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밥을 먹다

새벽 다섯 시
일어나서 돈가스를 튀긴다
허기허기허기
냉장고에는
케첩과 마요네즈가 있고
복숭아랑 냉동만두도 있다
안심안심안심
돈가스를 먹고
복숭아도 하나 먹는다
허기허기허기
만두까지는 과하다고, 생각하다가
하나 남은 바나나를 발견한다
안심안심안심
487번 스티커가 붙은 바나나를 먹고는
좀 있다가 뭘 먹을까, 고민한다
젠장젠장젠장
세상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자활센터에서 만든 돈가스와
가난한 농부의 복숭아와
바다까지 건너온 바나나의 노력을
삽시간에 먹어치운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자꾸 남의 노력을 탐한다
허기허기허기허
허기여차디여차


AND

이놈의 세상

 



이놈의 세상엔 돈이 썩어난다는데
썩어나는 것을 가지지 못한 나는
평생 썩지 않는 사람

 
또 언제나 옳은 것들이 널려있다는데
널려있는 것 중에 내 것은 없고
나는 언제나 옳지 않은 사람

 
이놈의 세상은 멈출 줄을 모르고
작은 돌멩이 하나도 그대로 두질 않는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멈출 줄 모르고 산다

이 놈의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과
거들떠 보는 사람 없는 차림새로
귀 기울여 주는 이 없는 말을 내뱉고
어색한 몸짓으로 또 하루를 보낸다

오늘도 이놈의 세상
내일도 이놈의 세상
에라, 이놈의 세상아
아서라, 세상아

AND

거울

추레한 중년의 남자가 알몸으로 서있다
어제 과음을 해서 그런지 나이들어 보인다
생각해 보니 나이 먹어서 나이들어 보인다
내 머리속에는 10년 전의 내가 있고
거울 앞에는 지금의 내가
거울 속에는 내가 아닌 것 같은 내가 있다
10년 후엔 더 나이들어 보이겠지
거울을 볼 때마다 오늘과 같은 생각을 하겠지
거울 속에는 보고 싶지 않은 내가
애써 외면하는 내가 있겠지
AND

손톱깎이


죽을때까지 자라는 손톱
고장날 일이 거의 없어서
잃어버리지 않으면
죽을때까지 쓰게 되는 손톱깎이
죽을때까지 나이 먹다가
죽을때까지 사는 인간
인간이 사라져도 손톱깎이는 남는다
인간이 발명했지만
인간보다 위대한 손톱깎이
AND

수박

수박은 큰 과일
수박은 초록색 호랑이
호랑이는 수박을 먹지 않지만
호랑이 같은 사람이라야
혼자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수박은 큰 과일
외로운 사람들끼리 모여
씨 툭툭 뱉어가며
웃으며 먹어야 더 맛있는 과일
수박은 외롭지 않은 과일
AND

생선을 굽다가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그 위에 생선을 올린다
고등어 조기 갈치 임연수 꽁치
후라이팬 뚜껑을 덮고
가스렌지를 약불로 맞추고
마당에 나와 애도의 담배를 피우며
생선들의 원산지를 생각한다
세네갈, 아랍에미리트, 미국, 노르웨이, 러시아, 일본 앞바다를 떠올린다
잡히자마자 눈도 감지 못하고 냉동되거나
소금에 절여진 채 고통스럽고 느린 죽음을 맞았을 생선들의 운명
반만 익은 채 곧 내 손에 뒤집힐 생선들의 처지
생선 잘 구웠다고 아내에게 칭찬 받는 내 모습
이런것들을 떠올리는데 탄내가 난다
반쪽만 새까만 채 그대로 버려질 그네들의 삶과
나 또한 잡히고 잡아 먹히고 버려지는
어쩌면 억울할지도 모를 죽음과 가까이 있음을
생선을 굽다가 생각한다
AND

부의금을 내다


상주는 울고만 있다
저질 농담이나 한다고
실 없는 사람 소리를 듣던
사고 이후로 힘이 안 들어간다며
오른손 중지를 덜렁덜렁 흔들며 웃던
상주는 울고만 있다
서로 얼굴과 이름을 알고
형님 동생 부르고 지내며
크게 다툰일 없으니
맞절을 하고
어깨를 두드려 주고
돌아나와 술잔을 받는다
그의 인생도 잘 모르는데
그 어머니의 인생은 어떻게 알까
내게는 닿지 않는 슬픔으로
상주는 울고만 있다
89년 간의 생에 대한 경배라기엔
너무도 어색한 부의금을 내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 앉아
육개장을 먹는 동안
상주는 계속 울고만 있다
AND

가난의 비애


부자들은 그 수가 적어도
테레비에서 인터넷 뉴스에서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흔하게 느껴진다
가난은 도처에 흔해서
더 희귀한 것이 된 운명에 처했다
외면하고 외면하고 외면하는 것이 됐다
원빈 아버지가 사는 대저택 바로 옆에 붙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의 삶을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그 가난임을 모른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외면하고 있음을 모른다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세상은 세상을 모른다
AND

