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오후에 배달되는 한겨레 신문을 저녁 작업회의가 끝나고 읽는다.
5월 초의 어느 토요일자 '디아스포라의 눈'에서 이런 대목을 읽었다.

 일전에 확인할 게 좀 있어서 나의 옛날 저서를 찾아내 편친 적이 있다. <민족을 읽는다>라는 작은 책이다. 그 책 마지막 장을 무심코 읽어가다가 다음과 같은 한 구절에 눈이 멈췄다. "나라는 인간이 올해 벌써 42살이 됐습니다....."
 나는 들었던 책을 내려놓고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58살이다. 말하자면 그 책은 쓴지 15~6년이나 된 책이었다. 새삼스럽게도, 마치 진귀한 발견이라도 한 양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어떤 감회를 느끼게 될까? "앞으로 20년은 더 살아야지"라거나 "여든살까지는 살아야지"하는 식으로 생각할까? 그렇다면 나는 보통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때 인생이 끝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것이 그때 내 마음을 채운 감회였다. 42살이었을 때가 행복의 절정기였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전혀 쓸모없었다는 얘기도 아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는 거라면, 설사 그때 인생이 끝났다고 해도 그뿐, 별로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죽는다'는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봄이 한창 무르익고 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서경식 선생의 아름다운 글이다. 원문은 여기로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53952.html

 내가 사랑하는 그르니에의 글 중에 이런 것이 있다.

 ...... 그리고 우리는 그 술집의 종업원과 함꼐 최근의 항공기록에 대해서 잡담을 나눈다. 그 종업원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어느날이고 마땅히 죽으리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다.(그런데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섬'의 <케르겔렌 군도> 중에서

 이 대목을 예전에 올린적 있는 '지중해의 영감'의 한 대목과 붙이면 이해가 간다.

 만일 인간이 어떤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그가 풍경보다 훨씬 더 멀리있는 죽음을 늘 자신의 배경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를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존재하는 자신의 최후에 대한 첨예한 직감만이 오로지 욕망에 한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오늘자 경향 신문에는 <다케시의 생각노트>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죽음에 대한 기타노타케시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생사 문제? 다케시의 유년과 청년기는 "죽는 것이 무서워 미칠 것 같던 시기"였다. 친구와 지인의 죽음이 천국도 지옥도 없이 그저 없어질 뿢이며 사람들 기억에서 너무나 간단히 지워지는 걸 보며 자신의 죽음도 두려워 한다. 이런 두려움은 인기 절정의 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면서 해소된다. "(사고를 겪고 나서) 운명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저 담담하게 언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얼마전에 노무현씨가 자살을 했다. 변산에서야 그냥 그런일이 있었나 보다 생각하면서 모내기에 집중하면 될 일이지만 서울에서는 난리가 난 듯하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는 처지이지만 지후에게 들은바로는 유서에 "삶과 죽음이 하나의 조각과 같다"는 내용을 적었다고 한다.

 다 비슷한 맥락인 것도 같은데, 서경식 선생의 글에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 선생의 책을 한 권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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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의 풀베개의 첫 구절을 정리해 놓은 것을 찾기 위해 옛 노트를 뒤적거리다가 엉뚱한 걸 찾아냈다.
2005년의 기록인 것 같다. 당신에 무척 좋게 읽었었다.

인간은 자기 이미지 외에 아무것도 아냐...............중략.............. 그렇지만 나의 자아와 타인의 자아 사이에 눈이라는 매개를 통하지 않는 직접적인 접촉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속에 비칠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불안한 탐색을 빼고서 사랑을 생각한다는게 가능한 일인가? 타인이 우리를 보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거라구.

투쟁이란 자신의 의지를 타인의 의지에 대립시키는 것을 의미한다..........중략..........어떠면 당신은 누군가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은 이따금 끔찍할런지 몰라도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행복(혹은 사람, 정의 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름답다. 하지만 당신이 당신의 노력을 투쟁이란 말로 지칭하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곧 당신의 귀중한 노력 안에 누군가를 땅바닥에 쳐박아 버리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음을 함축한다. 무엇을 위한 투쟁은 무엇에 대한 투쟁과 불가분의 것이며, 투쟁하는 동안 투쟁자들은 언제나 대한 이라는 전치사를 위해 '위한'이라는 전치사를 망각하고 있다.

당시의 정리를 보면 인생을 투쟁의 장이라고 보는 차원에서 '나를 위한 그 무엇에 대한 투쟁'으로 요약했다.
소세키를 인용해서 신년 결심을 적으려고 했는데, 엉뚱한 걸 적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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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통영(統營) 2

2008. 12. 14. 20:13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가깝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동백(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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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 년래의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부활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광장에 대한 풍문도 구구합니다. 제가 여기 전하는 것은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한 우리 친구의 얘깁니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새벽', 1960년 10월 -

 61년판 서문도 좋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 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혈거인의 동굴로부터 정신병원의 격리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밀실이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그곳에 이르는 길에서 거상(巨象)의 자결을 목도한 사람도 있고 민들레 씨앗의 행방을 쫒으면서 온 사람도 있다.
 그가 밟아온 길은 그처럼 갖가지다. 어느 사람의 노정이 더 훌륭한가라느니 하는 소리는 아주 당치 않다. 거상의 자결을 다만 덩치 큰 구경거리로밖에는 느끼지 못한 바보도 있을 것이며 봄들판에 부유하는 민들레 씨앗 속에 영원을 본 사람도 있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 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이명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떻게 밀실을 버리고 광장으로 나왔는가. 그는 어떻게 광장에서 패하고 밀실로 물러났는가.
 나는 그를 두둔할 생각은 없으며 다만 그가 '열심히 살고 싶어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가 풍문에 만족하지 않고 늘 현장에 있으려고 한 태도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진 것이다.           -1961년 2월 5일 - 

