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

진달래 꽃 따며 함께 봄눈을 맞았던 사람이
그 꽃으로 술 담그며 화전을 부쳐먹었던 사람이
봄눈 내리는 날이면 마음 속에 꽃으로 피어나는 사람이
계절이 바뀌어도 가슴 속에서는 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비가 되지 못해 그 사람에게 갈 수 없는 사람이
바람이 되지 못해 그 사람을 스쳐 지날 수도 없는 사람이
한때 그 사람이 곁을 주었던 사람이 있다
AND

키스

발 뒤꿈치를 든 당신
눈을 감고
서로의 세균을
혀 끝으로 옮기면서
독감에 걸리는 건 아닐지 걱정을 해도
니가 좋다
AND

돌확에 고인 물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내 사랑을 의심한다
너는 내 사랑만 받았던 사람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구멍난 항아리
너는 돌확에 고인 물
네가 다른 남자를 만났어도
나는 어떻게든 너를 만났을 것 같다
헌데, 니가 옆에 있는데도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내 진심을 나도 모르겠다
나의 사랑은 내 죄고
너의 절망은 네 죄가 아니다
AND

아버지

그는
쉬어버린 김밥을 내게 건네고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나는 그가 누구와 산에 갔는지
누구와 술을 마셨는지 모른다

- 일이 힘드세요?
- 외로우세요?
- 어머니가 보고 싶으세요?
- 오, 아버지

그에게도 꿈이 있을까

빚에 쫓기고
해고통지서를 받고
이혼을 하고
매일 술을 마시는
내 아버지의 꿈을
나는 감히 묻지 못한다

AND

소고기 미역국을 먹다

아내의 퇴근을 기다리며
미역국을 끓인다
자식 키워 봐야 소용 없다고
명절에 엄마가 아들 먹으라고 싸 준 양짓살을
겉만 익혀서 한 입 크기로 자른다
내 각시 먹이려고 자른다
도마와 칼에 저미는 핏물
이 고기도 누군가의 자식이었다
생명으로 국을 끓여서
생명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유없는 우리사이처럼
미역국엔 이유불문 참기름이다
고기와 통마늘을 볶는다
마늘 다지는 게 귀찮았다
당신이 귀찮은 것은 아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마늘을 많이 넣는다
불려둔 미역을 넣고 계속 볶는다
물만 닿으면 다시 살아나는 미역이
당신만 보면 활기찬 내 마음 같다
간장으로 간을 하고 
물을 붙고 팔팔 끓인다
한 번 끓으면 불을 줄이고
살살 끓이며 간을 봐야 하는데
간 보기가 귀찮다
당신이 귀찮은 것은 아니다
매일 태어나는 우리 사랑을 축하하려고
오늘 저녁엔 미역국을 먹는다
AND

사거리에서

어느쪽이든
먼저 파란불이 켜지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되는
사거리 귀퉁이에 섰다
빨간불에 멈춰선 자동차와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질서에
마음 속으로 90도의 선을 그렸다
한쪽 끝엔 내가 다른쪽엔 당신이 있다
만년설도 만년이 백번쯤 지나면 녹아내리니
만 백년 쯤 이대로 서 있을까
헌데 바람은 왜 불까
논리적인 슬픔만이 나를 에워싸고
몸은 갈 곳을 잃고
마음은 질서를 잃었다
나는 당신을 잃었다
AND

성산대교


29만 9천원짜리 패키지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톡
부두노동자들 가득한 선술집
꽃을 파는 까레이스키 처녀
쌍커풀이 없는 눈매
마음처럼 둥근 얼굴
가녀린 입가에서
어설픈 한국말
안녕하세요
내 대답도
안녕하세요
유일하게 아는 러시아 말은 보드까
- 초면에 실례지만 사랑합니다
나랑 함께 서쪽 바다에 닿을 때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지 않을래요 -
이 말을 전할 수가 없다

