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얘기


새가 되서 날고 싶다
나만 오를 수 있는 높이에서
당신만 나를 볼 수 있는 자리에서
까마득한 세상을 내려다 보고 싶다

흰긴수염 고래가 되고 싶다
바다 가장 깊은 자리에서
세상 반대편까지 닿는 낮고 낮은 울음으로
인간들 몰래 당신을 부르고 싶다

시절이니 세상이니 하는 것 없이
그저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직 당신에게만 그리고 당신만을

그렇게 뻔한 사랑을 하고 싶다
AND

굿모닝


눈뜨자마자 마당에 나와서
굿모닝 담배를 피우는데
감나무에서 아기 고양이가
옆집 담 위로
툭,
아이고 놀라라
또 한 마리가
툭,
아이고 아이고
놀라라 놀라라
호기심으로
경계심으로
나랑 눈을 맞추다가
팔을 뻗어볼까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담 너머로 사라진다
굿모닝
그리고
굿바이
AND

부처님은 거인족


사리가 여덟 섬 네말이라니
부처님은 거인족이었을까
손오공이 손바닥 안에 있었다니
부처님은 거인족이 맞나봐
거인족 부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쿵!쾅!쿵!쾅! 세상을 짓밟고 다녔을까
먹기도 많이 먹었을거야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일도 좋았을거야
다만 세상에 하나 뿐인 존재라 많이 외로웠을거야
그래서 그 많은 사리를 세계 방방곡곡에 뿌렸나봐

백년도 못 살고 죽었다는 걸 보면
결국 부처님도 자기 손바닥 안에 있는
나약한 인간이었나봐
AND

 갑자기 가을이다.

 카이로스프트(에서 만든) 게임에서 날짜가 9월 1일로 바뀌면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것처럼 하루만에 쉽게 가을이 왔다. 에어컨, 선풍기와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당장 긴팔 옷을 입게 됐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겨우 울어보게 됐는데 며칠 울어보지도 못하고 울음을 그쳐야 할 매미를 생각한다. 눈물 뚝.

 나보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농사 짓고 노가다 할 때는 이런 생각 자주 하진 않았는데, 나름대로 안정된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고서는 이 생각이 불쑥불쑥 머릿속을 때린다. 편의점 알바, 밥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내가 마트에서 생선의 원산지 읽고 있을 때 매대를 지키는 점원,  음식물 쓰레기 봉지 내놓을 때는 그걸 치우는 사람이 나보다 더 힘들게 일하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일의 강도 뿐 아니라 삶도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많겠지.
 이 생각은 내가 더 힘들게 일해야하는데, 로 이어진다. '이왕이면 힘든 것은 내가' 의 마음인데 다들 힘든 무게를 조금씩 나누어서 비슷하게 덜 힘들게 일하면 좋겠다, 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이게 내 한계인가. 싫다.

 한계라는 단어를 써서 말인데, 종기 수술한 자리가 많이 아프다. 잘 아물지 않는다. 사무실에선 오른쪽 엉덩이만 의자에 대고 앉아 있고 운전할 때는 왼쪽 허벅지 아래에 높은 물건을 대고 앉는다. 그래서 그런지 허리가 아프다. 다 내 탓이지만 우울하고 화가난다. 주중에 사무실 앞 병원에서 드레싱만 받다가 오늘은 제천에 수술한 병원에 다녀왔다. 드레싱을 해주던 간호사가 - 이 사람도 나보다 힘들게 일하는 거 같다. - 종기 수술하는 사람도 많고 나보다 심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나보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 나보다 상태가 안 좋은 사람도 있다고 한 말에 위로 받았다. 이게 명백한 내 한계다.

 나무는 100년을 살아도 천연기념물이 되기 힘든데 인간은 100년만 살아도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이게 천연기념물이란 걸 만든 인간의 한계다.

 계절이 바뀌었으니 나도 조금 변하고 싶다.  종기 때문에 술을 안 마신건 긍정적이다. 치료 끝나면 다시 마시겠지. 기타랑 핸드폰만 붙잡고 있지말고 책도 읽고 산책도 해야겠다.

