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록이 짙어서 당신 생각이 납니다
초록에 겨워서 당신 모습을 겹쳐봅니다
몇 해 전 봄날
당신과 빗속에서 바라보던
초록이
그때만큼 짙어서
흐린날 초록이 더 짙다던 당신 얘기가 떠올라서
나무 끝에 새 잎들이 서두르는 춤을 추기에
다시는 봄이 오지 않을때까지
당신을 기다려 보기로 합니다

AND

이러다

이러다 죽는것을 생각한다
차라리 이러다 죽었으면
묘비병을 생각한다
이러다 죽었으면 하다가 이러다 죽었다
1978 ~ 20xx
아무도 이러다를 모르는
이러다
죽고 싶다

AND

터널

터널을 통과하면 새로운 땅이다
터널을 통과하면 다른 사람이다
터널을 통과하면 전쟁이 끝나있다
터널을 지나면 봄이다
어둠을 뜷고
여전히
당신 생각이 나는 봄이다

-> 터널안에 사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AND

호두과자

사랑같은 건 다시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아무도 호두과자에 대해 쓰지 않는 호두과자를 생각한다
호주는 껍데기가 딱딱한 열매
과일이라 쓰기는 애매해서 열매라 썼지만
그냥 호두라 해버리는
호도랑 헷갈리기도 하는
호두?
호두과자는 호두 열매를 닮았지만
밀가루 반죽이 열에 익어
말랑말랑한
과자는 바스락거러야 과잔데
말랑말랑한 과자
내가 아는 부잣집 아가씨는
인제 내린천 휴게소 호두과자가 맛있다는데
내가 먹기에는 붕어빵이랑 같은 맛
삶은 팥 맛
세상 가장 맛있는 호두과자를 생각하며
신사대로에 사는 옛친구를 떠올려보기도 하는
삶은 물컹한 팥 맛

AND

관계부호

배우자


자녀
며느리
사위
시부
시모
장인
장모
양부
양모
외증손


외증손부
누이

언니

손부
손서
증손
증손부
고손
고손부
오빠
배우자의 자녀
시외조부
조부
조모
시조부
시조모
증조부
증조모
고조부
고조모
장조부
장조모
시외조모
누나
외손
외손부
외조모
계부
계모
생부
생모
계자
생자
기타
처조부
처조모
생시모
생장모
생조모
생시조모
생처조모
처(사실혼)
남편(사실혼)
처외조부
처외조모
친생부
친생모
계장인
계장모
계시부
계시모
그리고

AND

악몽 7

살의로 가득찬 삶을 살지 않는데
시체를 유기하는 꿈을 꿨다
적대감보다 호감이 더 강한 사람들을
차례대로 죽이고
한 구 한 구 캐비넷에 칸칸이 숨겼다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난 후
꿈 속에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꿈 속이라 잠이 오지 않았나
언젠간 발견될 공포
범인이 나란 걸
남아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지나간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내 이름과 얼굴 속에서
나는 무엇으로 살까

AND

만 원

주머니에 만 원짜리 한 장 넣어갖고 다닌다
급하면 담배도 살 수 있고
내키면 복권도 살 수 있고
속이타면 콜라도 사 마실 수 있는 만 원
카드도 있지만
미리 지불하는 삶은
미래를 구속하므로
카드 쓴다고 당장 감옥에 가는건 아니지만
설령 사랑이라도
구속되긴 싫으니까
담밸 사거나 콜랄 마시거나 일확천금을 노릴때는
만 원짜리 한 장 꺼내 쓰게 된다
짜장면으로 점심 한 끼 떼우든
편의점에서 깡소주를 사 마시든
뭘 해도 낸 맘대로고
잔돈이 남으면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좋고
만 원짜리 자본가인 내가 좋아서
가급적 만 원짜리 한 장 갖고 다닌다