 그렇지만 초판 서문이 더 좋다.
 지후가 아니었으면 '인생을 풍문듣듯 산다는 건 슬픈일입니다.'라는 이 멋진 문장을 다시는 들여다보지 못할 뻔 했구나. '매트릭스'도 있고 'CCTV'영화 번역 건도 있지만 요즘은 풍문을 듣듯 산다기 보다는 풍문이 뭔지도 모른채(혹은 조작된 풍문만을 듣고)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광장으로 뛰쳐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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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읽고 있다. 마르코폴로가 쿠빌라이칸에게 묘사했을 도시들의 이야기다. 읽고 있는 중이지만 무척 좋은 부분이 있어서 통으로 올린다.

제 1 부, 도시와 욕망2
남쪽으로 걸어간 여행자는 사흘째 되는 날 해질 무렵, 한 지점에서 똑같이 뻗어나간 운하들로 촉촉이 젖어 있고 연이 날아다니는 도시 아나스타시아를 만납니다. 저는 이제 이 도시에서 거래를 하면 이문이 남는, 마노, 줄마노, 녹옥수와 다양한 종류의 옥수 같은 상품들을 열거하려 합니다. 잘 마른 벚나무 장작으로 피운 불 위에서 구워 오레가노를 풍성하게 뿌린 황금빛 꿩고기의 맛을 칭찬할 수 있을 겁니다. 정원의 연못에서 목욕을 하는 여인들을 본 것과,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그 여인들이 지나가는 여행객에게 옷을 벗고 물속에 들어와 자기들을 잡아보라며 유혹한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말하다 보면, 저는 폐하께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씀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아나스타시아에 대한 묘사는 고작해야 폐하께서 억눌러야만 하는 욕망들을 한 번에 하나씩 일깨울 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만약 폐하께서 어느 날 아침 아나스타시아의 심장부에서 눈을 뜬다면 모든 욕망이 동시에 잠에서 깨어 폐하를 에워싸 버릴 것입니다. 폐하께 도시는 모든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완전체이며 폐하는 그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도시가 폐하께서 즐기시지 못한 것을 즐기기 때문에 폐하는 이 욕망을 살리고 그것에 만족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사악하고 때로는 선량하기도 한 그런 힘을 매혹적인 도시 아나스타시아는 가지고 있습니다. 마노, 줄마노, 녹옥수를 세공하는 사람처럼 폐하께서 매일 하루 여덟 시간씩 일을 한다면 욕망에 형태를 부여하는 폐하의 노동은 욕망을 통해 자신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폐하는 자신이 아나스타시아 전체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폐하는 그 도시의 노예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만화'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나무 위의 남작'도 얼른 읽어야겠다. 옮겨 놓고 다시 읽는데, 머릿속이 빙빙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구나.... 동료들에게 글 쓰는건 재주가 아니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글 쓰는 건 훌륭한 재주임에 틀림없다. 부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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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니에(Jean Grenier)

2008. 10. 19. 03:02

내 생에 단 두명의 작가가 있다면(조금 극단적이긴 한데...) 그르니에와 사라마구이고, 단 한명의 작가가 있다면 언제라도 자신있게 그르니에 라고 하겠다. 위대한 작가들의 죽음에 대한 통찰을 읽을때, 나는 굉장한 희열을 느낀다. 아까 커피숍에서 한참 수다 떨다가 그르니에 얘기가 나온 김에 올려본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낯선 어느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몹시도 원했었다. 나는 겸허하게, 그리고 가난하게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섬'의 케르겔렌 군도 중에서

'섬'은 전체가 다 훌륭하지만 특별히 케르겔렌 군도 편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측면이 있다. 너무 좋아서 전체를 타이핑 한 적도 있었다. 내 불안의 터널에 출구를 어느정도 보여준 명문이다. 민음사 버전은 친구에게 준 관계로 청하 출판사 버전으로 올린다. 확실히 민음사 김화영선생의 번역이 좀 더 매끄럽지만 같은 맥락이다. '케르겔렌 군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에세이가 아닐까...

 아침이면 산 피에트로 성당에서 그레고리오 미사가 열리고, 저녁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의 온천장에서 음악회가 열린다. 하루 종일 대괴석들의 황홀한 흰빛을 볼 수 있고, 밤새도록 분수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들과 함께 있을 때 오히려 더 많은 외로움을 느낀다.

 '지중해의 영감' 이탈리아.... 에서 

 태양은 아프리카 산 위로 불쑥 솟아올라 사슴 빛깔로 물들이며 하루 종일 머물러 있다. 사람들은 바닷속에 다리가 잠길 정도록 길게 기지개를 켜는 이 짐승과도 같은 빛깔을 애무하고 싶어할 것이다.

 익명의 인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일, 나의 직업, 나의 가족,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를 곧 잊을 수 있을 것이며, 나를 잘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맡아야 할 역할도 없고, 더 이상 일부러 꾸며서 해야 할 어떤 태도도 이제는 없다.

 '지중해의 영감' 북아프리카....에서 

 만일 인간이 어떤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그가 풍경보다 훨씬 더 멀리있는 죽음을 늘 자신의 배경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를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존재하는 자신의 최후에 대한 첨예한 직감만이 오로지 욕망에 한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지중해의 영감' 에서

 지중해의 영감도 누군가에게 줘 버렸는데..기록해둔 노트를 오랜만에 꺼내보니 기록해 두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탈리아 편에서 옮긴 부분이 아까 얘기하고 싶었는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났던 그 대목이다.