 이 글을 핸드폰 붙잡고 쓰고 있다. 양희은의 '한계령' 듣고 자야겠다.
AND

장 마 루 집


강원도 강릉시 서부시장
오줌 냄새나는 골목 구석
미닫이 문 창에 붙은 다 떨어져가는 붉은 글씨
장 마 루 집
들어가는 사람만 있고 나오는 사람은 없다는
오후 두 시에 문을 열고 열 시 전에 불을 끈다는
이승만 때가 좋았다는 할아버지들이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한다는
어떤 손님이라도 주인 할머니에게 양말 속 푼돈까지 다 털려야 집에 갈 수 있다는
무성한 소문에 부풀려진 호기심이 터지기 직전인
장 마 루 집
주머니에 오래된 만원 짜리 두 장 구겨넣고
옛 친구와 함께 가서 해묵은 이야기 한 잔씩 나누고 싶은
장 마 루 집
AND

언제나 옳다


부안 채석강은
영주 부석사는
왕이 아니라 경복궁은

수명을 다한 볼펜심은
밤을 건너가는 구두 소리는
할매들을 상대하는 만물장수 트럭은

손녀와 바닷가를 걷는 할아버지는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은
연습장에 짝사랑의 얼굴을 그리는 소년은

그녀가 커피를 내리는 모습은
그녀가 개새끼, 라고 할 때는
그런 그녀를 향한 내 발걸음은

언제나 옳다
AND

뼈해장국

야시장에 가서
야바위를 하다가
야한 여자를 만났다
야한 얘기를 하면서
야한 술을 마시고
야한 밤을 함께 보냈다
뼛속까지 야해진 나는
새벽에 혼자 뼈다귀 해장국을 먹었다
AND

 휴가가 끝나간다. 살짝 자랑이지만 40년 가까운 생을 주로 놀면서 살았기 때문에 공식적인 휴가, 휴가라고 할 수 있는 휴가는 생에 처음이었는데, 항문주위농양 절개술을 받고 생긴 구멍 세 개에서 흐르는 진물과 함께 휴가가 끝나간다. 땀이 찔찔 나는데 샤워를 못하니까 많이 불편하다. 앞으로 종기는 초반에 대처하기로 한다.

 종기 짜내고 바로 영화제 구경하는 계획이었다가 생각보다 일이 커져서 퇴원하고도 제천에서 두 밤을 더 잤다. 어제 하루 쉬고 오늘도 병원 때문에 제천에 다녀왔다. 영동고속도로 정비 공사 때문에 제천 왔다갔다 하면서 국도변의 풍경을 실컸봐서 좋았다. 오늘은 대관령 옛길로 차를 몰고 내려오는 여유도 부렸다. 자동차에서 아내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별 얘기가 아닌데도 그 상황 자체로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이런 작은 행복이 나를 살게 한다.

 어제, 오늘은 '잘 되고 싶다' 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잘' 은 거의 돈이고 '남들보다' 가 포함된 욕망이다. 인간 존재의 이유가 남들보다 돈 많이 버는 거라면 이번 세대의 인류는 실패다. 다음 생이 없듯이 다음 세대도 없으니 남은 것은 포기다. '잘'의 형태를 조금만 바꾸면 '즐겁고 싶다', '즐기고 싶다' 가 된다. 비교 대상이 없는 욕망은 없겠지만 경쟁심이 약한 사람들도 행복한 세상에 살고 싶다.

 모든 편법이 싹을 틔우는 부정한 세상에서 욕망들이 부딪친 자리가 어지럽다. 나는 자꾸 사랑안으로만 숨고 그게 부끄러운 일을 계절이 바뀔때마다 반복한다.
AND

환절기

바람이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마지막을 우는 매미는 절박하고
시작을 우는 귀뚜라미는 조급하다
누가 울면 영문도 모르고 따라 울 듯
전염되어 뒤따라 울며 너에게로 가는 길
가을은 아직 이른가
그러나 적막은 죽음
AND

 우리집은 강릉인데, 제천 시내의 작은 외과병원 입원실에서 적는다.

 15일 째 지속되던 종기를 째냈다. 아픈 건 견딜만한데 무통주사 땜에 불편하다. 주사 때문에 덜 아픈거니까 둘이 비긴걸로 하자. 2주 전에 ys누나가 째 준다고 할 때 부끄러워 말고 말 들었으면 지금쯤 청풍호반에서 공연 보고 있겠다. 하긴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수술대에 엎드려서 하반신(?) 마취를 하고 팔을 찌른 주사 한 방에 잠들었다. 인간의 육체는 이렇게나 유약하다.

 나를 보살피느라 지후가 고생이다.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 기쁘다. 나도 지후에게 그래야할텐데. 물론 내 사랑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강릉이 고향도 아니고 그저 지금 사는 집이 있을 뿐인데 입원을 하더라도 홈그라운드에서 했으면 좋았을텐데, 생각한다. 그래서 약간 불편한 마음이 있다.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종기가 사라졌다. 아내가 옆에 있다. 걱정은 없다.
AND

얼마예요


뚜어샤오치엔
이꾸라데스까
타오라이 캅
꽌또에스
하우머치
얼마예요

뭐든 값만 알면 만사형통인 세상
안녕하세요 다음에 배우는 외국말
이거 얼마예요?