장마

빗물이 흐르네
지붕을 타고
빌딩 외벽을 타고
손에 쥔 우산을 타고
내 어깨를 타고
주르륵 주르륵
빗물이 흐르네

빗물이 적시네
빨랫줄에 옷가지를
나란히 선 소녀들의 운동화를
그 앞의 횡단 보도를
신호등 아래 홀로 선 내 몸을
자박자박 자박자박
빗물이 적시네

빗물이 고이네
나뭇잎 위에
밭고랑에
버려진 깡통에
모든 빈 자리에
빗물이 고이네
텅빈 내 마음에도
자꾸만 자꾸만
빗물이 고이네

 

song ver

1 3b 7b 6b 4 5 1
빗물이 흐르네
지붕을 타고
빌딩 외벽을 타고
손에 쥔 우산을 타고
내 어깨를 타고
주르륵 주르륵
빗물이 흐르네

빗물이 적시네
빨랫줄에 옷가지를
소년의  운동화를
그 앞의 횡단 보도를
홀로 선 내 몸을
자박자박 자박자박
빗물이 적시네

빗물이 고이네
나뭇잎 위에
깨진 벽돌 위에
버려진 깡통에
모든 빈 자리에
자꾸만 자꾸만
빗물이 고이네

빗물이 고이네 3b 7b
텅빈 내 마음에도
빗물이 고이네
흐르는 눈물속에도
빗물이 고이네 4 3b
너의 발자국 위로
빗물이 고이네
지나간 사랑 위로

자꾸만 자꾸만 5 1
빗물이 고이네
 


AND

흔적

태평양 한가운데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배 한 척, 작은섬 하나 보이지 않는 곳
하늘과 바다만 남은 곳에
비가 내린다
바다에 닿자마자
자기 자신을 지우는 비
목격자가 없는 바다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나 또한 당신이 없는 이 생에
아무 흔적도 남길 수 없다
AND

행복


해가 막 눈을 뜨기 시작하는
새벽 다섯 시 반
출근하려고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여는데
내 이름을 부르며
잘 다녀오라고
운전 조심하라고
눈도 뜨지 못하고 말해주는
아내 얼굴을 보고 집을 나서는 일

AND

머리카락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자취방에 혼자 앉아서
손으로 바닥에 머리카락을 쓸어 모은다
잘 모아서 재털이에 곱게 올려 놓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를 두 모금 빨고
그 끝을 모아둔 머리카락에 갖다댄다
지지직 지지직
단백질이 타는 구수하고 익숙한 냄새가 난다
담배를 돌려가며 끝까지 태운다
대머리 아저씨들의 머리카락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전세계 70억 명의 머리에서 빠지는 머리카락은 다 어디로 갔을까
머리만 한 번 빗어도 빠지고
내가 원하지 않아도 자꾸 빠지는
머리카락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작은 방에 나만 남겨두고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당신은 어디로 갔을까
AND



누가 더 외로운 섬인지 경쟁하지 마라
우리 함께여도 우리란 외로운 섬이다
인간이란 그저 외로운 섬일 뿐이다
AND

하마 이야기


나는 이름 없는 하마
입이 무거운 하마
졸리지도 않는데
입이 자꾸 땅에 닿는다
꾸벅꾸벅 쿵! 쿵!
친구들은 앞으로 쿵쿵 걸어가고
나는 뒤에서 꾸벅꾸벅 쿵! 쿵!
누구도 나와 놀아주지 않으니
말할 상대가 없고
그래서 더 무거워지는 입
꾸벅꾸벅 쿵! 쿵!
땅에 입을 박은 채
지나가던 개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아 줄래
루돌프 사슴은 현실에 없고
나는 그저 입이 무거운 하마
살아가는 일이 조금 불편한 하마
AND

모래성을 짓다

바닷가에서
소년이 모래성을 짓는다
위태로이 서있다가
파도에 무너진다
소년이 다시 모래성을 짓는다
단단한 모양새지만
이내 파도에 무너진다
소년이 운다
빛나는 눈물도 파도를 멈추지 못한다
소년은 다시 모래성을 짓는다

그 바닷가에서
노인이 모래성을 짓는다
구경꾼들의 탄성 뒤로
모래성이 파도에 무너진다
노인이 다시 모래성을 짓는다
구경꾼들의 탄식이 파도에 닿고
모래성이 파도에 무너진다
무엇도 원망하지 않는 얼굴로
노인이 된 소년은 다시 모래성을 짓는다
AND

작은방


냉장고가 갇혔다
생수병이 갇혔다

테레비가 갇혔다
뉴스 앵커가 갇혔다

컵라면과 소주병이
담배연기와 기타 소리가 갇혔다

시계가 멈췄다

마음속에 너를 가두고
모두 다 갇혔다

창살을 넘지 못하는 우울과
울고 있는 내 마음이 갇혔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