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이 흐르고
파도가 흐른다
세월이 흐르고
삶이 흐른다
내가 흐르고
당신이 흐른다
당신 젖가슴 사이로
내 팔이 흐르고
내 다리 사이로
당신 다리가 흐른다
서로에게 기대어
우리가 흐른다
그리움
내 그리움의 가로와 세로를 곱하면
9만 제곱미터, 삼만평짜리 들판이 된다
거기에 당신을 가두고
내 그리움의 높이만큼 벽을 쌓는다
내 사랑에 갇혀 꼼짝달싹 못할 당신을 바랐으나
당신은 지붕이 없는 내 울타리의 빈틈으로
자꾸만 삐져나오고
내 그리움으로 하늘까지는 가릴 수 없음이
내 안에 있지 않은 당신이
나는 서럽다
이 운명인지 필연인지 모를 일에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를 일에
손끝이 뭉게지도록
쉬지 않고 돌담만 쌓아 올리고 있다
날아갈까
돌아가신 할머니 방에는
잡동사니가 쌓이고
내 방에는 버리지 못한 책이며
옷가지들만 쌓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내 방을 퇴적암 같다고 놀리고
더는 새로울 것이 없는 방에서
오래된 친구와 술을 마신다
술병이 쌓이고
빈 그릇이 쌓이고
추억이 쌓인다
멈추지 않는 시간까지도
모두 쌓이는데
10년을 쌓아온 사랑만은
날개도 달지 않고 날아갔다
나에게만은 대담했던 너
내 안의 작은새여
잘했다고 떠들어 봐야
결국은 나를 겹겹이 감싸주던
널 찾고 있다
네 외로움을 모르고 너를 만났다
미안함은 계속 쌓여가고
무거워진 나는
어떻게 너에게 날아갈까
해장침을 맞아가면서도 마신다
사랑
보일러 한 번 안 돌리고
소한 추위를 맞아도
온수매트 위에
납작 엎드려서
서로 깍지를 끼고 자도
자고 일어난 아침이면
수족냉증이라
이 세상 사람 것 같지 않던
네 차가운 손과 발에
온기가 도는 일
오징어 볶음
나는 우리집에서 요리를 제일 잘 하는 사람
간 안 보고 요리해도 다 맛있다
헌데, 점심은 귀찮아서 김치 볶음밥
저녁엔 뭐라도 만들어 먹어야지
종일 일하고 돌아온 당신과
맛있게 먹어야지
먼저 담배 냄새나는 손을 비누로 씻는다
당신이 좋아하는 양파는 많이 넣어야지
당근이 하나 밖에 없네
감자도 넣어야겠다
양념장에 들어갈 마늘도 준비해야지
양파 껍질을 벗기면서
매일 새로운 당신을 생각한다
당근을 자르면서
갈라지지 않는 우리 사랑이 자랑스럽다
양파 당근 감자를 순서대로 볶는다
오징어를 넣기 전에 양념장을 만든다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 마늘 소주 참기름을 뒤섞는다
언젠가 뒤섞인 사랑 때문에
당신과 나 모두 엇나간 적이 있었다
오징어를 넣고 양념장을 넣는다
오징어는 바다 생물
약불에 끓이면 물이 나온다
매일 샘솟는 내 사랑 같다
나는 먹지 않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대파를 넣는다
마지막엔 강불로 졸여서 마무리
요리의 끝이 사랑의 시작
소면을 삶아서 같이 먹을까, 생각하며
당신을 기다린다
친구한테 술 먹자고 전화가 온다
여보, 미안해요
오늘 저녁은 혼자 먹어요
금연
담배를 끊으면
새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질 않네
나는 줄 게 없으면
미안해서 개도 부르지 못하는 사람인데
왜 모질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끊었을까
담배는 끊는 게 아니라 평생 참는 거라는데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나는 니가 보고 싶어서
자다 깨서도 우는 사람인데
그리움의 연기를 내뱉지 않으면
너를 내 가슴속에만
계속 묻어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꿈에서만 보고 싶을 줄 알았는데
그렇질 않네
너는 찻집에서 처음 만난 낯 모르는 사람에게
꽃을 줘서 보내는 사람인데
겨울 지나 봄이 올 때처럼
한꺼번에 나에게 불어온 바람이었는데
이 밤이 다 타도록
빈 재떨이만 쳐다보고 있다
애꿎은 라이타만 만지작거리고 앉았다
자리
순댓국 집에서 혼자 밥 먹는데
숟가락을 두 개 꺼냈다
자리가 하나 빈다
결혼을 하려고 하니까 네가 없다
네 손에 내 손을 비빌 때 흐르던 정전기가 그립다
내 손이 자리를 잃었다
내 세계에 울려 퍼지던 네 웃음소리가
환청으로만 내 귓가에 맴돈다
아, 이것은 실제 하지 않는 것
네 웃음도 자리를 잃었다
너는 퇴색이란 단어를
눈을 빛내며 말하던 사람
나는 비밀이 많은 사람
너는 모르는 것이 많았던 사람
내가 속내를 털어놓는 건 내 친구지만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일부러라도 달아나고 싶었다
문득,
어느샌가,
돌아보니,
그러하였던 것들 중에
네 빈자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