나는 얼마예요
당신은 얼마예요
이 가난한 사랑은 얼마예요
이 부질없는 삶은 얼마예요

울렁울렁 멀미같은 말
얼마예요
AND

세상에


세상에 전화가 없으면
전활 받지 않는 너 때문에
마음 졸일 일 없을텐데

세상에 글이 없으면
답장이 없는 너 때문에
전전긍긍할 일 없을텐데
널 생각하는 문장도 없을텐데

세상에 아무것도 없이 너랑 나만 있으면
오직 내 손끝으로만 너의 실물에 닿을텐데
우리는 매일 세상에 없는 것들을 그리워하며
사랑하고 사랑할텐데
AND

울컥

울컥하며
그대로 갚아주고 싶을때가 있다

나이 사십 먹은 나에게
화를 내는 사람에게

혼자 정오의 태양을 머금은
그늘진 숲속의 이름모를 꽃에게

그 잠깐의 아름다움을
시기하는 나에게

태풍이 지나간
있는 그대로의 바다에게

그 바다 건너 멀리 있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당신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하여

내가 당한 그대로
깊아주고 싶을 때가 있다
AND

나는 씨팔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씨팔
그 다음은 이 새끼들이
그 다음은 둘을 합친 말
이 새끼들이 사라져도
또 다른 이 새끼들이 자리를 잡는다
모든 역사는 반복되고
이 새끼들의 역사와
나의 역사도 그러하다
후회할까, 생각이 스치기도 전에
잠이 드는 하루하루
어쩔 수 없다고 채 깨닫기도 전에
불이 꺼지는 운명
이 씨팔 새끼들,
모든 것을 내 안에 가두는 감옥
나는 씨팔

 

song ver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씨팔
그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은 이 새끼들이
(1 5)
그 다음은 둘을 합친 말 (씨팔 새끼들)
(7b 1)
이 새끼들이 사라져도
또 다른 이 새끼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모든 역사는 반복되고
이 새끼들의 역사와
나의 역사도 그러하다
(1 5 반복
6b 7b 1 -> 간주)
후회할까, 생각이 스치기도 전에
어쩔 수 없다고 채 깨닫기도 전에
잠이 드는 하루하루
불이 꺼지는 운명
(4 3b)

이 씨팔 새끼들
(7b 1)

모든 것을 내 안에 가두는 감옥
(4 3b)
나는 씨팔
(7b 1)

 

AND

웃지


내가 기타를 들면
너는 웃지
내가 노래를 하면
너는 웃지
내가 춤을 추면
너는 또 웃지
세상의 우울과
세계의 비참에도
너는 웃지
내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하기만 하면
너는 웃지

song ver

내가 기타를 들면
너는 웃지
내가 노래를 하면
너는 웃지
(1 2 5 1 반복)
내가 너에게 가면
너는 웃지
내가 춤을 추면
너는 또 웃지

세상의 우울과
세계의 비참에도
나의 잘못과
막연한 자신감에도(3 6 2 5)
너는 웃지(1 5 1)

내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하면
내가 너에게 가는 춤을 추면

너는 웃지(1 5 1)
너는 자꾸만 웃지(2 5 1)

1 2 5 1
3 6 2 5 


AND

8차


우리가 먹은 술안주
우리가 했던 말
우리가 불렀던 노래
그런것들은 이미
새벽과 함께 이슬이 되었다
우리가 마신 술만이
뱃속에서 춤을 춘다
해장국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친구여
둘이서 소주 한병 마시기가 버거워도
마저 비우고 일어나자
이 마지막 한 잔이
마음 깊은 곳 은밀하게 남은 균을
소독약처럼 씻어줄테니
술이 깨고 나면
티 없는 마음으로 살자
살자 살자 다시 살자
AND

붉은


기본 안주로 나온
멸치는 고추장에
소세지는 케첩에
찍어 먹는다
꽃게탕이 등장하고
게 껍질이 국물 속에서 붉게 빛난다
하아,
소맥 한 잔을 원샷하고
그녀의 붉은 입술로 흐르는 탄성
붉은 것들이 나를 홀리는 밤
뼛속까지 붉게 타오르는 욕망
시들지 않는 붉은 여름밤
AND

이해


이해한단 말로
이해할 수 없던 당신을

눈을 마주치는 일로
손끝을 맞대는 일로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일로
그대로 뒤엉켜 하나되는 일로
우리만으로 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일로
그때, 서로의 엇갈리는 숨소리를 깨닫는 일로

이해한단 말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