퇴근길
꽉 막힌 성산대교 위에서
낯선 땅 블라디보스톡과
첫사랑을 닮은 까레이스키 여인을
세상끝으로 가는 열차를 상상한다
AND

고래

이것은 꿈인가
매일 보던 동네 앞바다
고래가 바위를 뛰어넘네
이것은 멸망인가
비위를 넘은 고래가 바위가 되네
이것은 생시인가
바위가 다시 고래가 되네
이것은 사랑인가
고래가 내 이름을 부르네
아, 이것이 삶인가
그 고래 결국 나에게로 오네
AND

정수리를 데었다

무심코 머리에 갖다댄 샤워기
뜨거운 물에 정수리를 데었다
나는 절대 들여다 볼 수 없고
내가 고개를 숙이면
너만 볼 수 있는 곳이 뜨겁게 아프다
나는 너에게 뜨거웠는데
샤워기 온수만도 못했다
찬물에 상처를 식히고
마음이 차갑다
정수리를 데이고
생에 가장 냉정하게
외출 준비를 마쳤다
AND

평균율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본 적 없다
신용카드를 가진 적 없다
대출도 없고
남의 대출에 연대 보증섰다 추심 당한 일도 없다
전기 요금 한 번 밀려 보질 않았다
사랑을 해도 죽고 싶은 이별은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도
저축도 없고
가진 것이라곤 쥐뿔도 없어도
유난히 몸이 튼튼한 것도 아니어도
그냥이 그냥인 하루하루를
평균률 이상의 세계를
이렇게 살아간다
그래도 살아간다
AND

겨울비

봄을 알리는 비가 멈췄다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멈췄다
나도 너에게 가던 길을 멈췄다
너를 기다리던 일을 멈췄다
마당에 묻어둔 겨울 대파가 시무룩하다
겨우내 눈 맞으며 겨울을 지킨 정든 파를 뽑아낸다
슬픈 마음에 술을 푼다
내가 납득할 때까지 이별을 붙잡기 위해서
나인지 너인지 모를 누군가를 붙잡기 위해서
비운 술잔 위로 눈물만 떨어진다
곧 봄이 오려나
나는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


AND

구구소한도

봄이 오면 님 잊을까
동지부터 하루하루
당신 생각 떠오르면
빈 매화에 형형색색
새 생명을 불어넣네
경칩지나 봄이 와도
춘분지나 밭 갈아도
생각나는 그때 모습
덧칠하고 덧칠해도
장마지나 가을와도
끝이 없는 당신생각

_________

봄이 오면 당신 잊을까
동지부터 하루하루
당신 생각 나는 날마다
빈 매화에 색을 입힌다
따뜻하게 차갑게
때로는 이 세상에 없는 빛깔로
81송이를 다 칠하도록
경칩지나 개구리 울고
춘분지나 농부들 밭 갈도록
떠오르는 마지막 모습
장마 오는 줄도 모르고
죄 없는 매화만 덧칠하고 있다
AND

은혜

여고 앞 분식집
여학생들의 종아리를 타고
젊음이 흘러내린다

초등학교 앞 문방구
자기 몸보다 큰 가방을 맨 아이들이
불량식품 하나씩 입에 물고 나온다

중학교 앞 편의점
재잘거리며 컵라면을 먹는 단짝 친구들
너무 춥다고 알바 누나에게 오뎅 국물 좀 달라고 하는 소년

여중 앞 어느 모퉁이
빈 건물에 붙은 현수막

- 현 위치 땅 매매 -

돈 모아서 현 위치를 사서
쏟아지는 은혜를 받으며
뭐라도 팔고 싶다
AND

기울다

순탄하게 너를 보내고
홀로 남은 오후
해지는 방향으로 바다가 기울었다
바다는 영원한 수평인 줄로만 알았는데
바람도 없는데 바다가 기울다니
바다가 아니라면 육지가 기울었을까
말 없이 너를 보낸 내 마음이 기울었다
바다는 서쪽으로만 붉게 기울고
그 끝에 너의 목소리가 있다
그리고 내 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밤
기울지 않은 세계에
혼자 바다만 바라보고 앉았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