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제와 얘기지만
너를 사랑하는 게
지금이라서 좋다
전에도 사랑을 말했지만
지금 내 모습이 좋고
지금 네 모습을 사랑한다
너를 가장 사랑하는 건
언제나 지금이다
AND

감자

산수유 꽃 어지간히 피었다
닭똥 거름 넣은 밭에
감자를 심는다
왠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감자를 캘 때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당신 얼굴이 떠오르고
너를 곱게 일구리라 다짐한다
닭똥같은 내 눈물도 거름이 될까

봄은 허투르구나,
마음엔 벌써 감자꽃이 피었다
AND

분산된 애정

여름이면 그늘을 찾고
겨울에는 양지를 찾는다
몸도 하나 마음도 하나라
몸은 그녀를 갈구하고
마음은 너를 향한다
바람이 우리를 향하고 있는데
그녀는 왜 우나
햇살이 너를 향하고 있는데
너는 왜 나를 등지나
기울어지는 내 몸은
나에게로만 나에게로만
쓰러지는 내 맘도
나에게로만 나에게로만
AND

껍데기

금강불괴도 나이를 먹고
꽃은 때 되면 일제히 피고 진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데
수박을 먹어도 껍데기만 남기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피어나지도 기울지도 못하는
껍데기로만 산다
땅구덩이를 파서 나무라도 심으면
어딘가 채워질까
그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에서 떨어진 씨앗이 대를 이으면
나도 원없이 기울 수 있을까
봄날 땅구덩이를 파며
어둠뿐인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AND

우리


나는 네 옆에 있고
너는 내 옆에 있고
나는 너를 안아주고
너는 나를 안아주고
나는 너를 위해주고
너는 나를 위해주고
나는 너를 지켜주고
너는 나를 지켜주고
나는 너 때문에 웃고
너는 나 때문에 웃고
나는 널 위해 울고
너는 날 위해 울고
나는 네 눈물 닦아주고
너는 내 눈물 닦아주고
나는 너로 인해 살고
너는 나로 인해 살고
나는 너
너는 나
이것이
우리

AND

볼음도에 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동네 산에 영지버섯이 있는 이유는 동네분들이 예전에 영지버섯을 재배했었기 때문이다. 산삼이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척박하다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 가기 위해서 위해서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아줌마 형님 형수님들이 행한 어떤 노력들이 세월과 함께 쌓였고 갑자기 외지에서 들어온 나는 그 노력 위에 숟가락을 얹는 느낌이다. 하지만 나의 노력도 그렇게 쌓여가겠지. 대를 이어 살아간다는 게 이런거겠지.

강릉 와서는 이런 느낌이 약하다. 여전히 누군가와 함께 서로의 노력에 기대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구체적으로 와닿질 않는다. 농사를 짓지 않는 탓이 가장 클까? 요즘 농사는 그렇지 않지만 농사란 건 씨앗을 받아서 대를 잇는 일의 반복이다. 그 반복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속이 깊어진다. 단, 살아 가기 위해서 아둥바둥 농사 지어서는 그러기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할지 알면서도 자꾸 묻는다.

볼음도에서는 집안에 항상 고양이 망고가 있고 집 밖에서는 강아지 포비가 나를 볼 때마다 펄쩍펄쩍 뛰었다.

그때 생각이 나네. 얼마전 일인데도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AND

젓가락질

나는 젓가락질을 예쁘게 잘 한다
왼손 오른손 다 잘한다
그런데 나는 집도 없고 땅도 없다
세상에 가치 있는 건 쥐뿔도 못 가졌다

주인집 아줌마는 집도 땅도 돈도 있다
외출할 때는 라이방을 걸치고 멋을 부린다

아줌마는 가끔 나랑 술을 마신다
몇 잔 먹다보면 오빠 생각이 난다면서
아들뻘인 나를 부둥켜 안고 운다
그런 아줌마의 젓가락질은 보기 안쓰럽다

겨울 지나 봄이 와도
내 젓가락질은 여전히 예쁘고
아줌마도 여전히 잘 운다

세상 참 공평하다
AND

귀욤새와 독버드


넌 나의 보살
술 먹고 핸드폰 잃어버린 나를 참아준다

넌 나의 2단 추진체
난 너만 있으면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까지도 단 번에 간다

