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雨水)
우수(憂愁)에 젖게 되는 날 우수(雨水)
근심과 걱정 마음고 마음 비와 물
비가 오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우는 날
비 내리는 수채화처럼 마음속에 비가 내리면
그리워지는 사람을 더 그리워하는 날
우수(雨水)
우수(憂愁)에 젖게 되는 날 우수(雨水)
근심과 걱정 마음고 마음 비와 물
비가 오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우는 날
비 내리는 수채화처럼 마음속에 비가 내리면
그리워지는 사람을 더 그리워하는 날
입춘
입춘이란 말처럼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돋아나는 새잎처럼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참고 기다렸던 계절처럼
이 바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싶다
입춘
첫 번째의 따뜻함이
귓가를 간지럽게 휘감고 지나가면
봄이다
봄바람은 노랑과 연두가 섞인 새싹의 색이다
멀리 산 정상에는 눈이 쌓여 있고
강추위가 찾아온 입춘이라고 떠들어대도
어제 나를 스친 바람 때문에
지금은 봄이다
대한
연중 가장 추운 시기
소한과 대한 사이,
소한이란 대한이는 친구 사이다
서로 자기가 더 춥다고 매년 싸웠지만
대한이가 소한이네 집에 가서 얼어죽는 일은 없었다
지들끼리 싸우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연둣빛 입춘만 기다렸다
소한
해가 길어졌다
다시 시작하자고
웅크렸던 마음이 말캉말캉 늘어진다
구구소한도를 생각하다가
구구 팔십일일의 기다림을 헤아려본다
소한 추위는 옛말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무렵에 길에서 얼어죽는다
매화가 핀다는 절기는 따로 없지만 누누가 꽃이피면 봄인 걸 안다
봄이 와도 여전히 사람들이 길에서 죽는다
고무줄이나 풍선껌처럼 늘어났다가
너무 좋거나 너무 싫어서 끊어지는 마음이 있다
동지
새해 달력을 받으러 조계사로 간다는 장모님
210킬로미터 떨어져 사는 엄마가 보내준 닭개장
연말에 이사 간다고 돈을 보내준 장인어른
장인어른에게 생일 축하 전화를 한 아내
한 시간을 랩 하듯이 혼자서 말하는 치매 아버지
아버지가 아들이란 걸 못 알아본 전화기 너머의 동생
지는 해를 정면으로 보고 걸으며
구름과 하늘과 빛의 경계를 생각하는 나
거리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은 다채롭고
만두집 앞 높게 쌓은 찜통에서 나는 연기가 쓸쓸하지만은 않은 계절
해 떨어지고 걸어서 도착한 단골집에서
커피 첫 모금을 마시고 한숨을 크게 쉬는
동지
세상 가장 어두운 날
우리가 스스로 빛이 되어
길어지는 해를 쫒아갈 수 있을까
지난한 반복을 무구하게 견딜 수 있을까
그래야만 한다면 그래야만 한다
대설
소설주의보는 없지만
대설주의보는 있다
오늘 대설주의보는 내리지 않았지만
절기에 맞춰 눈이 내린다
35번 국도 위
눈을 치우는 차 뒤에 바짝 붙었다
소금이 튀고 눈가루가 튄다
하얗게 태어나 새까맣게 변하는 존재들
세상은 결코 새하얗게 끝나지 않는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사는 중에
뜻하지 않게 자유민주주의를 생각해 보게 된 겨울
무겁게 내리는 눈 바라보며
내 마음에 무거운 주의보가 내린다
소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도
서로 등을 돌렸던 날도
눈이 내렸다
