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식달

지구가 달을 먹는다
둥글게 달을 먹는다
나이 마흔이면 생에 한 번쯤은
누군가를 자기 그림자로 먹어버린 경험이 있다
그때는 그게 사랑인 줄 알았으니
사랑이었다
지구가 달을 먹는다
너무 사랑해서 달을 먹는다
조급하지도 느긋하지도 않은 속도로
지구가 둥글게 달을 먹는다
한 차례의 어둠이 지나고 나면
그게 사랑이었다
AND

좁쌀

내 마음 속엔 빈 공간이 있다
좁쌀을 본 적 없는 사람들도 알만한
딱 그만한 크기의 작은 공간이 있다
그 안에선 과거와 미래가 함께 뛰놀고
세계의 모든 말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부유한다
지우고 싶은 과거는 기억하고 싶은 미래가 되고
떠돌던 말들은 폭풍에 휩싸여
어제를 지나 오늘도 건너뛴 채 내일을 넘어 아주 먼 미래로 날아간다
어디에서 채우나 이 허무를
어디에서 채우나 이 공허를
달리고 달려도 그 자리이고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똑같은 말들을 아무 불평없는 소처럼 되새김질 한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
나라는 좁쌀 한 알을 씹고 또 씹는다
AND



갑자기 마신 술
가게를 나서자마자 보이는 눈발
아, 고마운 눈
사랑하는 너

->하이쿠 같아서 수정함

갑자기 마신 술
가게를 나서자마자 보이는 눈발
아, 고마운 눈
술이 깨는 기분에 2차를 마시고
가게를 나설 때 여전한 눈
아, 사랑하는 눈
산불같은 일상의 걱정은 지워버리는 눈
내일 할 일 같은 건 머릿속에서 덮어버리는 눈
아, 난 너에게 가는 길 
취기 따윈 지워 버리고
검정색 점퍼가 하얗게 되도록
너에게 가는 길
아, 사랑하는 너
AND

우리들의 올림픽

달리고 던지고 헤엄치고 붙들고 힘을 겨루다
나중에는 울고불고 나자빠진다
세계 방방곡곡에 와이파이가 흘러넘쳐
진짜로 전 세계가 손에 손 잡고 하나 된 것 같지만
이웃 나라 소식은 좀 아는 척 할 수 있어도
옆집 사는 사람 얼굴도 모르고
같은 말을 쓰는 이웃나라에 사는 가족들 소식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4년에 한 번씩 자동으로 열리는 가짜 축제
따뜻한 계절에만 하는 걸론 모자라서
추워 빠진 날씨에 얼굴 벌개진 채로 스케이트도 타고 썰매도 타보지만
결국은 울고불고 나자빠지고 마는 겨울올림픽 또는 동계올림픽
겨울이란 예쁜 말을 두고 쉽게 부르는 이름 동계올림픽
올림픽은 올림픽이고 겨울올림픽은 동계올림픽이라 서러운 겨울올림픽
500년 된 나무 베어내고 가짜눈을 뿌렸던 자리에
이제 막 피어나는 어린나무를 빼곡히 심고나면
복구란 말을 갖다붙일 수 있는 우리들의 겨울올림픽
이기지 않으면 진 것이고 지면 잊혀지는 세상이지만
정작 패자는 평생을 자고 일어나도 잊지 못하는
우리들의 서러운 겨울올림픽
서러운 우리들의 겨울올림픽
AND

질투

내 색시는 내가 엄마 없으면 못 사는 줄 아는데
엄마는 나랑 220km 떨어져 살고
내 색시는 매일밤 나랑 붙어서 잔다
AND

반성

요즘은 비스듬한 게 좋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면 다 새롭다
왼쪽은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방향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인 세상은 왼쪽으로 기운다
온갖 하찮은 것부터 당신의 입술까지
아니, 기울어진 것은 나 뿐인가
기울어진 것은 삐뚤어진 것
삐뚤어진 것은 뒤틀린 것
기울여야 똑바로 보이는 세상은
삐뚤어지고 뒤틀린 것 
고개를 좀 더 기울이면 
삶은 그대로 평탄한 것
요즘은 적당히 비스듬한 게 좋다
더 이상 삐뚤어지지 않을 만큼만
더 뒤틀리지 않을 만큼만
당신 입술에 입맞출 수 있는 만큼만
AND