넌 나의 귀여운 작은새
제이 지 와이프는 비욘세 내 색시는 귀욤새

나는 너의 독버드
네 말이라곤 죽어도 안 듣고
말로만 글로만 사랑한다고 한다
다만 널 위해서라면 개도 되고 새도 된다

그런데 말이지,

나는 너를 보고 자는 데 너는 벽을 보고 잔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사는 게 걱정이라고 한다
바쁜 일 없을 때만 가끔 내가 보고 싶다고 한다
너에게 부탁을 하는 나에게 넌 명령을 한다

그래도 말이지,

넌 나의 귀욤새
난 너의 독버드

AND

시와 당신


詩보다 봄이 좋다
이런, 시봄

詩보다 밥이 좋다
이런, 시밥

詩보다 좋은 게 암만 많아도
전부 다 시시하기만 하고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좋다
AND

겨우살이

참나무 이파리 모두 떨어진 계절에
나무 꼭대기에 붙은 겨우살이를 본다
겨울에만 겨우 모습을 드러내는 겨우살이는
겨우겨우 살아가는 지금 내 모습을 닮았다
나무에 매달려 홀로 푸른 모양새가
엄마한테 달라붙어 살던 내 어린날을 닮았다
암에 걸린 우리 엄마 물 끓여 먹이려고
기어이 나무에 올라서 가지를 잘라낸다
겨우라도 좋으니 죽지 말라고
이번 겨울은 넘겨야 한다고
그래야 당신도 살고 나도 산다고
나를 닮은 겨우살이를 땄다
AND

옆집 아줌마


새벽에 잠이 깼다
샌드위치 판넬을 통과하는 옆집 아줌마 목소리

야, 이 씨발새끼야. 나이를 육십을 넘게 처먹었으면 인간답게 좀 살아.
응? 육실할 놈의 개새끼야.

뭐라 변명을 늘어놓는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랑 동갑

개새끼랑 웅얼웅얼의 반복
나와 아내는 어느틈에 다시 잠이 들었다

밤새 고함을 지른 아줌마는
아침에야 잠이 들었을까

곤히 잠든 아내를 보다가
다녀올게요, 이마에 입을 맞추고

옆집 세탁기 소리에 맞춰
칫솔질을 하고 집을 나서는데

옆집 아줌마랑 딱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웃는다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휙, 나를 지나치는 아줌마

주인집 마당엔 매화가 피었고
나는 봄날 찬바람을 맞았다


AND

그림


곧 사라질 구름 위에
네 이름을 그린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네 얼굴을 그린다

그러고도 그리워서
자꾸만 너를 그린다

그려도 그려도 그립고 그리워서
텅빈 내 그림자를 너로만 채운다
AND

장기이식

사채빚을 못 갚았다
목에 칼이 들어오고서야
간을 반 정도 잘라내도
죽음은 멀리 있다는 걸
신장이 콩팥이고
두 개씩 있다는 걸 알았다
영화에서만 보던
장기 이식을 마치고
담배 연기는 근심을 날린다
토끼 간을 구워 먹으면
간이 빨리 회복될까
빚 청산하고 남은 돈으로
분식집에서 순대를 시킨다
아줌마, 간 많이 주세요.
AND

이사

벌판을 나와 바다를 건너
벌판을 지나 고개를 넘어
또 다른 벌판으로 가네
눈치를 보며 힐끔힐끔 내리던 눈이
대관령 고개를 넘자마자
뚜벅뚜벅 비가 되었네
강릉 사람이 되었네
AND

보살집


태어난 날과 시간을 읊조리는
보살님의 그윽한 눈동자

제 꿈을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제 미래를 님에게 사겠습니다

두려움의 반대편에서
온화한 낙관을 제게 주세요

어쩌면 좋을지 알지만
어쩌면 좋냐고 묻고
어쩌란 대답을 듣는다

5만 원 어치 희망을 품고
보살님을 뒤로한다
AND

불온 3

권태기에 찾아온 손님과
세계관을 협상한다
당신은 관상용이 아니라
품어야 하는 사람
그래야 내가 사는 사람
그렇게 일단락 지어지는 사람
물에 들어가 욕심을 씻어내고
숨이 넘어갈 듯 웃는 여자를 안는다
만신창이로 집에 가는 길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에게 따 주려고
눈에 담아둔 별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을 무사히 마쳤으니
메주 같은 발로 걷고 뛰며
하루하루를 갉아 먹는 삶을
내일도 살아야지
내 집 같은 아내와
함께 살아야지
AND