 예전에 신대성 군과 그르니에 얘기를 했었는데, 대성군은 그르니에가 제 1세계의 돈 걱정 없는 교수이기 때문에 아름답지만 태평해 보이고 마음속은 나약한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다고 했었다. 나도 어느정도는 동의하지만 그르니에의 글의 훌륭함은 나쁘게 볼 수 있는 모든 방향을 다 취해보아도 바뀌지 않는 그런 차원의 것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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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 노향림

2008. 10. 9. 00:10

    소리     - 노향림 -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 남자친구는 트럼페터입니다.

 조금씩 폐허가 된 生活이 놓여 있지만
 그쪽 벌판을 잘 보지 않습니다.

 저 溫氣를 서로 부비는 풀잎들에게서
 이 마음 끝까지 뻗은 길을 소리들이 가고 있습니다.

 삭은 內衣를 걸친채 그는
 트럼펫 부는 일이 全部였습니다.

 누구든지 꿈을 선택하고
 꿈으로만 자신을 꾸미는 일.
 숲속의 나무들이 그런 일 속에 잔뜩 묻혀 있습니다.

 그가 부는 트럼펫 소리는 하늘에서
 먼저 가 있던 소리를 만나 어깨를
 감싸고 같이 걷습니다.

 북만드는 나무라도 일찍 찍으러 간
 모양입니다.
 내 남자친구는.

성미정 시로 기억하고 있었다니, 나이 먹는게 서럽다.
기억력 감퇴에는 토비콤이라는 약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타를 치는 남자친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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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 서른 살

2008. 9. 23. 10:04

 서른 살  - 진은영-

어두운 복도 끝에서 괘종시계 치는 소리
1시와 2시 사이에도
11시와 12시 사이에도
똑같이 한 번만 울리는 것
그것은 뜻하지 않은 환기, 소득 없는 각성
몇 시와 몇 시의 중간 지대를 지나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

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렷다는 듯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 죽을 때까지 기억난다


나의 악덕 때문에 이 시를 좋아했는데, 달아날 수도 없는 서른이 되어 이 시를 다시 생각해 보니
뜻하지 않은 환기와 소득 없는 각성 쪽이 와 닿는다. 지나간 나의 악덕들은 죽을때까지 기억나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부터의 악덕은 어쩔 수 없는 것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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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인들은 비장애인들이 보지 못하는 독특한 패턴을 읽는다. 그 패턴의 분석을 통해 회사의 이익에 기여한다. 그 대가로 높은 보수와 쾌적한 근무환경을 보장 받는다. 주인공 루는 일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 전체를 하나의 패턴으로 이해하는 자폐아다.(40대이기 때문에 자폐인이라고 하는 게 맞나?) 펜싱 모임의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끼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패턴으로 분석하고 보통의 관계들이란 무엇인지를 궁금해한다. 이 소설은 스스로 극복하는 장애와 같은 고리타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기 보다는 관계에 대한 특별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 특별히 '특별한 주인공'의 고립된 상황과 고립된 정신세계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살인 당할 위험을 이겨내고 담담하게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자폐아 주인공이라.... 무척 좋았다.

109 페이지,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백 년 전, 오십 년 전 등에 우리가 무엇을 알았는지 설명하는 긴 도입부이다. 나는 부모님이 어렸을 때 들었을 법한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무엇을 아는지를 알고 싶다. 아주 먼 옛날, 화성에 운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142페이지, "어둠은 빛이 없는 곳이죠. 빛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이요. 어둠이 더 빠를 수도 있어요-항상 먼저 있으니까요."

362페이지, 나 자신이 지금 외상 후 상태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니, 비록 나는 특별히 스트레스를 받거나 흥분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외상이다. 어쩌면 정상인들은 거의 살해당할 뻔한 몇 시간 뒤에 앉아서 교과서를 읽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러는 쪽이 편안하다. 사실들은 여전히 여기에, 논리적인 순서로 구성되어 사실들을 선명히 드러나게 하려고 애쓴 사람에 의해 씌어 있다. 부모님이 내게, 이 행성에 사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별들은 희미해지지도 다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빛나리라고 말했을 때와 꼭 같다. 나는 내 주위에서는 산산조각난다 하더라도, 어딘가에 규칙이 존재하고 있음이 좋다.

439 페이지, 우리는 언제나 빛 안으로, 다시 밖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밤과 낮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속도이다. 빛의 속도나 어둠의 속도가 아니다. 그가 나를 다치게 하고 싶어 했던 어두운 공간으로 우리를 이끈 것은 돈의 속도가 아니라 나의 속도였을까? 나를 구한 것은 나의 속도였을까?

AND

  우주로 날아가는 방2                       -김경주-
  -새와 휘파람


  밤이 되자 빨랫줄에 앉은 새들이 검은 물을 토하기 시
 작한다

  말더듬이 소년이 지붕 위에 오라가 휘파람을 분다 새가
 허공에 남기고 간 발자국들이 바람에 조용히 부서진다 휘
 파람이 날아간다는 것은 제 영혼의 양떼들이 계절을 옮겨
 날아간다는 거 밤에 지붕 위에 올라간 사람이 부는 휘파
 람은 들리지 않는다 새들이 물고 날아가기 때문이다

  옥상에 널어놓은 이불 속에서 터진 솜들이 양의 내장처
 럼 흘러나와 있다 흰 솜을 뚫고 나온 수백 마리 미색의 벌
 레들이 밤하늘로 탈빛한다 아버지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만큼 사라져가는 것이에요 그런 말 하지 마라 내 양(羊)들
 이 눈물을 흘리잖니 그렇지만 아버지 그건 아버지의 양이
 에요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만큼 사라져가는 것이다라고 생
 각하면 눈물이 난다 봄이면 제 영혼을 조금씩 조금씩 털
 다가 사라져버리는 나비처럼.