답이 없다

늙은 개는 죽는다
아내에게선 답이 없다
옆집 강아지가 죽었다 나이는 한 달
아내에게선 답이 없다
사람은 다 죽는다
아내에게선 답이 없다
바다 건너 사는 형이 술 먹고 죽었단 얘기를 들었다
아내에게선 답이 없다
바닷가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
아내에게선 답이 없다
술 위에 술을 쌓는다
아내에게선 답이 없다
파도가 내 안에 자꾸 빗금을 긋는다
아내에게선 답이 없다
나는 답이 없고
아내에게선 답이 없다

-> 오늘 아내 생일인데....
AND

할아버지 제사 다녀왔다.
내가 우리집 장손이다.
상 차리는 제사도 장손이란 개념도 다 한국적이다.
아버지가 장남이라 차례, 제사는 우리집에서 지내는데 그 우리집이 작년부터 엄마집이 됐다. 법적으로 이혼한 전남편의 아버지 제삿상을 내 엄마가 준비한다. 좀 웃긴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25~6년 됐고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장기알 가지고 나한테 야바위 가르쳐 줬던 것 뿐이니 내 동생과 그보다 한참 어린 친척동생들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거나 얼굴을 못 보기도 했다.
제사는 대를 이어서 내려가니까 어느 시점에는 고인에 대한 아무런 기억도 없는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다. 후손들 잘 되게 해달라고 또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한다. 대를 잇는 과정에서 자주 못보는 친척들과는 멀어지고 형제간에 그러기도 한다. 나부터도 작년에 할머니 돌아가신 후로는 삼촌들과 점점 멀어지는 걸 느낀다. - 작은 고모 딸내미가 아기 낳은 소식을 어제 작은 엄마로부터 전해들었다. -
대를 잇는 제사는 원시적인 무언가를 갖고 있다. 원시적인 건 본능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못 왔지만 삼촌들이 참석했고 제사는 무사히 끝났다.

엄마 얼굴 봐서 참 좋았다.
내게 제삿날은 엄마 얼굴 보는 날이다.
일년에 명절 제사 합쳐서 4번씩 엄마를 보게 되니까 엄마가 80까지 산다고 해도 엄마 얼굴 볼 횟수가 80번 밖에 안 남았다. 1년도 365일이나 되는데.....
이 생각을 하니까 깊숙한 곳이 아리다.
어제 본 엄마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AND

겨울비

​물방울이 전깃줄 위에서 외줄타기를 한다
얼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고 땅에 떨어지지도 않고
거꾸로 매달려서 바닥을 향해 몸을 동그랗게 말고
줄지어 줄지어 ​위태롭게 위태롭게
나는 끝을 알고 물방울은 그 끝을 모른다
담담하게 담담하게 처연하게 처연하게
오래된 막걸리 집 처마 아래서 피워올린 담배 연기는 
비스듬히 날아올라 지붕 위로 숨는다​
당연하게 당연하게 아무렇지 않게
전봇대는 기울지 않았으나 전깃줄이 기울었다
세상은 기울지 않았으나 나는 기울었다
물방울은 끝내 땅에 떨어지고
나는 날지 못한다


AND

취기

이 정도 취했을 때가 좋다
비틀거리지 않으며 집으로 가고 있다고 느낄 때
보고 싶은 사람에게 굳이 전화하지 않을 때
집에 가면 한 잔 더 먹고 싶지만 같이 먹을 사람이 없을다는 걸 알 때
집에 와서 옷은 대충 벗어도 양치는 하고 자야겠다 싶을 때
자꾸 네 생각만 날 때
그래도 네 생각만 날 때
AND

