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 정양

2007. 8. 24. 21:57

한번 빚진 도깨비는
갚아도 갚아도 갚은 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한평생 그걸 갚는다고 한다
먹어도 먹어도 허천나던
흉년의 허기도 그 비슷했던가
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소용없는 사람아
내려도 내려도 다 녹아버리는
저 첫눈 보아라
몇 평생 갚아도 모자랄
폭폭한 빚더미처럼
먼 산마루에만
희끗거리며 눈이 쌓인다






나는 허천난다는 말이 좋다. 외로울 때 쓰기 좋은 말이다.

AND

사카구치 안고

2007. 8. 24. 21:49

 사카구치 안고를 읽었다.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려다 실패해서
그대로 옮겨본다.

 견디기 힘든 것을 참고, 참기 힘든 것을 참으며 짐의 명령에 따라 달라고 천황이 말한다. 그러자 국민은 엎드려 울며 다름 아닌 폐하의 명령이니까, 참기 힘들지만 억지로 참으며 미군에게 지겠노라고 한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우리들 국민은 전쟁을 그만두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지 않았는가. 죽창을 들고 흔들며 미군의 전차에 대항하다 찰흙 인형처럼 풀쑥풀쑥 죽어갈 것이 너무도 싫어 어쩔 줄 몰라 하지 않았는가. 전쟁이 끝날 것을 가장 절실히 바랐었다. 그런 주제에 그걸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의명분이라고 하고, 천황의 명령이라고 한다. 참기 힘든 것을 참는다고 한다.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비참하고도 한심하다 할 엄청난 역사적 기만이 아닌가. 더욱 통탄할 일은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기만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천황의 정전 명령이 없었다면, 우리는 실제로 미군 전차에 몸을 던져, 정말은 싫으면서도 내색도 하지 않고 장렬하게 찰흙 인형이 되어 풀쑥풀쑥 죽어갔을 것이다.     -속 타락론 중에서-

'백치'라는 작품도 꽤 좋았고 정치의 무용성과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문제를 다른 이야기도 즐거웠다. 그리고 역시 벚꽃은 불길한 징조임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황색눈물'이란 영화에서 작가 지망생이 좋아하는 찻집 아가씨에게 타락론 읽었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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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 박성우

2007. 8. 24. 21:45

주방장 모자 눌러 쓴 부부가

할로겐램프를 켠다

가스 켜지고 발전기 윙윙 돌아

옛날호떡 국화빵 애플파이

라고 써진 글씨가 환해진다

말랑말랑한 밀가루 반죽,

옛날호떡 국화빵 애플파이 된다

리어카 두 대 이어붙인 가게로

축제를 보고 가는 사람들이 흘러든다

눈짓 손짓 얼굴표정만으로도

벙어리 부부는 손발이 척척 맞는다

얼마씩 파냐고 물어오는 사람에게

아내는 가격표를 손등으로 툭툭,

두들겨 주고는 국화빵기계 돌린다

낮 단속에 걸렸을 때

눈말 멀뚱멀뚱 가스통을 뺏기던 부부,

빠져나오지 않는 말들을 말랑말랑 뭉쳐

옛날호떡 국화빵 애플파이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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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6 한유주란 사람

2007. 8. 24. 21:25
<우울한 발견>이란 단편을 읽다. 글장난에 반하다.

나는 여전히 잃을 것이 너무나 많았다. 살아야 하는 날들은 언제나 안전하고 견고한 담보를 요구했다. 오늘 나는 야생성을 되찾겠지만, 내일 나는 다시 온순하게 길들여진다. 순간들은 급박하게 지나갔지만 나는, 그리고 사람들은, 세계는 언제나 권태로웠다. 그런 때마다 나는 베를린에 온 것을 짧게 후회했다. 무덤도 없는 죽음, 대상도 없는 슬픔. 이미 죽어버리는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과 오늘이 내일이 되고 내일은 다시 어제가 된다는 단순한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우리는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언제나 까닭도 없이 우울했고, 우울은 언젠가 내 손가락 마디마디부터 가장 가느다란 신경 하나까지 침식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잊고 싶은 기억들이 있었으나 그 기억들을 잊고 싶어 한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들은 흘러갔다. (중략)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은 내가 네가 되는 순간, 을 꿈꾼다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비밀을 필요로 했고, 서로 어울리기 위해서는 비밀을 슬쩍 풀어놓아야 했다. 우리는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애도하고, 찢겨나간 페이지들처럼 이미 없는 시간들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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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2007. 8. 24. 21:23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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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김선우-

