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에 아침부터 늦게까지 아버지랑 함께했다. 아버지는 장기요양보험에서 인지지원등급을 받았다. 등급서류를 실수로 버린 줄 알았는데, 옷장 안 깊이 둔 것이었고 그러는 바람에 찾느라 애 먹었다. 치매약은 네 달치를 받아왔고 주간보호시설(데이케어센터) 입소 계약서를 썼다. 입소를 위한 건강검진을 받았고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증명하는 가족관계 증명서를 뗐다. 이리갔가 저리갔다 하는 바람에 많이 지쳤다.

나도 지쳤는데, 아버지도 지쳤을 것이다. 어김없이 함께 순댓국을 먹고 아버지 약통 28칸에 약 일곱 알씩 넣으면서 ‘잘하고 있다’는 얘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 반복이 약간 지겹기도 한데, 아버지는 외로운 삶에 아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는 일이 좋다. 병원에 갈 일이 없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아버지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순댓국 말고 다른것들을 아버지랑 함께 먹고 싶다.

2014년 12월, 섬 생활 정리하고 강릉으로 이사오기 전에 아버지 집에 한 달 정도 머물렀었는데, 아버지 생일에 고추잡채 만들어서 아내, 나, 아버지 이렇게 셋이 먹었다. 나는 술 안 먹고 아버지 소주 한 병 따라드렸다. 그날이 아버지 온전하던 시절에 함께 밥 먹은 마지막 날이고 아버지한테 처음이지 마지막으로 술 따라드린 날이고 내가 먹을거 만들어 드린 유일한 날이다. 그때로부터 6년이 넘게 지났다. 허망하다.

아버지는 다음주부터 일주일에 세 번, 한달에 열두번 데이케어센터에 갈 것이고 센터에 가는 날은 우리 아버지 오늘은 뭘 드시나 걱정 안해도 된다. 장기요양보험에서 월 597,600원을 지원받고 본인 부담금 40% 감경대상자로 센터이용에 대한 본인부담율을 9%다. 밥값 10,000원 지원대상이 아니지만 하루에 14,000원 정도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숫자로 계량되는 세계, 숫자는 질서, 어떤 질서가 있는 세계, 숫자가 주는 편안함이 있다.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좋지만 앞으로는 복지시스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될 것 같다.

15일에 검사받은 건강검진 증명서랑 코로나 음성확인서 원격으로 떼느라 애 먹었다. 나는 수화기 너머로 애먹었지만 당사자인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답답했을 것이다. 아버지 수고했어요.

지쳤다와 지겹다와 지루하다
지쳐서 지겹고 지겨우니 지루하다
몸이 지쳤지 아버지한테 지쳤던 건 아니다. 미치도록 지겨운 건 아직 없다. 다행이라 생각하자.

아버지랑 별개로 요즘 전반적으로 지겹고 지루하다. 지루할 틈도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배부른 소린가? 오래 살았다,는 느낌은 아니고 충분히 많이 살았다는 느낌이다.

치매약 받아서 집에 가는 길, 약국 근처에 먼저까진 안 보이던 커피집이 생겨서 아버지랑 2,800원짜리 라떼를 한 잔씩 마시면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열영합발전소 굴뚝을 보면서 추운날은 연기가 더 하얗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잠깐 멈춰서 굴뚝 사진을 찍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기다렸다가 함께 좌측으로 코너를 돌아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 장면이 그림처럼 기억에 남았다. 커피가 맛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자.

아버지, 잘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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