가장 따뜻했던 겨울과
가장 시린 겨울이
같은 선상에 있다
입동이 지났어도 겨울은 아니다
첫눈이 오기까지는 겨울이 아니다
해마다 절기에 맞춰 눈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오늘
세상에 더 가질 것 없이 눈이 내린다
발 아래 싸박싸박 무언가 쌓인다
행복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고
지금이 불행한 것도 아니다
생에 좋았던 날은 며칠 뿐이었다
입동
냄새도 소리도 색깔도 없이 온다
겨울은
하루 아침 찬바람에,
사람들은 군고구마, 붕어빵, 오뎅을 먹는다
먹고 사는 일에는 냄새도 소리도 색깔도 있다
산에는 빈 나무만 남고
나뭇가지에는 나뭇가지만 남아도
뱃속엔 따뜻함이
가슴 한켠엔 지나간 것들에 대한 온기가 있는
상강
바람이 서걱서걱 분다
빈 나뭇가지가 덜렁댄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부고를 매일매일 듣는다
얼마전
그 중에 당신 소식이 있었다
북서쪽 산 정상으로 향하는 출근 길
라디오에선 이 계절에 어울린다며
30년 전 이별노래가 흘러나오고
운전대를 잡은 반대편 손에서 피워내는 담배 연기
차창을 열자 바로 흩어지는
온전한 공간에서 혼자서 맞이하는 죽음을 생각해 보는
한로
은행을 밟았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푸르고 차갑다
공구상들이 늘어선 골목은 평화롭다
국수집, 와플가게, 이불집을 차례대로 지난다
그 순서에 질서가 있다
사람들은 무뚝뚝 부지런히 길을 걷고
교차로 위의 자동차들은 서두르는 듯 보인다
나는 잠깐 멈추어 선다
모든 것이 조화롭다
그것이 시간의 뜻이다
삶이 이루어낸 것들이 차갑게 식는 계절이다
오늘은 차가운 술을 마셔야지
뱃속에서부터 뜨겁게 울어야지
추분
이 무렵엔 마음이 절반으로 꺾인다
너에 대한 마음이 삶에 대한 마음이다
태양일 절반으로 꺾였으니
나는 너를 두배 더 사랑해야지
너를 두 번 안고 두 번 입맞추고
두배로 충만함을 느끼고
두배속으로 끝난 사랑이 두배로 허무하더라도
두배의 속도로 희망을 살고
무너져버린 계절을 견디고 봄을 기다려야지
백로
이슬이 내리지 않는 백로
푸른 하늘 대신 쨍한 하늘의 백로
남대천 한복판 돌 섬
늘 가마우지 두 마리가 있던 자리에
백로 한 마리가 고고하게 서 있다
나는 강변에 앉아서 그 모습을 본다
새도 앉는 법을 아나
강가엔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많고
퇴근 하는 사람, 장 바구니를 든 사람이 섞여 있다
사상 최고의 가을 더위에도
사람들 사이엔 평범한 일상이 흘러가는
처서
초복 중복 말복
소서 대서 처서
공기중에 마지막 더위가 머문다
마지막 매미가 울고
마지막 모기가 달려든다
마지막을 향하는 것은 다 서툴고 서글퍼 서럽다
나를 취하게 하는 취꽃이 피고
하늘하늘 바람이 부니
서러운 일 같은 건
금방 다 잊게 되는
入秋
여름이 가라고 매미가 우나 아직 귀뚜라미는 보지 못했는데, 벼가 익으라고 이렇게 덥나 벼 이삭은 이제 막 패려고 하는데, 찬바람은 언제 불려나 낙엽 떨어지는 소리 듣고 싶은데, 모든 계절의 입구에는 지나간 계절의 끝이 있는데, 뜨겁게 지나간 사랑의 끝에는 타버린 폐허만 남았다
대서
역사상 최고를 갱신하는 더위를 생각한다
지날 달에도
지지난 달에도
이번 달에도
다음 달에도
다다음 달에도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더워서 못살겠다는 사람들도
아직까지는 살고 싶다
복날이면 삼계탕 같은 걸 먹기도 하면서
나도 그러하다
소서
장맛비가 내리는 소서
시작도 하지 못한 더위
마음속에 방울방울 빗방울
시작도 하지 못한 사랑사랑
살아 있으니 시작은 했나?