  새가 죽은 나비를 물고 산방으로 날아간다




새와 휘파람과 양떼와 나비들이 동시에 날아가고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만큼 이불 속에서 터진 양털 솜 만큼 사라져 가는 좋은 시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참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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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 정호승

2008. 5. 30. 13:00
 미안하다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네가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이 시가 실린 시집을 군대 병원에 있을 때, 읽었다. 당시의 내 처지를 생각해 볼 때, 내가 읽은 가장 훌륭한
시집이라고 생각한 것도 당연하다. 지금 생각해도 무척 좋은 시집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지후를 보면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내가 산과 길을 넘고 지나 지후를 만났더니 내가
넘은 산이 지후의 무릎이었고 내가 그 무릎을 넘는동안 지후는 울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몰랐다는 좋은 시다. 나는 사랑해서 미안한 건 아니고 지켜주고 싶은데, 못 지켜주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고구미군에게 안산행을 제안했다. 제법 괜찮은 제안이었다고 생각한다.
고구미군, 댓글 부탁합니다.
AND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 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네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 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증 가장 깊은 곳에 내려 앉은 물 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타고 흐르는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뭇 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 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하며
  스물 두살 앞에 쌓인 술병 먼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게를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어제 잠깐 짬을 내서 네이버의 공선옥 누나 블로그에 들렀다. 오랫동안 새 포스팅이 없다.
뭐 원래도 뜸하게 업데이트 된다. 예전에 좋게 본 장정일의 시를 복사해 왔다.
장정일은 '충남 당진 여자'라는 시를 썼는데, 장정일을 모르는 건영군은 당진에서 일하게 되었고, 내가 알고 있는 충남 당진에서 난 여자는 방송 작가일을 하고 있다. 시를 읽으면서 사철나무를 머릿속에 그려보지만 잘 그려지지 않는다. 이 시의 포인트는 '사철나무 그늘'이 아니라 '살다가 지친 사람들'에 있어서 그런것 같다. 그렇지만 바빌론 강가에 앉아서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려보면 눈물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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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향 - 정진규

2008. 4. 16. 10:53

자정향/정진규

모든 사물들을 실물크기로 그리고 싶다
내 사랑은 언제나 그게 아니 된다
실물크기로 그리고 싶다  
사랑하는 자정향(紫丁香) 한 그루를 한 번도 실물크기로 그려낸 적이 없다
늘 넘치거나 모자라는것이 내 솜씨다
오늘도 너를 실물크기로 해질녘까지 그렸다  
어제는 넘쳤고 오늘은 모자랐다
그게 바로 실물이라고 실물들이 실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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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 - 물통, 휴가

2008. 3. 7. 00:08

  물통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 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
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휴가

 바닷가에서 낚싯줄을 던지고 앉았다
 잘 잡히지 않았다

 날갯죽지가 두껍고 윤기 때문에 반짝이는 물새 두 마
리가 날아와 앉았다
 대기하고 있었다
 살금살금 포복하였다

 .....
 ....
 ...

 살아갈 앞날을 탓하면서
 한잔해야겠다

 겨냥하는 동안 자식들은 앉았던 자릴 급속도로 여러
번 뜨곤 했다
 접근하느라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미친놈과 같이 중얼거렸다

 자식들도 평소의 나만큼 빠르고 바쁘다
 숨죽인 하늘이 동그랗다
 한 놈은 뺑소니 치고
 한 놈은 여름 속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사람의 손발과 같이 모가지와 같이 너펄거리는 나무가
있는 바닷가에서

 

민음에서 나온 '북치는 소년'
정말 좋아하는 시집인데, 나를 떠날때가 된 것 같다. '물통'같은 시가 시집의 첫 시면 당연히도 멈출수가 없다.
게다가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휴가'를 만나서 굉장히 기뻤다.
역시나 나는 바닷가와 인간, 사람.... 뭐 이런것들에 유독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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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백석-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도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다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新刊書)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世上事)' 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란'이라는 처녀가 그 처녀를 소개해 준 친구에게 시집을 간 일화가 있다고 한다. 백석 시집을 가끔 읽으면 기분이 좋다. 울지는 못하겠고 슬프기는 한데.... 그래서 머릿속의 슬픈 생각들이 자신을 울게 할 것을 생각만하는 마음...
나는 이런 마음이 좋다. 이런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는 백석도 좋다. 흰 바람벽에 글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시로 써 준 백석!

 2007년 2월 24일의 노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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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점은 바로 규칙에 따라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는 데 있다. 결국 당신은 규칙에 따라 살게 된다(이따금, 정확하게, 그것도 지나치리만큼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총괄적으로 그렇게 된다). 납세 고지서들은 납입 기한 안에 내야 한다. 청구서들도 제 날짜에 맞춰서 지불해야 한다. 당신은 신분증 없이는 감히 돌아다니지도 못한다(그뿐인가, 신용 카드 전용의 작은 주머니까지 마련해 가지고 다닌다!.....).
 그렇지만 당신은 친구가 없다.

