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돈이 많이 필요한 최고 풍요의 시대를 갱신하며 살고 있다.
물자가 풍족하지 않던 시절에는 많은 돈(수입)이 필요 없었다. 물자는 편리와 같은 말이다.
먼 과거까지 가지 않고 지금과 1980년대만 비교해 보더라도 명확하다. 에어컨, 자동차처럼 덩치가 큰 것 뿐 아니라 먹을 것도 지금만큼 쉽고 다양하지 않았다. 만든 김치를 사서 김치냉장고에 넣는 것과 배추를 사고 양념을 준비해서 김치를 담그고 독에 묻는 것의 차이랄까.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으면 단조롭지만 끈기있는 생활을 하게 된다. 아내랑 같이 섬에 살 때는 어느정도 그런 생활이 가능했다. 밥을 사 먹을 곳도 없고 돈도 없으니 해 먹는 수 밖에 없었다. 농업으로 돈이 생기지 않으니 조개를 잡을 수 밖에 없었다.
겨울밤 아내랑 마주보고 앉아서 콩이랑 팥이랑 골라내던 때가 좋았다. 집 앞 텃밭에서 꿈지럭거리면서 뭔가를 하는 아내 옆에 고양이 망고가 찰짝 붙어있던 시절이 지나간 날들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한 번 길들여진 편리에서 의식적으로 불편으로 가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다. 당장 날이 덥고 집에 에어컨이 있는데 어떻게 안 틀고 버티겠나.
너무 자기 잘났다는 마음이 많이 투영됐다 생각해서 '자발적 가난'이란 말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천만금이 있어도 그걸로 뭘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사는 것이 진짜 자발적 가난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도시 직장생활자로 살고 있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많은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 몸을 바지락거리면서 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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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생각

아침부터 매미가 우니
제법 여름같다
아, 따뜻하다.
감탄으로 여름을 넘기는 사람들
겨울에도 처지가 바뀌지 않을 사람들
누군가는 날씨 때문에 죽고
누군가는 자존심 때문에 죽고
다 울고난 매미는 죽어 나무에서 떨어질 것이다
그 와중에도 떵떵거리며 살고있는 사람들 사람들
새들도 숨어버린 더위 한 복판에 서서
내 처지가 매미보다 나은지 생각하며
싸구려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씨발.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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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당신이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하면
우리들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젓는다
당신이 열변을 토할 때
우리들은 고개만 끄덕여준다
당신이 술에 취해 외롭다고 소리를 질러도
우리들은 개가 짓는다 외면한다
당신이 누군가와 시비가 붙었을 때
우리들은 지랄병이 도졌다 생각한다
당신이 우리곁을 떠날 때
우리는 겉으로도 웃고 비로서 속으로도 웃는다
누구도 당신을 알아주지 않는다
누구도 당신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당신이 누군가를 우습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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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100km

고속도로 위에선 과거가 시속 100km로 뒤로 밀려난다
과거는 뜨겁고 미래는 차갑다
시속 100km
단속에 걸리지 않는 속도
내 육체를 뛰어넘는 속도
1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속도로
먼저 도착한 미래에서
조수석에 앉은 당신의 차가운 혀를 내 혀로 감싼다
얼어붙지 않도록
아니, 하나로 얼어붙도록
석양을 따라 뒤쫓아 오는 과거를 바라보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시속 100킬로미터의 사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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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탕을 먹다

입안에서 닭뼈가 구른다
한번에 살을 발라내지 못하자
닭뼈를 굴리며 생각이 생겼다
엄마말 잘 들으면 그런것처럼
입안의 닭뼈도 피가 되고 살이 될까
닭뼈가 내뼈가 되고
닭살이 내살이 되고
똥이 되고 흙이 되고
유식한 말로 순환이라고 부르고
손가락으로 원을 그려본다
누군가는 삼계탕을 먹다가 닭 목뼈가 목에 걸려 죽기도 할 것이다
입안에서 또 다른 닭뼈가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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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내린다 

커피를 내린다
저녁마다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커피콩을 갈고
내린 커피를 밥사발에 따른다
여기까지만 의식이다
내 베란다에서 내 담배를 피우며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신다
밥사발에
커피는 아직 내 것이 아니다
술에 취한날도
저녁밥을 굶은날도
커피를 내린다
밥사발에
저녁마다
내 것이 아닌 커피를 미시고
내가 되는 꿈을 꾼다
AND

머리를 긁다
머릿결이 시작되는 정수리에 딱지가 앉은 걸 알았다
딱지를 뜯어내자 몸 가장 높은 곳에서 피가 솓아 올랐다
퐁퐁퐁 퐁퐁퐁
급한 마음에 먹고 있던 수박씨로 구멍을 막았다
잊고 살다가 그 자리에 싹이 돋은 것을 알았다
머리를 감고 밥을 먹으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줄기가 굵어지고 잎이 무성하더니 꽃이 피고 수박이 달렸다
그제서야 머리 꼭대기에 식물 하나씩 키우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 사람은 소나무를 키우는군
나도 나무를 키웠으면 좋았을텐데
저 고추는 어떻게 겨울을 날까
내 수박도 얼어죽지 않으려면 털모자를 준비해야겠군
세상엔 이름 모를 식물들이 사람 숫자 만큼이나 많군 
다들 생활이란 명분으로 정수리에 구멍 하나씩은 파고 있지
안심한 나는 주먹만큼 커진 수박을 툭툭 쳤다
퉁퉁퉁 퉁퉁퉁
기분좋은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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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김치찌개를 먹었다
한 번 먹을 만큼 남았다
여름 가스렌지 위에서
냄비에 담긴 채 김치찌개의 부패가 시작된다
김치는 만들어지는 순간 부패하기 시작한다
배추는 밭에서 잘라지는 순간 부패하기 시작한다
찌개에 들어간 돼지고기도 죽어지고 토막나 부패한 것이다
다른 재료들도 마찬가지다
먹고 남은 찌개는 냉장고에 두어도 부패한다
끓이고 끓여도 결국은 부패한다
부패는 썩는다와 같은 말
만물이 썩어가는 세상에서
점심을 같이 먹은 우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썩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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