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 

내가 말했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도 평범할 뿐이다
나는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는데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묻어둔 사랑은 점점 단단해지고
사진속의 당신은 내 마음속의 당신과 다른 사람

그래도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흔 살
지난밤 꿈 속의 나는 모든 불의를 그냥 넘기는 사람
십 년 후의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쉬흔 살
나는 언제나 어제와 같은 꿈 속에 있는 비겁자
여전히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당신의 연인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평범한 사람
AND

도서관


눈을 감고 고개를 들면
다가오지 않은 것을 포함한 모든 과거가
빛바랜 종이를 타넘고 내 안으로 파고든다
죽은 왕의 비탄과 살아남은 왕비의 슬픔
잊혀진 마술의 희생자와 그 마술사의 조수
지옥을 떠도는 방랑자와 그를 뒤쫓는 켈베로스
존재했던 모든 사랑과 아직 여기에 머무는 이별까지
가장 먼 곳에서의 시작과 소멸이 나에게 전해진다
다 지겨워져 눈을 뜨면
과거가 되버린 미래가 허공을 떠돈다

내 마음처럼
AND

사랑

당신이 방금 몸을 씻고 나온 욕실에 들어가서
당신이 씻은 온도와 똑같은 온도로 내 몸을 씻고
그새 잠든 당신 이마에 조용히 입술을 갖다대면
그 순간만 영원한 지금으로 존재하는 일

불온

당신이 방금 몸을 씻고 나온 욕실에 몰래 들어가서
당신이 씻은 온도와 똑같은 온도로 내 몸을 씻고
그새 잠든 당신 입술에 조용히 입술을 갖다대면
그 순간만 영원한 지금으로 존재하는 상상
AND



'상처투성이의 배' 란 제목이 붙은 사진 한 장
가라앉고 올라오는 장면이 생중계 된 배
칠흑같은 물 속에서의 삼 년만 가라앉은 운명
씨팔, 불사의 지옥으로도 모자란 죄를 지은 새끼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지금 숨을 쉬니
내가 그저 사니까 너희들도 사니
사람들이 울부짖어도 너희들은 그냥 사니
살고 살아 지옥이 되려고 사니
내가 차마 살지 못해도 니들은 사니
파렴치인 줄도 모르고 세월이란 이름의 끝을 사니
씨팔, 상처투성이의 배
AND

오늘, 밤

이 글을 마치기 전까지
오늘은 끝나지 않는다
세상은 오늘의 연속
어제의 오늘과 내일의 오늘
나의 오늘과 당신들의 오늘
밤의 정적안에 냉장고 소리
냉장고의 오늘
모두가 잠든 시간에 냉장고가 깨어있다
나랑 냉장고만 잠들지 못하는
오늘, 밤
내가 잠들기 전까지
오늘은 끝나지 않는다
AND

18. 회식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빈 잔이나 채워주지
더럽게 왜 술잔을 돌리고 지랄이야
AND

오줌

새벽,
급하게 바지를 내리고
지친 몸을 변기에 얹고
오줌을 눈다
쏴아, 시원한 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수도꼭지에 비유하는 일이 거짓이 아니구나
오줌을 누는 동안 세상이 끝나는 일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지금이라면 좋겠다
똑똑, 오줌이 멈추고
나도 세상도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과음의 흔적만 세상에 남겼다
AND

포장지

 

모든 상품에는 포장지가 있다
생명조차도 상품인 시대에
맨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당신
나는 당신의 껍데기가 되고 싶다

AND

금연

담배를 끊은지 이십년인데
너와 마지막 담배를 피웠던
그날 새벽만
우리 사랑의 마지막 순간만
자꾸 기억 난다
껄렁한 고등학생의
파고다 공원 할아버지의
삶에서 만나는 모든 담배 냄새가
새 애인이 피우는 담배 냄새조차
세상의 모든 담배 냄새가
너와 연결이다
네가 마지막이었다
AND

편지


너에게 편지를 쓴다
과거까지 전해질 수 있게
옛날식으로 또박또박 적어나간다
잘 있니?
한참을 울어버렸다
그리고 또,
잘 있니?
잘 있니?
대답할 수 없는 너에게
부칠길 없는 편지를 쓴다

AND

사탕

투, 사탕을 뱉는다
툭, 깨져서 흩어진다
이것도 생이라면
아직 달콤할 때 부서졌으니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까
자음 하나 차이로
사랑은 달콤하게만 끝나지 않고
끝나지 않는 밧줄을 올라도
운명은 한 길로만 향한다
입안에 씁쓸한 단내만 남았다

AND

봄, 사랑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에
봄이 온 것을 알았습니다
봄, 이라 적고
봄, 이라 불러봅니다
네 번째의 봄을 적으려는데
봄이 내 머리 위에 앉았고
봄이 내리는 사이에
당신이 내 앞에 서 있고
당신을 안으려는데
우리 발치에 꽃잎 흩날립니다
이렇게 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AND

낮잠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다
춥다
잠들면 식고 식으면 죽는다
불멸은 영원한 불면
식은밥, 식은 정신, 식은 사랑
식으면 죽는다
사랑은 한쪽만 식어도 끝난다
그러니 아가,
어서 그 차가운 물에서 나오렴

AND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다.