 규칙은 복잡하고 형태도 다양하다. 직장 근무 외에 꼭 필요한 일은 구매 행위와 자동 인출기에서 돈을 빼내는 일이다(그리고 인출기 앞에서는 줄을 서야 한다). 특히 당신 삶의 다양한 측면들을 관리하는 기관들이 요구하는 온갖 규칙들이 있다. 게다가 당신은 병이 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비용이 들고 새로운 수속절차가 필요해진다.
 한편, 자유 시간이 남아 있다. 무엇을 할까? 자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까? 타인을 위한 봉사 활동에 쓸 것인가? 하지만 타인은 당신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 음악을 들을까? 그것도 한 방법이지만,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음악을 들어도 별반 감동을 못 느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DIY 제품을 사다가 만드는 취미를 갖는 것도 자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것도 점점 더 자주 나타나는 이런 순간들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의 절대 고독, 우주적 공허감, 당신의 존재가 고통스럽고 결정적인 재앙에 다가가고 있다는 예감이 현실의 고통 속으로 당신을 몰아 넣으려고 몰려오고 있는 순간을.
 그렇지만 당신은 여전히 죽을 생각은 없다. -15page-

 결국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히 섹스도 차별화의 또 다른 체계를 보여 준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돈과는 전혀 무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또한 냉혹한 차별 체계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체계의 효과는 엄밀히 똑같다. 무제한적인 경제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섹스의 자유주의는 <절대 빈곤> 현상을 낳는다. 어떤 이들은 매일 사랑을 하는데, 어떤 이들은 평생에 대여섯 번뿐이다. 어떤 이들은 열댓 명의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여자가 한 명도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장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해고가 금지되어 있는 어떤 경제 체계에서는, 각자 어느 정도 자기 자리를 찾는 데 성공한다. 간통이 금지된 섹스 체계에서, 각자는 어느 정도 자기 침실 파트너를 찾는 데 성공한다. 완전히 자유로운 경제 체계에서, 어떤 이들은 정말로 다양하고 짜릿한 성생활을 즐기지만, 다른 이들은 자위 행위와 외로움 속에 늙어 간다. 자유주의 경제는 투쟁 영역의 확장이다. 그 사회의 모든 연령층, 각계 각층으로의 확장이다.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섹스는 투쟁 영역의 확장이다. 그 사회의 모든 연령층과 각계 각층으로 자신의 투쟁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11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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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 특급열차

2007. 8. 30. 22:46
 세풀베다는 '소외'를 재미있게 읽어서 좋다고 생각하는 작가다. 이 책까지 읽고나니

장편들을 좀 찾아서 읽고 싶어졌다.

 '돌아오는 길의 노트' 중에

 그런데 <콜로노> 호를 묶어 두었던 밧줄이 풀렸지만 선박의 출입문이 닫히지 않는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승무원들이 하얀 침대 시트처럼 창백한 노인과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다.
 노인은 자신이 누울 관을 가져가길 고집하고, 승무원들은 액운이 따라 붙는다고 거절하는 모양이다. 노인은 60킬로그램의 화물은 들고 갈 권리가 있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반면, 승무원들은 그 관을 버리지 않으면 승선을 거부하겠다고 협박한다. 노인은 암에 걸려있지만 아직은 숨을 쉴 권리가 있다고 목청을 높이는데, 선장이 끼어들면서 합의점에 도달한다. 관을 가져가는 것은 허용하지만 여행 중에 죽어서는 안 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이다. 그 징표로 상호간에 악수가 교환된다. 노인은 관 위에 앉는다.
 


 이런 마음이 남아메리카의 마음일까? 참 좋다. 얼마전 신애랑 얘기할 때 파타고니아 얘기
하다가 <소외>에 파타고니아 얘기 나왔던 것 같아서 엉뚱하게도 <소외>에 나왔던
목이 잘리고 12 걸음을 걸은 선장 이야기를 했는데, 신애는 아마 <파타고니아 특급열차>를 읽었던 거겠지? 괜히미안하군!

 라디오 벤티스케로의 거짓말 경연대회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세상 끝의 라디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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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경험만 소설로 쓰는 작가! '단순한 열정'을 단순한 열정을 가지고 재미있게 읽었었다.

 단문들을 읽는 것은 즐겁다. 뭐 썩 단문은 아니었는지도...

 그들의 정신 속에 부재하는 질서를 외부에서라도 바로 잡으려는 생각

 하루에도 수차례씩 짐들을 꾸렸다 풀렀다 다시 꾸리시는 할머니가 생각난다.

 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듯이 어머니에게 아무것이나 다 이야기했다.

 내가 이러지 않았던가.... 어쨌거나 할머니가 보고 싶다.

 할머니는 나를 손자로 늘 생각했던 것이리라.. 뱃속이 쓰겁다.

 아침부터....

20070824 이 책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더 많이 생각날 것 같다. 그래서 아직 누구에게
주지 않고 가지고 있다. 2005년 여름 할머니랑 같이 놀았을 때가 할머니와 가진 유일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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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진은영-

2007. 8. 24. 23:00

 고양이는 지붕의 알리바이다
 지나가는 고양이를 움켜쥐고 지붕의 붉은 울음이 솟아났다
 벨벳의 검은 꼬리가
 지붕의 등을 오래오래 어루만졌다
 죽은 장미를 버렸다 항아리의 고인 물을 따라
 붉게 떨리던 시간의 한때가 하수구 속으로 흘러갔다
 장미는 항아리의 알리바이다
 크고 검은 장화속에서 흰 발이 걸어나왔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한밤중에
 빈 항아리를 힘껏 껴안았다
 내가 부서졌다






-> 붉은 지붕! 붉은 장미 검은 하수구 흰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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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앞을 지나다가 내가 한 이야기다.