죽어도 시작하지 못할 사랑
마음속에 살랑살랑 외사랑외사랑
장맛비가 멈추지 않는 날들
내 마음이 멈추지 않는 날들
하지
이맘때면 생의 절정을 생각한다
지지않는 태양 꺼지지 않는 횃불
축제와 같은 여름 일렁이는 사람들
누군가는 지금이라고 말하는
최고의 순간이 내게도 있었나
혹은 최선의 순간이라도
내일이면 황혼이 시작될테니
언젠가 모든 생이 저물테니
희망 같은 건 태워 버리고
해가 꺼질때까지 비틀거리자
세계와 나의 연결 같은 걸 생각하면서
꺼지지 않는 밤이 올 때까지
휘청거리자 휘청거리자
망종
남녘 들판에 모내기가 한참이다.
이 무렵에 보리 수확을 해 본 적이 있다
날씨가 지금마냥 뒤죽박죽이지 않고
절기를 따라가던 좋은 시절의 일이다
하루종일 낫으로 보리를 베고 보릿단을 탈곡기에 밀어 넣었다
믹걸리에 늦은 저녁을 먹고 바락바락 씻었는데도
자려고 누우면 온몸이 까끌거렸다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고 아이들도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까끌거린다
보리 까스라기가 몸 깊은 곳에서 꿈틀거린다
소만
올해가 다 간 것 같은데 이번주도 아직 수요일이네
골목길, 담벼락을 넘어온 장미가 반짝거리고
더 푸를수도 없을 것 같은 하늘을 본다
계절은 네 개, 5월은 열 두 달 중에 하나일 뿐인데
왜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하나?
어제는 네가 막국수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봐서 좋았고
나는 비틀거리도록 마셨다
오늘은 병원에 가려고 휴가를 썼지만 병원은 문을 닫았고
더 흔들리기 싫어서 처음 본 가게에서 혼자 맥주를 마신다
그리하여 더는 소망하는 것이 없이 충만한
입하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
느티나무 무료 급식소 앞
나란히 선 느티나무 두 그루가 나날이 울창하다
무료급식을 준비하는 풍경 속
먼저 먹겠다고 치고 받는 술 취한 아저씨들
국통에서 치밀듯 올라오는 뜨거운 김과 장국 냄새
지나가는 자동차들 아랑곳 않고
나무 그늘 아래서 앙상한 얼굴로 밥을 먹는 사람들
정식 명칭은 느티나무 쉼터
쉬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한 세상
지금 한 끼 만큼은 공짜이기에
괴로운 일 다 잊고 줄지어 밥을 먹는 평등이
5월의 느티나무 아래에 있다
곡우
집 앞 모과나무에 잎이 나지 않았다 꽃도 피지 않있다 올해는
그러니까 죽었다 모과나무는
비를 맞아도 살아나지 않는다 모과나무는
내 몸엔 잎이 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그렇지만 살았다 나는
비를 맞으면 춥다 나는
모과나무 앞에서 비를 맞는다
모과나무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비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모과나무 잘못은 아니다
청명
어두워지는 하늘
곧 비가 내린다
온화한 바람이 불면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한다
비가 그치고 나면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한다
춘분
오리가 물 위를 낮게 난다
푸두득푸두득 날갯짓 소리
강물이 떨리고 마음은 고요하다
봄바람에 설레지 않는데
강물은 봄처럼 흐른다
경칩
시간이 눈처럼 흐르고
경칩에 폭설이 내린다
겨울 더위에 일찍 깼던 개구리는 얼어 죽고
경칩에 깨려던 개구리는 얼음에 갇혔다
세상사 별일인 듯 하다가도 돌아보면 별일 아니고
사랑도 그러하다
내 사랑은 어디로 흘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