AND

길 없음


길은 나아가려고 한다
집은 멈춰있다

아내는 나아가려고 한다
나는 멈춰서있다
한 집에 사는데도

길은 계속 나아가려고 한다
벽을 뚫고 산을 뚫고
앞을 다 무너뜨리고 나아가려고 한다

나는 길이 끊어진 곳에 살고 싶었다
길 없음, 표지가 붙은 도로끝 집
되돌아 가는 길만 있는 곳

길이 나에게 비키라고 한다
나도 자빠뜨릴 기세다

집은 멈춰서있다
이제 나는 돌아가려고 한다

AND

북쪽으로 걷는 사람


동쪽 끝에 바다가 있는 나라에
북쪽으로만 걷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앞은 북쪽 뒤는 남쪽 오른편은 동쪽 왼편은 서쪽
그런 사람이 살았습니다
어딜가도 뒤로 걷는법이 없고
자동차를 타도 앞으로만 가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 아, 바다가 보고 싶다
대체 어떻게 해야 동쪽으로 갈 수 있는거지

북쪽으로 걷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 친구, 이곳을 나가서 계속 걸어보게

함께 커피를 마시던 친구가 말했습니다

- 하지만 북쪽은 다른 나라의 국경인걸

북쪽으로만 걷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 친구, 나를 믿게 난 바다를 보고 왔다네

바다를 보고 온 친구가 말했습니다

북쪽으로 걷는 사람은 걸었습니다
앞으로 앞으로
북으로 북으로
이정표도 없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흐린날
솟아오른 수평선을 보았습니다
그 위로 솟아 오르는 고래를 보았습니다

북쪽으로만 걷는 사람은
동쪽에 바다를 끼고
다시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AND

부득이


당연한 일에 부득이를 붙여본다
피할 수 있다면 소나기도 피해야 하는데

부득이
장손이라서
병든 아버지를 돌보는 일

혼자 사는 숙모에게 별일 없나 연락하는 일
얼굴 처음보는 조카들을 안아보는 일

아버지 70 생일에 이모들에게 용돈을 드리고
이모들이 그대로 아버지에게 돌려주는 일

변명이 되버리고 마는 일

부득이에 나를 더해본다
부득이 내가 아버지를 돌보고
이모들 용돈을 주고
밥을 지어 먹고

부득이 하는 일이 없어야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고

나는 부득이 오늘을 살았네

변명하기 좋은말 부득이
그런 일들이 뒤섞인 사랑이

부득이

AND

신생(新生) - 목욕에 대한 생각

목욕을 하거나 세차를 할 때마다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아니, 새로 태어나고 싶다
묵은 껍질, 세상의 떼를 한 겹 벗겨내는 일로
생의 과오들과 어젯밤의 치명적인 실수가 씻겨 내려가고
새 사람이 된 것 같다
아니, 새 사람이 되고 싶다
새로 태어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다시 한 번 씻는 일로
다 잊고 싶다
아니, 다 잊혀졌으면 좋겠다
세상의 굳은 때를 박박 벗겨내진 않더라도
그저 물이 흘러가는 일로
몸을 씻어내는 것으로
껍질을 닦아내는 것으로
다 지워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모든걸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랬으면 좋겠다

AND

중년의 사랑

나는 늙었습니다
낡은 건 아닙니다
차라리 늙었으니 낡았으면 좋겠습니다
순리대로,
늙어,
좋은 일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배신하지 않으면
늘 그대로인 일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사랑사랑
지겹지가 않은 일은 세상에 없는데
사랑이 지겨우면
그건 삶이 아니므로
지겹도록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늙었고
지겹고도 지겨워서
사랑?
그까짓것
당신을 사랑합니다