이모도 그렇다고 했다. 학교 다닐 때 벌판이었던 그 동네가 지금은 온통 아파트다.

뭐 내가 사는 동네도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온통 벌판이었더랬다. 코스모스 벌판

그런데 지금은 코스모스는 한 송이도 찾아볼 수 없다.


   역전 이발/문태준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 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 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빛이 살고 있고
 말라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느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옛날 국수 가게/정진규

햇볓 좋은 가을날 한 곡목길에서 옛날 국수 가게를 만
났다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널듯 국숫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
이라고 했다 백합꽃 꽃밭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
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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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0

2007. 8. 24. 22:32

 입추가 지나자마자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분다. 아직 말복은 안지났을텐데...ㅋㅋ


   우리들의 양식                 -이성부-


모두 서둘고, 침략처럼 활발한 저녁
내 손은 외국산 베니어를 만지면서
귀가하는 길목의 허름한 자유와
뿌리 깊은 거리와 식사와
거기 모인 구릿빛 건강의 힘을 쌓아둔다.
톱날에 잘리는 베니어의 섬세,
쾌락의 깊이보다 더 깊게
파고들어 가는 노을녘의 기교들.
잘 한다 잘 한다고 누가 말했어.
빛나는 구두의 위대를 남기면서
늠름히 돌아보는 젊은 아저씨.
역사적인 집이야, 조심히 일하도록.
흥, 나는 도무지 엉터리 손발이고
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
해머 소리, 자갈을 나르는 아낙네가 십여 명,
몇 사람의 남자는 철근을 정돈한다.
순박하고 땀에 물든 사람들
힘을 사랑하고, 배운 일을 경멸하는 사람들,
저녁상과 젊은 아내가 당신들을 기다린다.
일찍 돌아간다고 당신들은 뱉어내며
그러나 어딘가 거쳐서 헤어지는
그 허술한 공복
어쩌면 번쩍이는 누우런 연애.
거기엔 입, 입들이 살아 있고 천재가 살아 있다.
아직은 숙달되지 못한 노오란 나의 음주,
친구에게는 단호하게 지껄이며
나도 또한 제왕처럼 돌아갈 것이다.
늦도록 잠을 잃고 기다리던 내 아내
문밖에 나와 서 있는 사람
비틀거리며 내 방에 이르면
구석 어딘가에 저녁이 죽어 있다.
아아, 내 톱날에 잘리는 외국산 나무들.
외롭게 잘려서, 얼굴을 내놓는 김치, 깍두기,
차고 미끄러운, 된장국 시간.
베니어는 잘려 나가고
무거운 내 머리, 어제 읽은 페이지가 잘려 나간다.
허리 부러진 흙의 이야기
활자들도 하나씩 기어서 달아나는
뒹구는 낱말, 그 밥알들을 나는 먹겠지.
상을 물리고 건방진 책을 읽기 위하여
나는 잠시 아내를 멀리하면
바람이 차네요. 그만 주무셔요.
퍽 언짢은 자색 이불 속에 누워
아내는 몇 차례 몸을 뒤채지만
젊은 아내여 내가 들고 오는 도시락의 무게를
구멍 난 내 바짓가랑이의 시대를
그러나 나는 읽고 있다.
모두 서둘고, 침략처럼 활발한 저녁
철근공, 십여 명 아낙네, 스스로의 해방으로 사라진 뒤,
빈 공사장에서 녹슨 서풍이 불어올 때
나도 일어서서 가야 한다면
계절은 몰래 와서 잠자고, 미움의 짙은 때가 쌓이고
돌아볼 아무런 역사마저 사라진다.
목에 흰 수건을 두른 저 거리의 일꾼들
담배를 피워물고 뿔뿔이 헤어지는
저 떨리는 민주의 일부, 시민의 일부.
우리들은 모두 저렇게 어디론가 떨어져 간다.
AND

리스본쟁탈전

2007. 8. 24. 22:29
그럼 그냥 듣기만 해요, 내가 선생님한테 전화한 건 외로웠기 때문이에요, 선생님이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선생님이 내 건강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리고. 마리아 사라. 내 이름을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아요. 마리아 사라, 난 당신이 좋아요.  긴 침묵이 흘렀다.그런가요. 정말이에요. 그 말을 하려고 뜸을 참 많이도 들였네요. 어쩌면 절대 말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왜요. 우린 서로 달라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어요. 선생님과 내 세계의 차이점에 대해 선생님이 뭘 알아요. 짐작하고 관찰해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는 있죠. 그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옳은 결론을 내릴 수도 있고, 틀린 결론을 내릴 수 도 있어요. 맞아요, 지금 나의 가장 큰 실수는 당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거예요. 왜요. 난 당신 사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혹시 당신이. 결혼했냐고요. 예,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약속한 사람이 있냐고요, 이건 구식 표현이지만.  예. 뭐, 내가 이미 결혼했거나 약혼했다면, 선생님이 날 좋아하지 않게 될까요. 아뇨. 만약 내가 정말로 누군가와 결혼했거나 약혼했다면, 선생님을 좋아하지 말아야 하나요, 내 마음이 그런데도. 잘 모르겠어요.그럼 내가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걸 선생님도 알고 있군요. 긴 침묵이 흘렀다.그런가요. 예, 그래요. 저기요, 마리아 사라. 얘기하세요, 라이문두, 하지만 먼저 말하는데, 난 삼년 전에 이혼했고, 석 달 전에 남자와 헤어진 후로 아직 아무도 사귀지 않았어요, 아이는 없지만 무척 아이를 갖고 싶어요, 지금 결혼한 오빠와 같이 살고 있는데, 아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내 올케예요, 어제 당신 집에서 내 전화를 받은 사람이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돼요, 그 여자는 당신 파출부죠, 자, 교정자 씨, 이제 말해도 돼요, 내가 이렇게 성질을 부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너무 기뻐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그런 거니까. 왜 나를 좋아하는 거죠.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그냥 선생님이 좋아요. 그럼 일단 나를 알고 나면 날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그런일이 가끔 일어나기도 하죠, 사실, 아주 자주 일어나요. 그래서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로를 아는 데는 시간이 걸려요. 난 당신이 좋아요. 난 그 말을 믿어요.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문장을 쓰는 법도 내용도 다 너무 좋다. 돌뗏목 때 처럼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좋았다고 할 순 없지만 정말 대단한 작가다. 부러워만 하는 내가 부끄럽기도 하지만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사라마구씨. 아직도 '히카르도 헤이스가 죽은 해'가 번역되길 기다리면서.....2007년 3월

