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생

꽃 피는 3월도 아니고
장맛비 요란한 6월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더위 쏟아지거나
나뭇잎 붉은 때도 아닌
크리스마스와 망년회로
사람들 흥청망청한 12월
나는 12월 생
남들보다 빨리 한 살 먹고 시작했다고
축하도 못 받고 나이만 빨리 먹는
나는 서러운 12월 생
AND

열병

열병을 앓았다
39.4도 불같은 몸으로
꿈 속에서 당신과 뜨겁게 사랑했다
깨어나 응급실에 갔다
사랑이 끝난 자리엔
병원비와 차가운 계절
낫지 않으면 좋았을
열병을 앓았다
AND



잠결에 눈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고요가 먼저인지 눈이 먼저인지
사박사박 사박사박
세상에 고요가 쌓이는 소리
모든것을 원래로 되돌리는 소리
달빛 아래 맨발로 눈 위를 달린다
아직은 더럽혀지지 않은 삶
눈 그치자마자 더러워질 세상
그리고 나
눈은 사람보다 차갑고
나는 추위를 모르는 사람
아무리 뛰어도 내 발자국 남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소복소복 소복소복 
잠결에 눈 쌓이는 소리를 들었다
AND

겨울 아침 생각

밖은 영하 십 도
쪽창으로 누런 햇빛이 들어오는 작은방 
구석 이부자리에 비스듬히 누워서
창 앞 책상에 앉아 뭔가가 바쁜 당신을 보면서
눈민 꿈뻑꿈뻑
나는 사람들과 조금씩 멀어진다
허망할 겨를도 없이 삶이 허무로만 돌아오는 계절에
조금씩 세상과 멀어진다
AND

젊음이 사라져가는 것을 
온 몸으로 안다
아니 온 맘으로 안다
어제보다 지치는 오늘
오늘보다 힘들 내일
져려오는 뼈마디에 아프기만 한 마음으로
그 모든 걸 안다
티비에서 아이돌 아이들이 열심히 하는 걸 보니
눈물이 난다
더 많은 아이들은 아무 꿈도 없을텐데
너희들의 꿈은 잠깐의 주목이라도 받는구나
피씨방에서 욕하며 게임하는 애들을 봐도 눈물이 난다
미역국은 얘기할 필요도 없지
너희들 또한 알지 못하는 세상이 여기에 있다
내가 보지 못하는 아이들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그들도 이 세상의 어느 자리에서 자기 몫을 챙기겠지
눈물이 나고 또 난다.
AND

가락국수


영주 가는 무궁화 열차
종착지는 안동이었을까
약초의 고장 제천에서
오래 머물던 기차
열차안에는 군것질 거리 파는 형아들 뛰어다니고
차창 밖에는 250원 짜리 가락국수를 들이키던 외삼촌
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일
출발지는 청량리였을까
생각하면 옛날 생각만 나는
그때의 가락국수와 어머니의 남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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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

동물 발자국만 보이는 하얀 산에 오른다
멀리서 까마귀 운다
내 발자국 더해질 때마다
깊어가는 울음
나는 왜 그리고 너는 왜
울음은 물음과 같고
맥없이 뒤돌아 오는 길에
내 발자국에게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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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안녕

산부인과, 유모차, 어린이집, 학교, 직장, 결혼, 자녀, 스트레스, 암, 병원, 죽음
관을 짜듯 출생부터 죽음까지 틀에 박힌 것이 당연한 삶과 누구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흘러가는 세상
단 하나 장담할 수 있는 건 그때도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
포크레인이 할머니 무덤을 만드는 동안 무덤자리 뒤 작은 언덕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마침 불어온 바람에 실려오는 막내삼촌의 담배연기가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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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사라진 것들을 생각하다가
그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가
종이가 걸린 복사기처럼 
머릿속이 뒤엉켜 멈췄다
나 태어나기 전부터 있다가
내가 사는 동안 사라진 것들
골목길, 가게들, 사람들
모두 태어나 살다 죽지
태어나와 죽다 사이에서
살다가 사라지지
사라지기에 삶이고
악운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나지
사라진 내 사랑은 어디로 흘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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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잘 잤어요?​
너에게 묻는다
정말 잘 잤는지 궁금해서
자꾸만 묻는다
어제 잘 잤는지 궁금한 사람이
나 없이도 잘 사는지 궁금해서
종이 위에만
묻고 또 묻는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