AND

데운밥을 먹다

냉동실
갓 지어 얼렸어도 얼린 밥
얼린밥은 지나간 일
데운밥을 먹다가
당신과 얼린밥을 녹여 먹던 일을 생각하고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전제란지에 들어간 밥알들의 운명같은 것도 생각하다가
당신도 데운밥을 먹을 일을 생각한다
두 사람 두 개의 숟가락 두 개의 데운밥
한솥에서 나왔지만 서로의 온기가 되지 못한 일
한통속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둘이었던 일
둘이었다가 혼자가 된 일
육인용 밥솥에 가득지어 얼려둔 밥을
하나씩 꺼내 먹는 일
데운밥을 먹다가
지나간 사랑이 되는 일

AND

사랑


사랑을 시작할 때 시를 써야지
영하 20도 겨울,
정오의 볕보다 반짝이는 말들로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시련이 닥치면 시를 써야지
가장 깊은 바닥에서,
손톱 뒤집히며 긁어올린 말들로
살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그리울 땐 시를 써야지
마음의 빈 자리,
구멍이 뚫리는 말들로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다시 만난 날에는 시를 써야지
끔속에서도 그립고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눈과 귀를 멀게 하는 말들로

사랑하고
살고 싶고
보고 싶었다고
그리고 나는 사라진다고

AND

흐트러진


너는 울었다
그리고 흐트러졌다
세상은 그대로이니
그것은 세상 탓이다
너의 탓이 아니다

너는 울었다
그리고 다시 흐트러졌다
나는 나에게 내가 그대로인지 묻는다
내가 물었으니
그것은 내 탓이다
너의 탓이 아니다

네가 떠나고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흐트러졌다
세상은 그대로이니
그것은 내 탓이다
너의 탓은 아니다

나와 너와 세계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AND

우동을 먹다

우동을 먹는다
이름처럼 둥근 면발
동으로 끝나는 다른 음식은 뭐가 있지?
당장은 오뎅만 떠오르고
우동 국물엔 오뎅이 들어있다
얘네들 이름처럼 동글동글하게 살고싶다
뜨겁지도 않은데
후후 불어가며 우동을 먹는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닌데
그렇게 되고마는 일은 어디에나 있다
그것이 순리라면
우동 면발 삼키듯 순리대로 살고 싶다
먼길 다녀오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당신과 함께 우동을 먹는다
순리가 의식이 되고 의식이 종교가 되고
내 마지막 종교가 당신이라면
그것이 사랑인가
물어보는 순간 사랑이다(우동이다)

AND

소나무와 육회

오래된 절에 가서
그 절보다 오래 살았다는 소나무를 보고
육회에 술을 먹었다
희석식 소주에선 솔향이 났고
날고기에선 대웅전의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나보다 오래된 사랑에는
그럴리 없는 일들이 넘쳐흐르고
어려서 실던 집은 길로 바뀌었다
나보다 오래되지 않은 생활에는
뻔한 일들이 가득하고
그 아득한 뺄셈에,
아침에 본 나무를 생각하며
술만 먹는다
눈물은 잊고
날고기에 낮술만 먹는다

AND

지겨운 사랑

조금 지겹다는 생각이 들고
지겹다는 것이 사치라는 생각도 지겹다는 생각이 들고
한 번 지겨워지면 도로 물릴 수 없다고
단정짓는 사람이 됐지만
우리 사이 말고는 모든 게 다 끝났다, 고 할 수 있어서
지겹지만 좋은

AND

겨울


봄보다 더한 겨울이다
여름보다 더한 봄도 가능한 일이다
여름보다 더한 여름도 여름이라 불리고
겨울보다 더한 겨울도 겨울이라 불리므로
지금은 겨울이다
봄보다 더한

쉬고 싶어 휴가를 내고
단골집 커피의 첫 모금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아직까진 괜찮다는 뜻이다