 "살아있는 한 불멸, 영원한 아이" 삶에 대한 통찰은 죽음에 대한 통찰이다. 조르바랑 크눌프가 생각났다. 

 

 p.100~

 "왜 술을 끊었소?" 나는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소, 나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그러자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마치 내가 내게 할당되지 않은 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같소. 다른 사람에게 할당된 역할을 하면서 인생의 일부를 산다는 것은 아주 좋지 않소. 게다가 과거를 고칠 수 없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힘도 없을 때 그런 사실을 깨닫는 것은 더욱 좋지 않소. 내 말을 알아듣겠소?"

 "그렇소, 이해한다고 생각하오. 내게도 여러 번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소. 나는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내 다리로 딛고 일어설 수 있었소." 나는 대화의 방향을 바꾸는 동시에 내가 메시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가비에로, 당신은 불멸의 인간이오. 다른 사람들처럼 언젠가 죽는다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소. 그래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 말이오. 당신은 살아 있는 한 불멸이오. 나는 내가 오래전에 죽었다고 생각하오. 내 인생은 마치 옷을 자른 다음에 남은 조각들을 아무렇게나 이어붙인 것처럼 만들어져 있소.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나는 아과르디엔테를 입에 대지 않았고. 나는 더이상 계속해서 나 자신을 기만할 수 없소. 학교 교실에서 당신이 다시 살아나고 병을 이기는 것을 보며, 나는 나 자신을 분명하게 보았소. 내 실수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게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알았소."

 "함부르크를 떠났을 때였소?" 나는 이렇게 물으면서 그 동기를 알아보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소. 혹시 당신은 아시오? 중국 소녀와 도망칠 때일 수 있소. 서인도제도를 떠나던 때도 될 수 있소. 나는 모르겠소. 그것 역시 아주 중요한 문제는 아니오. 어쨋든 중요하지 않소." 그의 목소리에 불쾌한 느낌이 배어 있었다. 나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대화를 시작할 때는 그렇게 멀리 가리라고 기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소." 그가 덧붙였다.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소.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소. 우리가 그런 결론에 도달할 때면, 시작은 중요하지 않소. 시작을 안다고 모든 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니까."

 

 p.443

그는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아직도 그 통증은 마치 처음인 것처럼 그를 불시에 덮치고 있었다. 그는 늙는다는 것의 진정한 비극은 저곳, 그러니까 우리 내부에 시간의 흐름을 알지 못하는 영원한 아이가 계속 살고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의 비밀은 가비에로가 아라쿠리아레 협곡에 칩거했을 때 아주 선명하게 감지되었다. 그 아이는 늙지 않는다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깨어진 꿈과 완고한 희망, 그러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시간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혼잡하고 난잡하며 환영적인 정신이라는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육체는 우리의 노화, 즉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살면서 우리의 기력을 소비하고 있다는 증거를 알려주며, 잠시 그런 증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즉시 우리는 더럽혀지지 않은 젊은 시절의 착각으로 돌아가며, 그렇게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마지막 자각의 순간까지 계속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인용구 1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되풀이하라!

 우리의 운명보다 더 나아가라!

 모든 것은 죽음으로 나아갈 뿐이며,

 거기에는 항구가 없다.

 - 쥘 라포르그, "달빛의 사람"

 

 인용구 2

 해야할 일을 하면서

 낚시꾼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낚는다.

 하찮은 피라미를 올린 그물의 첫번째 낚시꾼은

 경솔하게도 질병이라는 바닥의 진흙을 끌어올리고,

 어떤 이는 자신을 위협하는 절망을 향해

 그물을 펼친다.

 그이는 강가에서 쓰라린 회한의 잔해를 모으고 있다.

 - 에밀 베르하렌, "낚시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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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

돼지고기를 잘게 다지고
부추, 숙주, 쪽파, 김치도 다진다
다져진 것들에 달걀을 섞어서 굳게 다진다
다져진 만두속을 만두피로 감싸면
만두 빚기 완료
쪄서 먹고 구워서 먹고
뱃속으로 들어가면 녹아내리고
다시 단단하게 다져져서 똥으로 나온다
산다는 건 먹고 싸는 것
만두가 똥이 되도록
다지고 다지고 또 다지는 일
똥이 거름이 되어
다시 만두가 되는 일
AND

사랑

누구나 작은 관심에 일렁이고
그렇게 사랑이 시작된다
누구나 토씨 하나에도 흔들리고
그렇게 사랑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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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지만 자신이 없다.

 "세상에 물건이 너무 흔하다." 고 자주 말한다.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는 것이데, 실제로는 언제든 그 흔한 물건을 소비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변산에 있을 때, 볼음도에 있을 때, 강릉에서만 생활할 때가 지금 강릉과 정선을 왔다갔다 하면서 살 때보다 심적으로 많이 편했다. 생활 반경(세계)이 넓어지면 어려움도 많은 법이다. 처음으로 다른 동네에 갔을 때, 처음으로 시외버스를 탔을 때, 처음으로 외국으로 나갔을 때의 기억이 강렬할 수밖에 없다.

 나는 절제할 수 있을까? 지난주에 영화 'arrival'을 봤고 이번주엔 이 책을 읽었다. 영화의 결말은 해석에 따라 희망일 수 있지만 나는 '정해진 결론을 향해 가는 인간' 이라는 부정적인 느낌으로 봤다. 나는 절제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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