AND

야채사 - 김경미

2007. 8. 24. 22:26

 야채사(野菜史) /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하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어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


오랜만에 김경미 시인 어딘가에 댓글을 달았던 마지막 연... 좋다!

무덤들마다 감자꽃 수북한 그림이 떠오른다.

way가 꼭 읽고 뭔가 느꼈으면 해서 올렸던 시였는데~~

AND

 

라펭 아질에서 / 박정대 

당신 이번 여름에 텅 빈 파리로 와요 몽마르트에 있는 라펭 아질로 와요 지나간 샹송들을 들을 수 있는 라펭 아질로 와요 원래는 카바레 드 자사생으로 불리던 곳 암살자의 주점에서 나 당신을 기다려요 당신 이번 여름에 카바레 드 자사생으로 와요 와서 삶의 두통들을 모두 암살해 버려요 당신의 멋진 덧니로 그것들을 다 암살해 버려요 그리고 밤새 우리 죽도록 사랑을 나눠요 사랑한다는 건 함께 고요히 죽어간다는 거 아마 밤새도록 나는 당신을 죽일 거예요 내 거친 수염으로 당신을 암살할 거예요 웃지 말아요, 당신 추억이 고통스럽다면 추억을 암살하러 와요 당신은 나를 죽이고 나는 당신을 암살하겠지요 아무도 모르게 우리 암살자의 주점에서 만나요 당신은 사랑의 맹독으로 나를 암살해 줘요 나는 밤새도록 당신을 만지고 그러면 당신도 밤새도록 나를 만지겠지요 그리고 우리 그냥 서로에게 암살당해요 우리가 그렇게 죽는다면 그건 암살자의 주점 탓이지요 라펭 아질이든, 카바레 드 자사생이든 당신을 만나서 당신을 암살하고 싶어요 그리고 죽은 당신의 귀에 대고 오래도록 달콤하게 사랑한다고 속삭일래요 암살자의 주점으로 어서와요, 당신 암살자의 주점에서 나 당신을 기다려요 당신 내 취향이에요, 어서와요, 당신 이미 죽은 당신, 내가 죽인 당신 다시 죽이고 싶은 그리운 당신


어쩌다보니 박정대의 시집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하나씩 풀어줘야지~~

AND

어젯밤 'NHK에 어서오세요' 만화책을 읽었다. '남의 눈에 나쁘게 보이는 것이 싫어서 밖엘 나가지않는다'라... 비약일 수도 있지만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

게다가 오늘 연이어 읽기 시작한 소설의 초반에

'나는 남들에게 나를 보이려고 애쓴다. 밖에 나갔다가 목이 마르지도 않은데 주스를 살 때가 있다......몇 달 전에 신문에서 광고를 하나 봤다. "데생 수업에 누드모델 구함. 시간당 15달러." 너무 좋은 내용이었다. 이게 진짠가 싶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쳐다본다니.

다 읽지는 않았지만 다시 생각할 수 있게된 죽음에 관한 구절

'그후 나는 나나 부모님 중 누가 죽을까 봐 두려웠다. 어머니가 가장 걱정되었다. 어머니는 우리 세계의 축이었다. 구름 속에서 인생을 보내는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이성이라는 냉정한 힘으로 이 우주를 돌렸다. 어머니는 모든 논쟁의 재판관이었다. 어머니가 한마디라도 인정하지 않는 짓을 저지를라치면 우리는 구석에서 울면서 닥쳐올 순례의 길을 꿈꾸었다. 그런데도. 입맞춤 한 번이면 우리는 다시 왕자가 되었다. 어머니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주인공은 죽는 것이 무엇인지 9살에 처음 이해했다는데,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우주와 어머니와 죽음을 아우르는 구절이었다. 좋았다.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폴 오스터의 '리바이어던'이 생각났다. way는 어떻게 신랑의 작품을 영화로 만든 것만 보고 폴 오스터를 떠올렸을까? 멋진데...