휴가도 커피도 없고
봄보다 더하기만한 겨울만 있어도
살아 있다면 그때까진 괜찮다는 뜻이다

봄보다 더한 겨울이다
두 잔 째 커피의 첫 모금은
항상 조금 더 살고 싶어지는 맛이다

AND

너와 나의 국도

홀수 번호는 남북방향
짝수 번호는 동서방향
35번 국도는 강릉에서 부산
42번 국도는 인천에서 동해
두 국도가 교차하는 사통발달
정선군 임계면 교차로
만나자마자 헤어져야하는 길 위에서
우리는 가로지르다 만났고
느린 걸음으로 헤어졌다
길은 정해져 있음을
둘 다 알고 있었지만
시간을 멈출 순 없으니 늦추고라도 싶었다
각자의 끝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날수도 있으니
끝이 끝이 아니길 바라며
오늘,
너와 나의 교차로에서 잠깐 너를 기다렸다

AND

생활

월요일 아침, 출근하기 싫어서 전화를 안 받고 아침밥을 해 먹고 방을 치우고 빨래를 널면 생활이 있나 반찬을 사오고 또 밥을 먹고 맥주도 한 캔 곁들이면 거기엔 생활이 있나 전화를 계속 받지않고 문자도 씹고 모두가 행복한 라디오를 들으며 맥주를 한 캔 더 마시면 그 자리엔 생활이 있나 보고 싶던 사람에게 전화를 해 다른 사람의 안부를 묻고 전화를 끊자마자 울어버리는 이 하루를 무어라 부를까

AND

장마

눅눅한 기타 소리
습기를 먹고 조용히 타들어 가는 담배
방 안에 갇혀 가라 앉는 연기
참새 한 마리 지붕 아래로 비를 피하고
빗물에 마음이 잠긴다

AND

겨울

날 추워지니 자신이 없다
가을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찬바람 따라 머릿속이 달그락거린다
초록이 끝난 시절
저무는 계절은 하루 아침에 오고
조금 지겹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AND

두부조림을 먹다

일요일 아침
두부 한 모 800그램 1870원
열 네 등분 하고 살짝 구워서
두 줄로 깔고 양념장을 넣고 졸인다
지난주에 당신이 맛있다고 했기에
정확한 수치의 양념장을 만든다
깼다가 다시 잠든 당신 종아리를
열린 문틈으로 바라본다
이 세상 것이 아닌듯 가늘다
혼자 먹는 아점
한모 다 먹으면 돼지라 핀잔 들을까 싶어
윗줄에 있던 일곱 조각, 반모만 먹는다
맛있다
잠에서 깬 당신도 밥을 먹는다
한 조각, 십사분의 일모를 먹고
배 부르다고 한다
맛있다고 한다
체중은 나의 절반
허벅지는 나의 4분의 1
두부는 나의 7분의 1
숫자로 계량되는 당신
.....
넘치는 것은 사랑이다

AND

길에서 자다

내가 아는 어떤 누나는
집 앞까지와서 자는 버릇 때문에 술을 끊었다는데
나는 길에서 잔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할지 모를 정도로 빨리 취하는 게 좋다
그게 진짜 나니까
그리고 길에서 잔다
자다 깨면 집에 온다
그게 나니까
여름엔 모기 때문에 깨고
겨울엔 추워서 깬다
여름엔 못 깨도 안 죽겠지만
겨울엔 죽는다
아직까진 운이 좋았다
길에서 자주 주무시던 우리 아버지도
지금에 와선 치매가 왔지만 아직까진 운이 좋았다
핏줄끼리 운을 겨룬다
태어난 죄인지
아버지 가는 모습은 보고 싶다
아버지에게 지고 싶진 않다
자꾸 길 위에서 자다 깨지만
길에서 죽고 싶지 않다