겨울산에 버리다

겨울산에서 똥을 눈다
김이 모락모락 똥을 눈다
그 똥을 흰 눈 속에 묻는다
어제까지를 버리고 돌아온다
AND

한파

퇴근길
밖에 나온지 오 분 만에 귀가 얼었다
국밥집 돼지머리 귀도 얼었다
자동차가 얼고 전봇대가 얼었다
강이 얼고 파도도 얼었다
산에 나무들은 얼지도 않고 종일 찬바람을 맞는다
귀가 얼지 않게 속삭인다
얼지말라고 얼면 죽는다고
견디라고 견디라고
이제 곧 봄이라고
서로의 귀에 대고 바람으로 속삭인다
AND

날이 많이 춥다.
출근길에 정선 제2교를 걸어서 건넌다.
조양강이 꽝꽝 얼어서 갈라지고 있다.
얼어붙은 마음은 쉽게 갈라지고 부서진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람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죽었다. 2년전에 나랑 같이 면접장 들어깄다 나와서 몇 마디 나누었던 게 생각난다. 나랑은 달리 적극적인 밝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결국은 꿈을 이루었으나 행복이 길지 않았다. 그 와중에 직장에서 친한 동료 한 명은 2세 소식을 전했다. 생의 덧없음을 어느정도 아는 나이지만 마음이 부대끼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제부터 내일까지 총 다섯 번의 면접 시험을 진행한다. 일자리를 얻으려는 연세 지긋한 분들을 많이 뵙고있다.
눈도 잘 안 보이시고 글씨도 잘 못 쓰시는 분들이 끙끙대면서 필기시험을 보고 새파랗게 어린 면접관들 앞에서 팔굽혀펴기를 한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참 못할짓이란 생각이다.
남을 이기고 내가 뽑혀야 한다는 빤히 보이는 말과 행동은 절박함인가 순수함인가 과욕인가? 나도 빤히 보이는 사람이겠지.
대부분의 구직활동에는 계란후라이를 먹다가 덜 녹은 왕소금을 씹는 짠함이 있다.
2주간 집에 못간 사이에 옆집 아기 강아지들은 많이 컸을까? 살아 있는 건 다 제 속도대로 산다.
이런 생각들로 겨울을 건넌다.
곧 봄이다.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올해가 다 끝난 것 같다.
AND

모른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거울을 봐도 모르겠다
내가 누구랑 같이 사는지 아내를 안고 자도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매일 살면서도 모르겠다
짬뽕 그릇을 앞에 두고도 뭘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눈이 슬로우모션으로 내리는 겨울 오후
오늘이 몇월 몇일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모른다
나는 모른다
AND

입술

내 입술은 붉다
네 입술은 빨갛다
붉고 빨간 것이 뒤섞인다
이름도 모르고

내 입술은 빨갛다
네 입술은 붉다
빨갛고 붉은 것이 뒤섞인다
아무것도 모르고

붉디붉고 빨갛고 빨간
키스 키스 키스
입술 입술 입술

파랗게 질리도록
키스 키스 키스
입술 입술 입술
AND

신년사

어차피 맨날 뜨는 해
항상 마음뿐인 소원 성취
올해 계획은 그저 12월까지 잘 보내는 것
AND

장날

5일마다 새로 태어나는 장날
새벽을 깨는 두부가 뜨거운 김을 내뿜는다
솥뚜껑 위로 메밀전 뒤집는 솔길이 분주하다
시장 맨 끝자리에서 김을 굽던 부부가 안 보인다
커피를 사러 들른 빵집에 늘 있던 알바생이 없다
늘 있는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고장나도 티가 나지 않는 시계 부속같은 삶
얼어붙은 강 위를 건너는 출근길
언젠간 녹아 흘러갈 시간
AND

마음같지 않은 일


자도 자도 기운이 없다
피부가 생기를 잃은지 오래다
바다 앞에 앉아도 감흥이 없고
술을 마셔도 기분이 그저 그렇다
애인을 봐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남았다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기억하는한 살아남았다
무언가를 아는한 살아남았다
목소리를 잃은 매미로라도 살아남았다
나조차 내 마음 같지 않아도 살아남았다

이렇게 살아남았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