AND

겹 - 이별률-

2007. 8. 24. 22:17
겹   -이병률-

 나에겐 쉰이 넘은 형이 하나 있다
 그가 사촌인지 육촌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모른다

 태백 어디쯤에서, 봉화 어디쯤에서 돌아갈 차비가 없다며
 돈을 부치라고 하면 나에게 돌아오지도 않을 형에게
 삼만원도 부치고 오만원도 부친다

 돌아와서도 나에게 전화 한통 하지 않는 형에게
 또 아주 먼 곳에서 돈이 떨어졌다며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는 그가 관계인지 높이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잘 모른다

 단지 그가 더 멀리 먼 곳으로 갔으면 하고 바랄 뿐
 그래서 오만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십만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며
 거의 갈라진 말소리에 대답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어느 먼 바닷가에서 행려병자 되어 있다고
 누군가 연락해왔을 땐 그의 낡은 지갑 속에
 내 전화번호 적힌 오래된 종이가 있더라는 것
 종이 뒤에는 내게서 받은 돈과 날짜 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더라는 것

 어수룩하게 그를 데리러 가는 나는 도착하지도 않아
 그에게 종아리이거나 두툼한 옷이거나
 그도 아니면 겹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할 뿐
 어디 더 더 먼 곳에서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했으면 하고
 자꾸 바라보고 또 바랄 뿐


고구미와 내 관계가 이렇게 되면 어떨까? 누가 누구의 겹이 될까? 최근에는 절연이란 시를
읽었는데 정말 좋았다!

AND

20070308 눈과 기형도

2007. 8. 24. 22:12
국립의료원에 가는데 눈이 왔다. 어제 못 잤지만 그렇게 많이 피곤하진 않았다.
way의 여행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다. 예방 접종이 꽤 오래걸려서 밖에 나와서 담배를 피우는데 눈이 많이 왔다. 갑자기 기형도가 생각났다. 아니 이 시가 생각났다.

   

             진눈깨비      /    기형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던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 길 위로 사각의 서류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개비, 놀라 넋도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지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개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소리내서 읽으면 더 좋은 시인 것 같다. 조동진의 '진눈깨비'라도 들을까....

추가로 이 글에 내가 달았던 댓글 - 국립의료원에서 나오는데 way가 지치고 피곤하냐고 했는데, 나는 모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았던 게 아니라 눈물이 나는 것을 참았다. 울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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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방창 -김용택-

2007. 8. 24. 22:07
김용택 / 만화방창
 
 
 
내 안
 
어느 곳에
 
그토록 뜨겁고 찬란한 불덩이가 숨어 있었던가요
 
한 생을 피우지 못하고 캄캄하던 내 꽃봉오리,
 
꽃잎 한 장까지 화알짝 피워졌답니다
 
 
 
그대
앞에서
 
 

 

 
습자지 같은 사랑이...더라도...
 
萬化方暢을 영어로 하면 burst open 쯤 된다.
 
피어 오르는 건 뭐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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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y 바래주러 나갔다. 집 앞에서 공항버스 타려다가 차가 많이 밀리길래 공항지하철도(?)를 이용했다. 공항버스 보다 50 퍼센트 이상 저렴하다. 인천국제공항이 처음 생긱고 얼마 안 되었을 때, 그곳의 상가들도 아직 다 입주하지 않았을 때, 그곳에 가서 참 이질적이라고 느꼈다. 지나치게 도시적인 모습... 왠지 공기가 잘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지하에 넓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코엑스 몰'도 조금 비슷한 느낌이고, 현대 백화점과 CBS, 하이페리온이 쭉 늘어서 있는 목동 도서관 뒷길도...... 아주 예전의 도떼기 시장 같이 않고 잠잠했던 백화점도....... 늘 어색했다.

 공항 건물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조용한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했다.

언덕위에 바다가 보이고 언덕 아래까지는 구불구불한 좁은 흙길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오늘 오랜만에 다시 그 생각을... 그리고 이 시...


           산머루 / 고형렬

 

 강원도 부론면 어디쯤 멀리 가서

 서울의 미운 사람들이 그리워졌으면.

 옛날 서울을 처음 올 때처럼

 보고 싶었던 사람들, 그 이름들

 어느새 이렇게 미워지고 늙었다.

 다시 전부 어디쯤 멀리 떨어져 살아

 미워진 사람들 다시 보고 싶게

 시기와 욕심조차 아름다워졌으면.

 가뭄 끝에 펑펑 쏟아지는 눈처럼

 서울 어느 밤의 특설령처럼

 못 견디게 그리운 사랑이 되었으면.

 그러나 우린 모두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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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39 - 김영승-

2007. 8. 24. 22:01
     반성 39 / 김영승

 오랜만에 아내를 만나 함께 자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왔다.

 
아내는 갈비탕을 먹자고 했고

 그래서 우리는 갈비탕을 한 그릇씩 먹었다.

 버스 안에서 아내는 아아 배불러

 그렇게 중얼거렸다.

 너는 두 그릇 먹어서 그렇지

 그러자 아내는 나를 막 때리면서 웃었다.

 하얗게 눈을 흘기며 킥킥 웃었다.

 한 친구가 어느 드라마의 불륜 커플이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안타까운 이별을 하면서 여관을 나와서 순대국을 먹고 말 없이 헤어지는 장면이 인상적이 었다고 했다. 그 친구와 그의 여자친구는 약간은 그럴것도 같은 분위기였다. 김영승 시인은 아내와 여관을 나와 갈비탕을 먹었다. 섹스 후에는 걸죽한 게 좋긴 하지.... way는 뼈해장국을 좋아한다. 나는 아무거나 다 좋아하고... 내 습자지 같은 사랑이 그리 걸죽하지도 않았고 당신의 받아들임도 끈끈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걸죽했다.
 모든 것이 변한다면 더 힘든 것은 당신일 것을 안다. 모든 것이 변해있을 거라고 말한게 그대로인 변함을 말한건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시 웃겨줄테니 건강히 돌아와라... 그런 건 처음인 내 웃음도 다시 볼 수 있겠지..
 
 그 친구 커플은 결혼한다. 곧!  
 
 나는 김영승이란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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