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남자 - 황정은

2018. 8. 31. 11:38

 예컨대 dd의 갈색 구두, 그것과 같은 구두는 세상에 없었다. dd의 발 모양으로 늘어났고 dd의 걸음걸이 습관 그대로 굽이 닳았으며 반복해 접혔고 주름졌으니까. 그것을 상자에 넣으며 d는 생각했다. 이것을 이 상자에 넣었으므로 저쪽 상자엔 넣을 수 없지. 동시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사물은..... 이 상자에 있는 동시에 저 상자에 있을 수는 없다. 이제 여기 담겼으니 저쪽엔 없다. 여기에 있으면 저기엔 없지. 사물이 그렇지만 구두를 신던 사람은......인간은 사물과는 달라서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을 수 있다고...... 내가 언젠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적어도 들은 적이...... 누군가가 없어져도 그를 기억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여기 없어도 여기 있고......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냐? 사기를 치지 마라...... 인간은 너무도 사물과 같이...... 없으면 없어. 있지 않으면 없고, 없으니 여기 없다......

 

 

 손녀하고 딸년은 내 사는 꼴이 지저분하다고 부끄럽다지만...... 그것이 무엇이 부끄러운가? 내가 아는 부끄러운 것 중에 그런 것은 없어. 산 사람의 살림이 오만 잡종인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몇 년 전만 해도 언제든 수리실 밖으로 나가면 상가 어딘가에 갈 곳이 있었고 방문할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여소녀는 생각했다. 인사도 없이 쓱 들어가서 그거 달라고 하면 그거를 알아듣고 틀림없이 그거를 줄 수 있었던 사람들, 사기꾼 같은 놈들, 진짜 사기꾼들, 그래도 내가 보기에 썩 좋았던 사람들과 다음 생에 또 볼까 내내 재수없어하다가 낯익어버린 인간들...... 오디오 팔던 사람들, 부품상들, 도란스 기술자, 스피커 제조없자, 진짜와 똑같이 로고 라벨을 만드는 기술이 있던 노인들, 다른 기술자들. 그와 같은 공간에서 한 시절을 겪은 사람들. 그들이 다 어디 갔느냐고? 여소녀는 그 질문을 돌이킬 때마다 그들의 부재와 자신의 잔여와 이제 닥쳐올 자신의 부재를 한꺼번에 생각했다.

 

 

 곽정은은 dd와 별로 닮지 않았지만 그가 잠을 잘 때, 눈을 감고 잘 때는 닮아 보일 거라고 d는 생각했다. d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런 식으로 닮았고 아마도 d 역시 부모와 그런식으로 닮았을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산 사람들은, 가장 방심한 얼굴이 닮았다.

 

 

 자기가 속한 체제에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된 나머지 귀순을 결심했다고 하네요.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남쪽의 가요를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 두고 음악이 흐르는 전투기에 실려 북측과 남측의 경계를 향해 날아가던 순간, 그 아득한 허공을 날던 순간의 그가 말입니다.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 겹만을 남겨둔 채 채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왜 함께 오지 않았나.

 

 너의 오디오가 이제 좀 특별해졌느냐고 여소녀는 물었다.

 같은 모델이라도 그 기기를 다룬 사람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고 여소녀는 말했다. 세상에 그거 한 대뿐이니까. 빈티지를 고치려는 사람들은 고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살린다고 말하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수리실 안으로 불어 들었다. 비가 들이치자 여소녀는 창을 닫았다.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유리 벌브 속에 불빛이 있었다. d는 무심코 손을 내밀어 그 투명한 구(球)를 잡아보았다. 섬뜩한 열을 느끼고 손을 뗐다.

 쓰라렸다.

 d는 놀라 진공관을 바라보았다. 이미 손을 뗐는데도 그 얇고 뜨거운 유리막이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통증은 피부를 뚫고 들어온 가시처럼 집요하게 남아 있었다. 우습게 보지 말라고 여소녀가 말했다. 그것이 무척 뜨거우니 조심을 하라고.

 

 -> 황정은이 서울시 강서구와 종로구 세운상가로 돌아왔다. 

 -> 83년에 이웅평이 북에서 올 때, 우리 엄마는 전쟁나는 줄 알고 나랑 내 동생 불쌍해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AND

어느 개의 일기

좋아 죽겠다고 쭉쭉 빨아댈 때는 언제고
왜 나를 처음 와 본 휴가지에 두고 갔나
유기(遺棄)라는 어려운 말 쓰지 마라
당신들이 어떤 핑계를 대든 나는 버려진 것
이대로 가엾어져 결국 굶어 죽게 되는 것
버려진 오디오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게 되는 것 ​
당신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무엇도 사랑할 수 없다
AND

나이

​나도
내 앞에 사람도
지금은 온화한 나이
뱃속에선 여전히 그때처럼 뭔가가 끓어 오르는데
태연한 얼굴로 마주보고 앉았다
불꽃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차가움도 남지 않있다
건조한 말빛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차가운 술을 먹는다
뱃속이 식는다
나도
당신도
지금은 그런 나이
그때는 언제였을까
AND

