록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칫솔질을 멈추고 양칫물을 뱉었다
방안에 불순물이 떠니니고
그 물로 입을 헹궜다
입안이 시원해지고
방안의 물이 빠져나갔다
나는 온 몸이 시원해졌다
AND

흐린

흐린날
안경을 벗고
흐린 전깃줄
멀리 흐린 하늘
흐릿하게 눈발 흩날리고
눈이 녹는지 내 눈이 녹는지
세상 모든 건 다 녹아 흐릿해지는지
선명한 기억속에 흐릿하게 흘러내리는 건
그리움인지 그리움인지 또 그리움인지
AND

20리터

트럭 뒷바퀴 뒤에
몸을 쭉 뻗고 누운 고양이
굳은 몸을 접어서 비닐 봉지에 담는다
한 겹으론 찜찜해서 비닐 봉지 한 장을 더 쓰고
20리터 쓰레기 봉투에 담는다
평생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며 살았으나
그 삶이 쓰레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평온한 모습이니 생이 다하여 죽었겠으나
겨울 다 보내고 입춘도 지나
생명을 피우는 봄비 내리는 우숫날에
560원 짜리 쓰레기 봉투에 담긴 한 시절
나의 봄이 너의 죽음이다
AND

어느 일요일 오후의 생각


TV뉴스가 김정남의 죽음을 두 시간 째 떠들고 있다
조선땅에 사는 수 천의 김정남 중에 한 명이 살해당한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아, 뉴스에 나오는 김정남은 북한 사람 김정남이지
남한 사람들은 북쪽의 일에 관심이 많지
또 그는 김일성의 손주이고 김정일의 아들이지
남한에는 이병철의 손주가 구속된 건 아쉬워 하면서도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것에는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많지
핏줄이란 게 무섭지
화면속 고인의 모습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았다
남북은 하나고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니까 고인은 나랑도 닮았겠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얼굴에 눈 코 입이 달린 것이 닮았고
콧구멍이 두 개인 것도 닮았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일요일 오후에
강원도 정선군 오일장 한 귀퉁이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누가 보는 줄도 모르고 오줌을 누는 중년 남자가 집에 잘 들어가는 일보다
먼 이국땅에서 김정남이 독살당한 일과 그 범인을 잡은 일이 중요한 일일까
둘 다 나랑 닮은 사람이고 우리는 한민족인데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아직 살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죽은자가 산자보다 더 중요한 것일까
북한사람 김정남은 죽어서도 관심을 받는 일이 행복할까
본인 토사물 위에 쓰러질 뻔 한 남자는 집에 잘 들어갔을까
나는 오늘 죽지도 않고 비틀거리지도 않고 집에 잘 들어갈 수 있을까

AND

돌다

내가 네 주위를 365바퀴 도는 동안
너는 그사람 주위를 한 바퀴 돈다
그렇게 한 해가 가도
나는 네 주위를 돌고
너는 그사람 주위를 돈다
내가 네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동안
그녀는 내 주위를 365바퀴 돈다
그렇게도 한 해가 가고
나는 네 주위를 돌고
그녀는 내 주위를 돈다
각자의 시간을 돌고 돌아
몇 번이나 해가 바뀌어도
우리는 닿지 못하고
누군가의 주위를 돌기만 한다
AND

벌레

모든 땀구멍에서
유충들이 기어나왔다
들어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점점 더 커지는 그것들을 느꼈다
내가 키운 벌레들이 나를 집어 삼키는 동안
나는 너와 함께 별의 죽음을 기다리던 그날밤처럼
아무 반성도 후회도 없이 그냥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AND

새와 나

 

하늘빛이 기묘했는데
나는 어느 나무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작은새 한 마리가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새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새는 날지도 않고 눈만 꿈뻑거렸다
달아나지 않는 새 때문에 당황한 손을 거두고 새와 눈이 마주쳤다
가지 위의 눈이 새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이렇게 얼어붙은 순간에
내가 어쩔 수 없는 시간에
어느새 분홍색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도 새도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하늘빛은 계속 기묘하고
나도 새도 그 아래 가만히만 있었다
AND

균열

모든 것은 작은 금 하나에서 시작됐다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가지가 뻗고 꽃이 피고 다시 씨앗이 되었다
모든 것은 작은 상처 하나에서 시작됐다
갈라진 손 끝이 뺨을 스치고 혀가 메마른 입술을 파고들고 사랑이 되고 말이 가슴을 찌르고 이별하고 마음이 찢어졌다
모든 것은, 균열조차도 작은 균열에서 시작됐다
AND



냉혈한 소리를 들어도
사람 피는 36.5도
예수님도 부처님도
피 온도는 36.5도
미친 사랑의 온도도
고작 37.2도
돼지피를 굳혀서 끓이면 선지해장국
사람피를 굳혀서 끓여도 선지해장국
동물 피를 먹는 인간과
인간 피를 먹는 뱀파이어
한 번 몸 밖에 나와 굳은 피는
끓여도 다시 녹아 흐르지 않는다
피가 끓는 사람도 피 온도는 36.5도
라면물처럼 끓어보지도 못하는 인생
AND



싸늘한 내 마음처럼
싸박싸박 눈 내린다
비어버린 가슴처럼
눈 앞에 모든 것이 하얗다
누군가 지나간 자리마다
발자국 발자국 발자국
흰 발자국 가득한 세상에
네 발자국만 없다
AND

불온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는 애인이 없고
그녀 앞에 웃고 있는 나는 아내가 있네
성당에 다니는 그녀 앞에서
소주 한 잔 마다 성호를 그으며
주여 제 마음을 용서하소서
잠시후 술자리에 아내가 합류하고
소주 한 잔 마다 성호를 그으며
주여 제 마음을 용서하소서
너무 예뻐서 미운 아내의 친구를 용서하소서
AND

불륜

남들 다 출근하는 새벽 댓바람부터
모텔 앞 길가 아우디 A6 안에서
뭐가 그리 애틋한지
남녀가 서로의 얼굴을 안쓰럽게 쓰다듬는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