블루스와 부르쓰


4분의 4박자
12마디 블루스
둥~두 둥~두
둥~두 둥~두
셔플리듬이 영혼을 깨운다
쇳덩이에 발목을 묶인
흑인 노예들의 한과
고향 잃은 설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완성한
라큰롤의 뿌리

리듬도 박자도 중요치 않아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처음 만난 사람을 부둥켜 안고
싸구려 색소폰 소리에 흐느껴 무너지는
무너지고 부서져도 다시 일어서는
서럽고 서글퍼도 계속 살아가는
무정 부르쓰, 추억의 부르쓰, 황혼의 부르쓰
블루스도 부르스도 아닌
남조선 부르쓰


AND

다이어트

한 해 두 해 지나갈 수록
하나씩 하나씩 쓰면 쓸 수록
조금씩 조금씩 몸이 커진다

지방이 잔뜩 낀 생각과 글에 지친다
가녀리고 푸석푸석하지만
기름기 없이도 맛깔나는 문장을 쓰는
낭창낭창한 사람이고 싶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사랑이 아니라
수수하지만 스스로 빛나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 멋대로 살 건데
멋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라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사람
세상에게 지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요즘 나 소식하잖아
AND

차오르지 않는 봄

원망하고 애원하기에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루하루 선명해져
실체로 내 곁에 머무는
마지막 너의 모습
산수유, 매화가 피고
벚나무 마디마다 움을 틔워도
갈대밭에 새바람이 불어도
내 마음엔 차오르지 않는 봄
4월은 잔인한 달
모든 것을 앗아간
흉폭한 4월의 신에게
널 잊기 위해서 비운
술잔을 던진다
나를 던진다
AND

첫 차

씨팔, 존나 불쌍한 내 첫 차
차에 대해 잘 몰라서
어렵던 시절을 살아서
엔진오일도 때 맞춰 갈아준 적 없고
에어컨 필터도 딱 한 번 교체했다
200만원 주고 사서 10년을 타고도
죽을 때 고철값 30만원을 남긴 너
그런 너의 마지막을 외면했던 나
새차를 사고 나서도 자꾸 생각나는
내 청춘의 나팔수
강원 30다 2918
똥색 마티즈
AND

오후 세 시의 불륜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588번 버스 종점 모텔촌
40년 째 영업 중인 감자탕 집에서
뼈다귀를 뜯고 있는 흰머리 연인
넓은 창으로 해가 드는
옛날식 커피숍에 마주보고 앉은 아저씨와 여고생
술 때문에 비틀거리면서
자기보다 두 배는 큰 남자에게 바짝 매달린 여자
사랑의 이름과 각종 완비로 도배한 모텔들
주차장 커튼을 슬그머니 밀며 드나드는 고급 자동차
시장에 가고 집 앞에 쓰레기 봉지를 내놓고
학교 다녀왔습니다, 를 외치며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 섞여
온 동네를 붉게 물들이는 사랑의 열정
불만, 불행, 불온, 불륜이 사랑의 들불이 되어 번지는 거리
운행을 마친 버스가 하얗게 불에 타 종점에 닿는
오후 세 시의 588 종점
AND

봄을 보다

호랑나비를 보다
쪽창으로 매화를 보다
아기새들의 어설픈 지저귐을 보다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미풍을 보다
그 미풍에 실려온 당신 소식을 보다
바람 불어 벚꽃 다 지기전에 내 마음을 보다
아무것도 못 봤다고 봄에게 우기려는 나를 보다
AND

불법

사랑 자유 평등 평화 인간애
어딘지 순진해 보이는 말이라곤
들어본 적도 없는 듯이 사는 분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 다단계 우두머리
- 재벌 총수
- 국회의원
- 대통령
- 조폭 두목

특히 타짜들하고 잘 지내고 싶다

그네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거사를 치러야지

다단계 회장님 머리를
재벌 총수님 돈줄을
국회의원님 주둥아리를
순서대로 자르고
대통령님은 머리 끄댕이를 잡아 끌어 내려야지
조폭 두목님 배에는 동그란 구멍을 내줄까

