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리목


마을 입구 길나들이 양쪽 끝에
나무 두 그루 나란히 살았네
사람들은 그 나무 아래 모여서 소원을 빌었네
어느해 봄, 거센 바람이 지나간 다음날
한 나무가 죽었네
사람들은 흉조라며 혀를 찼네
죽은 나무는 산 나무에게 몸을 기댔고
산 나무는 죽은 나무를 품고 울었네
깊은 곳으로부터의 진한 울림으로 가지가 흔들리고 잎이 떨었네
사람들은 나무가 나무 때문에 우는 것 또한 흉조라 했네
한 겨울, 진이 다 빠지고 앙상해 지고서야 산 나무는 눈물을 거두었네
이듬해 봄, 죽었던 나무에서 새 잎이 돋았네
기대었던 두 몸이 하나가 되었네
그제서야 사람들은 길조라 했네
사람들은 나무 아래 모여 신에게 바치는 춤을 추었네
이제 두 나무는 세상의 끝을 함께 기다리네
두려울 것도 더 바라는 것도 없네
사람들은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네

AND

얼굴


화물차 운전수처럼 생긴 화물차 운전수를 봤다
휴게소에서 25톤짜리 벤츠 트럭에 올라타는 모습이 세상과 어우러졌다
처음부터 다른 일은 할 수 없었던 사람 같았다

농사 지었을 때는 농부 같지 않은 얼굴
노가다 일 할 때는 일용직 같지 않은 얼굴
사무실에서 글을 쓸 때는 글쟁이 같지 않은 얼굴
공무원이 됐어도 공무원 같지 않은 얼굴
강원도에 살지만 강원도 사람이 아닌 거 같은 얼굴

뭘 해도 항상 어색한 내 얼굴
눈도 코도 입도 반짝이지 않는
바보 같은 내 얼굴

날 닮은 내 얼굴
AND

세상에서 제일 좋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비누 휴지 연필 종이컵
쓰면 사라지는 것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오디오 테레비 자동차 집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

세상에서 제일 좋은
너 너 너
나와 살을 맞대고 사는 사람
 
너 때문에
나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
AND

지는 사람


풀에게
나무에게
바람과 햇살에게
별들과 밤하늘에게 지고

정류장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아기 고양이에게
횡단보도 위에 떨어진 10원 짜리 동전에게
깜빡깜빡 신호등과 집 앞 가로등에게
우편함에 든 빛바랜 전기요금 고지서에게 진다

너를 이기고 난 후로
도무지 이기는 법을 모르겠다
누구도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나는 매일 지는 사람
너는 곁에 없는 사람
AND

삶은 계속 이어지고


새벽 다섯시에 눈을 뜨고
여섯시에 민방위 훈련에 참석하고
일곱시에 출근길에 오르고
이내 자동차가 퍼지고
긴급출동을 불러서 차를 견인하고
직장에선 연차를 쓰기로 하고
집에 와서 김치 볶음밥을 만들고
2인분은 족히 먹고도
배가 고프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아내 심부름으로 은행에 다녀오고
일이 잘못되서 다시 다녀오고
차 수리에 3일 걸린다는 전화를 받고
낮잠을 잘래도 마음이 편하질 않고
불편한 담배를 피우고
점심을 거른 것이 떠오르고
내일 출근할 것을 생각하고
불편한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고
배가 고프다

밥을 안치고
된장찌개를 준비하고
아내의 퇴근을 기다리고
계속 배가 고프고
불편한 낮잠을 자고 일어나도
저녁으로 가는 시간이 더디고
집에 오는 사람을 마중나가고
함께 밥을 먹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들고
동네 골목길을 한 바퀴 돌고
밤은 한복판으로 향하고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무섭고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 먹고도
배가 고프다

삶은 계속 이어지고
배가 고프다
AND

생각하지 말자


2016년 토마토 케첩 500g 1500원
토마토보다 싼 가공식품의 신세한탄

1966년 짜장면 60그릇 1500원
2016년 짜장면 한 그릇 4500원

180배 오른 짜장면 가격과
18소리가 절로 나오는 삶

2066년에도 토마토 케첩과 짜장면이 있을까
값어치란 말이 값어치를 할까

100년을 살 것도 아니니
50년 후 1500원은 생각하지 말자

하늘과 정반대의 일기예보가 대수롭지 않은 세상이니
퍼져버린 자동차와 식어버린 사랑 같은 건 생각하지 말자

케첩에 버무린 싸구려 파스타를 먹는 가난한 젊음과
한 그릇 2000원 짜리 짜장면을 만드는 중국집 주인의 어긋난 시대정신도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AND

넘나


나무가 산을
산이 강을
강이 바다를
바다가 구름을
구름이 하늘을
만물이 만물을

내 몸이 네 몸을
네 몸이 내 마음을
내 마음이 네 마음을
네 마음이 슬픔을
슬픔이 우리를
우리가 세상을

넘나든다

너무한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일
넘나드는 일

 

song ver

넘나

넘나든다 1
나무가 산을 1 4
저산이 강물을 4 5 
넘나든다 1
강물이 바다를 1 4
바다가 구름을 4 5 
구름이 하늘을 5 6
하늘이 만물을 6 4
5
넘나든다 1

넘나든다 1
내 몸이 네 몸을 1 4 
네 몸이 내 마음을 4 5
내 마음이 네 마음을 5 6
네 마음이 슬픔을 6 4
5
넘나든다 1 
슬픔이 우리를 1 4 
우리가 나눈 사랑이 4 5
그 사랑이 세상을 5 6
4 5

넘나든다 1

너무한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일 1 6 4 5 

넘나드는 일 1 

AND

동지 팥죽을 먹다


퇴근길
시장에서
팥죽을 산다

온종일
사람들 먼지를
뒤집어 쓴 팥죽

차갑게 식은 하루
붉고 차가운 위선
살아남은 자의 후회
괜찮은 편이라는 거짓말

팥죽을 먹는다
숟가락이 무겁다
기나긴 오늘 밤이 무겁다
생이라는 것이 이토록 무겁다     


AND

이분법


해와 달
낮과 밤
하늘과 땅
삶과 죽음
남자와 여자
생물과 무생물
척추 동물과 무척추 동물

너를 만나기 전과 후
오직 그렇게만 나뉘는 내 삶
AND

망연자실


바닷가에 살아도
바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믐날 밤바다에서
맨발로 갈매기 발자국을 뭉갠다
후회를 모르는 파도는
내 발끝에 당신 이름을 때리고
나는 귀를 닫고 망연자실

바다는 밤이면 더 사나워지는 생물
나는 그 앞에 망연자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