AND

곪아죽다


등에 혹이 생겼다
거짓말을 많이하고 살진 않았다
그 혹이 부풀고 곪았다
살을 째고
고름을 짜고
살을 꿰맸다
의사가 비지 좀 보라며 장난을 친다

- 선생님 전 곪아 죽는건가요
- 네, 가만히 놔두면 살에 구멍이 나요

의사가 계속 장난을 친다
찌꺼기만 남은 삶이라도
아프지 않으려고 곪아죽지 않으려고 
진통소염제를 먹는다
언젠간 너에게 곪아죽겠다

AND

돈다

일요일 아침 빨래방에 왔다
혼자 있고 싶어서,
나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또 있었다
이미 건조기를 돌리던 아저씨와 가벼운 눈인사를 한다
기계적으로 카드를 찍고 빨래가 돌아간다
코인빨래방에 동전을 가져오는 사람은 없다
이십년이 넘도록 21세기 타령을 하는
나는 옛날사람
대형 세탁기 안에서 일주일간 몸에 걸쳤던 것들이 돌아가는 일이
일요일보다 더한 안도감을 준다
삘래도 돌고 지구도 돈다
과거를 살아도 살아있으면 다 돈다
그러니 나도 돌고 있다
빨래방 바로 옆에 마트 이름도 하필 하나로마트다
연어를 손질하던 마트 회센터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손님보다 마트 노동자가 더 많은 시간, 오전 여덟시
나도 그들과 하나되어 돌고 있으니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외롭지 않으니 혼자 있고 싶다
빨래는 이제 건조기에서 돈다
곧 돌아갈 시간이다
돌고 있다면 혼자도 외롭진 않다

AND

푸딩을 먹다

밤 11시 38분에 푸딩을 먹는다
아내가 자기는 먼저 먹었다고 한다
푸딩은 말랑하고 달다
돈까스나 카레는 유래나 조리법을 알지만
푸딩은 이름만 아는 먹거리다
푸딩은 이름이 예쁘다
푸딩푸징푸딩푸딩
퐁당퐁당퐁당퐁당
아내가 술취한 나에게 준 푸딩은
작은 병에 담겨 있다
아내는 내가 취했는지 알까?
어디서 얻어온 푸딩을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내게 주는 것이 사랑인지 묻는다
사랑이야?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뭘 자꾸 확인하냐며 역정을 내는 아내에게
머릿속으로만 얘기한다
사랑인지 묻는 순간 사랑이다
푸딩은 달고 말캉하다
사랑은 항상 푸딩같진 않지만
사랑인가 생각하는 순간 사랑이다

AND

신뢰

사랑과 신뢰는 같은 말입니까
사랑하는데 신뢰하지 않거나
신뢰하는데 사랑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또는 세상은
나는 세상에 속해 있습니까?
내 인생은 나의 세상입니까?
붙들 수 없는 말들이
시절을 따라 태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내가 사랑이라고 하면 사랑이고
당신이 아니라고 하면 바로 사랑이 아닌 일들
기억의 끝 그 너머 저편에서
나는 자꾸만 사랑인지 묻고
당신은 계속계속 아니라고만 합니다

AND

2021년 7월 - 어슬렁 어슬렁

토요일 오후
친구와 술 한잔 마시러 나와서
어슬렁 어슬렁
바닷가 도시에 아직 폭염은 오지 않았고
저녁 바람은 시원하다
지동화기기에서 돈 만원을 찾아서
어슬렁 어슬렁
복권과 담배를 사고
후미진 골목 구석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친구를 기다리며
한량이란 단어를 떠올리고
방금 횡단보도를 건너며 봤던 공모주란 말도 떠올리고
공모주가 뭔지 아는 내가 영 어색하진 않은 시절이고
빌딩 사이라 바람이 더 센가
암튼 시원해서 좋고
친구는 아직이고
사상 최대의 폭염과 홍수에
전염병까지 도는 세상에서
오늘 저녁은 사상 최대로 먹어볼까
그런데 뭘 먹지 생각하고
늦는다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다시
어슬렁 어슬렁
바람은 계속 시원하고
비가 그친 하늘은 푸르고
서서히 줄어드는 낮의 운명은 9월까지 유예됐고
그때까진 다 괜찮을 거 같고
사람들이 다 뭐하고 사나 싶지만
어슬렁 어슬렁
나는 괜찮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