개평이나 조금 받고
타짜 손모가지는 그냥 둬야지

지금은 미친놈들 세상이니까
나도 미친놈이니까

불법하는 놈들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다
AND

자전거


강물보다 빠른 속도로
자전거를 달린다

연인과 연인과 연인을
지나치고 지나치고 지나친다

모든 일이 휘이 지나가도록
페달을 밟는다

내가 멈추면
지구도 도는 일을 멈춘다

하여, 쉬지도 않고
강의 끝과 달의 마지막을 쫓는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자전거를 달린다

울지 않기 위해서
꾹꾹, 페달을 밟는다
AND

만수르

나는 만수르
말술을 먹는 알콜 만수르
열심히 일하는 노동 만수르
불평이 많은 주댕이 만수르
셋을 합쳐 합체 만수르
무적의 빈털털이 만수르
AND

첫 차

경계가 무너지는 하늘로부터
스물스물 다가오는 이별
버스를 기다리는 너와 나 사이에는
어떤 공기도 흐르지 않는 진공
마치 우리처럼
종점이 어딘지도 모르는 버스에 올라
타야할 곳과 내릴 곳을 아는 사람들을
그저 바라본다
비가 버스 창문을 때린다
우산도 없는 너는
낯선 거리에서 버스를 내리고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는다
버스 손잡이 냄새를 맡다가
나를 닮은 내 손을 본다
내 손을 닮은 내 마음을 본다
내가 알면 비도 알고
내가 모르면 비도 모르는
내 마음을 본다
종점에 도착한
내 마음을 본다
AND

명절 전날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일까

괴성을 지르는 정육점 총각
흥정도 없이 나물을 사는 새댁
포 뜨는 아주머니 앞에 늘어진 긴 줄
내놓기 무섭게 다 팔려나가는 두부
돈으로 쉴틈 없는 상인들의 전대
가족이란 이름으로 몰려 다니는 무리들
기름 냄새 사이로 미끄러지듯 서로를 헤집고 다니는 사람들

그 아래에

세상에서 가장 흥겨운 음악으로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을 기는
다리가 없는 걸인
AND

봄 우울

이익에 매달리거나
원대한 꿈을 품은 것이 아닌데도
온종일 이게 아닌데
아, 이게 아닌데 생각만 하다가
그 기분 그대로 밤잠을 설치고
반쯤 열린 창문으로 빗겨 들어오는 오후의 우울을 정면에서 얻어 맞는다
이 마음이 이 마음일 뿐인 것도 알고
바다가 넓어봐야 물인 것도 아는데
새들이 함성을 지르는 이 계절에
부끄러운 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부끄러운 마음 뿐이다
내 마음 내버려두고
슬그머니 봄만 다가온다
AND

봄 단상


거지같은 거짓 활기로 가득찬
부자 성공 노력같은 말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진 3월의 거리
되돌아 볼 것이 없어 아름답던 청춘은
시든잎이 되어 떨어졌고
술을 마셔야만 달라지는 지난날의 치욕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이내 잊는 것의 반복으로만 산다
우여곡절을 살아도 살았으면 의미가 있을까
술 마실 때마다 친구 아들방에서 잠들고
아무 걱정 없냐고 물으면
응, 이라고 하는 그 아이는 엊그제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나는 입학할 곳이 없는 신세
곧 심근경색이 올 거 같은 몸에 예술가의 발가락을 달고
거리를 거리를 거리를 걷는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하염없이 걷는다
새로운 시절의 인연을 찾아
걷고 걷고 걷는다

AND

봄, 나무

봄이 오니
나무가 다시 말을 건다
설산을 보며 머리만 긁던 나에게
나무가 말을 건다
어여 오라고, 봄이라고
가지 끝의 움으로 나를 부른다
나무에서 물이나 빼 먹는 건 인간 뿐인데
인간 때문에 새들은 웃지도 못하고 울기만 하는데
겨울을 아무말 없이 견딘 나무가 나에게 말을 건다
견딘다는 건 견고해지는 것
자기 발끝도 못 따라가는 나에게
나무가 자꾸 말을 건다
나무 앞에 작아지기만 하는 나에게
견디라고 견디라고 한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