바다는 하나

고등어 연어 노르웨이
갈치 아랍에미리트
명태 가자미 러시아
대구 임연수 미국
홍어 아르헨티나
민물장어 캐나다
바다장어 오징어 페루
낙지 베트남
쭈꾸미 태국
문어 베네수엘라
흰다리새우 에콰도르
붉은 새우 중국
날치알 인도네시아
소라 터키

먹는 뱃속은 다 달라도
바다는 하나
AND

좋겠다


주유소 사장들은 기름값 걱정 없어 좋겠다
편의점 사장들은 담뱃값 걱정 없어 좋겠다
김밥천국 사장은 백 가지 음식 중에 골라 먹을 수 있고
옷가게 사장은 매일 새옷을 입을 수 있어 좋겠다
​약국 사장은 몸이 아파도 걱정이 없고​
병원 사장은 입원비 걱정이 없어 좋겠다
건물주는 임대료 걱정 없고
회장님들은 최저임금 걱정 없어 좋겠다

​고깃집 사장은 라면있는 집이 부럽고
반찬가게 사장도 저녁 반찬 거리가 걱정인데

​​재벌 총수는 걱정도 부러운 것도 없고
세상을 올려다 볼 일도 없고
문어발로 세상을 꽉 붙잡고 있으니

씨팔, 세상에서 제일 좋겠다
AND

토성의 고리 - 제발트

2018. 8. 7. 08:16
34p~
브라운에게는 우리가 단 하루라도 존속하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는 스러지는 시간의 아편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쓴다. 겨울의 해는 빛이 얼마나 신속하게 재 속에서 사라지는지, 밤이 얼마나 재빨리 우리를 에워싸는지 보여준다. 한 시간, 한 시간이 계산서에 더해진다. 시간조차도 늙는다. 피라미드, 개선문, 오벨리스크 따위는 녹아내리는 얼음으로 만든 탑에 불과하다. 천공의 형상들 속에서 한자리를 차지한 것들조차도 영원히 영예를 누릴수는 없다. 니므룻(바빌로니아의 왕으로 사후에 신격화되어 오리온 별자리에 자리했다고 여겨졌다)은 오리온 별자리 속에서 사라졌으며, 오씨리스(고대 이집트의 신으로 씨리우스별로 상징되었다)는 씨리우스별 속에서 사라졌다. 위대한 종족보다 더 오래 산 떡갈나무는 세 그루도 못된다. 어떤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았다고 해도 기억될 권리를 확보했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최상의 인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누가 알겠는가. 양귀비 씨앗은 어디서나 꽃을 피우지만, 어느 여름날 느닷없이 비참함이 눈처럼 우리 위로 내려오면 우리는 이제 잊혀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 제발트 번역의 느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암튼 좋네.

AND

끝났다는 생각

덥다. 다 끝났다는 생각이 머릿속 가장 꼭대기에서 빙글빙글 돈다. 80억 인구가 석유시대 이전으로 돌아갈 리도 돌아갈 수도 없다.
최저임금과 자영업자 뉴스가 계속 쏟아진다.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줄 방법은 없다. 젊은이들 일자리는 말할 것도 없다. 한반도 남쪽의 5000만 인구가 다들 적당한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난민 기사에 진짜 악의를 가지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어떤 일들에 대해서 근거나 확인도 없이 맹신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
체제의 문제가 아니다. 개개인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이렇게 되버린 것이다.
내일 출근을 위해 강릉에서 정선 오다가 작은 산불을 발견했다. 반바지 입고 산에 올라가서 현장 확인하고 내려오니 많이 더웠다. 차를 몰고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컵얼음과 콜라를 샀다. 이렇게 또 플라스틱 쓰레기가 생겼다. 정선에 오기 위해서 자동차를 탔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5000만 명이 대략 이렇게 살고 있다.
'작은것이 아름답다' 에서 모두가 플라스틱을 먹고 있다.는 글을 읽었다. 맞는 말이다.
석유 문명이 끝날 때까지 누릴 수 있는 최선을 누리고 사는 게 맞을까?
지금의 플라스틱 문명이 더위나 추위로 끝날 것 같다. 몇 십년 후에는 전 인류의 몇 십 퍼센트가 사라질 거린 얘기가 코 앞에 다가온 것 같은 더위다.
덥다.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끝났다는 생각 끝에 당신이 있다.
함께 있는 우리가 있다.
그게 유일한 낙관이다.
AND

옥수수

피서지 노점상에서 할머니가 삶아 파는 한 개 천원짜리 옥수수를 먹고
맛있다. 옥수수가 이렇게 맛있는 것이었나 생각했다면
당신은 철이든 것이다
처마에 매달아 잘 말린 옥수수 낱알을 하나하나 뜯어내고
모종을 만들어 밭에 심고
제초제도 뿌리고 거름도 줘가며 한 줄기에서 두 개의 옥수수가 달리도록 키우고
땡볕 아래서 수확해서 솥을 걸고 불을 피워 쪄내는 옥수수의 맛을 알면
솥뚜껑을 열자마자 여름안으로 퍼져 나가는 연기의 열기를 알면
옥수수 한 알에서 시작해서 한 자루에 수백개의 씨앗이 달리는
이 지독한 순환을 깨달으면
당신은 철이든 것이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든
옥수수 맛을 알 때부터 당신은 철이든 것이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