(고백할 게 있어 어떤 벌레에 관한 얘긴데 말야
달팽이 몸속에서 알을 까고 자라난대)
두려워하진 마 암세포처럼 무식하게
숙주를 절명시키진 않아 기어다니거나
교접하는 데에도 아무 문제 없어 넌 열심히
먹이를 찾아다니고 나는 무럭무럭 커가는 거야
(놀랍지 않아? 몸속에 뭔가 기르고 있다는 거)
근데 말이지 난 이제 다 커버렸고
장년기를 보내기에 넌 너무 작고 초라해
좀더 쾌적한 새의 창자 안에서
말년을 보내는 게 내 운명이야
네 여린 눈자루로 침입해 들어갈 거야 고통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네 머리는 광채를 뿜어내겠지
넌 이제 한가롭게 마지막 산보를 즐기면 돼
멀리서 늠름한 새의 발톱이
빛나는 네 등짝을 찍으러 날아올 테니까
한평생 배밀이로 기어다니다
무덤도 없이 가랑잎 위에 뒹구는 걸 생각해봐
쓸쓸한 죽음은 질색이야 구름위를 날게 해줄게
따듯하게 버무려지는 네 육즙을 맛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송곡을 들려주겠어
새로운 내 집이 맘에 들 거야 짓이겨지면서,
그때야 넌 모든 걸 깨달을지 모르지만
모든 끝장은 단호한 거야 난 네게 빚 없어
(놀랍지 않아? 날 키운 건 너야)


봄밤 - 김수영

고향 오라버니 같은 남자와 마주앉아 술을 마신다.
뚝배기 속에서 끓는 번데기.
다섯 잠을 자던 누에는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일까.
다섯 겹 혹은 일곱 겹 주름을 뒤적이며
무심하게 안부를 묻는다.

이십대와 삼십대를 건너뛰는 동안
그리워할 일도 미워할 일도 없었던 것일까.
사각사각 푸른 뽕잎 위에 누워 낮잠을 잔 것처럼
눈이 부셔 흐린 안경을 잠깐 닦았던 것뿐인데....
우리는 그림자끼리 마주 앉아 있다.

그는 취하지도 않고 비틀거리지도 않고,
나는 젖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돌아서 가는 등 뒤로 마른 산처럼 어깨가 솟아있다.
나보다 10년을 또 먼저 가는 사람.
하염없이 흔들흔들 산길을 걷고 싶은 밤,
살찐 봄바람만 낯익은 골목으로 불어온다.
날개는 다들 어디다 벗어두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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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새 -마종기

2007. 8. 23. 11:56
 무너지는 새

가을이 되면 새들은 모두
함께 무리져서 날으기 시작한다.
끼리끼리 같은 방향으로 날기 시작하고
노래도 같은 곡조를 부르기 시작한다.
(자기 무게를 모르는 새들만
높이 날 수 가 있다고 했지.)

한 떼의 새가 몰려온 적이 있었다.
건강한 날개의 노래를 부르면서
어울려 소주를 마시면서 살자고 했다.
나는 과학같이 정확하고 싶었다.
(가을이 되기 전에 내가 떠났다.)

그 후에 가을이 되면 나는 하늘을 본다.
하늘을 보면 언제나 다 보인다.
한 떼의 새가 날아간 자리에
혼자 있구나, 하고 써 있는 게 보인다.
(혼자 있으면 생각이 많아지지.
많으면 날을 수가 없지.)

혼자 있구나. 나도 모르는 탈바가지 쓰고
어지럼증에 시달리는 톱니바퀴의 한평생.
날개에 묻은 많은 기름을 씻을 수가 없다.

이승의 무게를 버리려고 무너지는 새.


way가 '바람의 말'을 좋아해서 내가 찾아낸 시랄까? 암튼 좋은 시다!
어쩌면 way가 좋다고 했던 내가 쓴 글에 어두운 하늘에서 밝은 하늘 쪽으로 날아가는 새들과
닮아서 바로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그 길들과 그 하늘들, 그 공기들이 좋다.
나라는 전체가 흡수.
흡수는 함께일 때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혼자일때 더 큰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2006년 겨울 환기미술관에 다녀와서-

AND

어디에선가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별자리로 향한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소, 그런데 그 별자리는 또 우주의 어느 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거요, 나도 더 알고 싶지만 자세한 내용은 모르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요, 여기를 보시오, 우리는 반도에 있소, 반도는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소, 바다는 자신이 속한 지구와 함께 돌고 있소, 지구는 자전을 하지만 태양 주위를 돌기도 하오, 태양 역시 자전을 하고 있소, 그러니까 이 모두가 앞서 말한 별자리를 향해 하고 있는 거요, 따라서 나는 혹시나 우리가 이 운동 내의 운동으로 연결되는 사슬에서 마지막 고리가 아닌지 자문해 보고 있는 거요, 사실 내가 궁금한 건 우리 안에서는 무엇이 움직이느냐, 그것은 어디로 가느냐 하는 거요, 아니, 아니, 나는 벌레나 세균이나 박테리아, 그러니까 우리 안에서 살고 있는 생물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오,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소, 별자리, 은하계, 태양계, 태양, 지구, 바다, 반도와 되셰보가 움직이면서 자기들과 더불어 우리를 움직이듯이, 스스로 움직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움직이는 어떤 것 말이오, 그러니까 나머지 전체를 움직이는 것의 이름은 무엇이냐 하는 거요, 사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어쩌면 사슬은 없고 우주는 하나의 고리인지도 모르겠소, 아주 가늘어서 우리와 우리 안에 있는 것만 들어갈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주 굵어서 최대 크기의 우주, 즉 고리 자체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말이오,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의 이름은 뭘까. 보이지 않는 존재는 인간과 함께 시작됩니다.

 

 아주 긴 질문, 간단하고 놀라운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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