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동풍에 실려온 온기 거리에 가득하고
모퉁이를 돈 매화향이 골목 끝집 대문을 넘는다
지붕 아래 아기고양이는 애미를 따라 살퐁살퐁 걷고
움트는 가지마다 새들 지저귀는데
이 빗 속에 네가 울면
우산도 없는 나는 어떡해
이 봄을 나는 어떡해
AND

밀폐

물이 차오르는 방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물이 방을 가득 채우도록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칫솔질을 멈추고 양칫물을 뱉었다
방안에 불순물이 떠니니고
그 물로 입을 헹궜다
입안이 시원해지고
방안의 물이 빠져나갔다
나는 온 몸이 시원해졌다
AND

흐린

흐린날
안경을 벗고
흐린 전깃줄
멀리 흐린 하늘
흐릿하게 눈발 흩날리고
눈이 녹는지 내 눈이 녹는지
세상 모든 건 다 녹아 흐릿해지는지
선명한 기억속에 흐릿하게 흘러내리는 건
그리움인지 그리움인지 또 그리움인지
AND

20리터

트럭 뒷바퀴 뒤에
몸을 쭉 뻗고 누운 고양이
굳은 몸을 접어서 비닐 봉지에 담는다
한 겹으론 찜찜해서 비닐 봉지 한 장을 더 쓰고
20리터 쓰레기 봉투에 담는다
평생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며 살았으나
그 삶이 쓰레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평온한 모습이니 생이 다하여 죽었겠으나
겨울 다 보내고 입춘도 지나
생명을 피우는 봄비 내리는 우숫날에
560원 짜리 쓰레기 봉투에 담긴 한 시절
나의 봄이 너의 죽음이다
AND

어느 일요일 오후의 생각


TV뉴스가 김정남의 죽음을 두 시간 째 떠들고 있다
조선땅에 사는 수 천의 김정남 중에 한 명이 살해당한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아, 뉴스에 나오는 김정남은 북한 사람 김정남이지
남한 사람들은 북쪽의 일에 관심이 많지
또 그는 김일성의 손주이고 김정일의 아들이지
남한에는 이병철의 손주가 구속된 건 아쉬워 하면서도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것에는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많지
핏줄이란 게 무섭지
화면속 고인의 모습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았다
남북은 하나고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니까 고인은 나랑도 닮았겠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얼굴에 눈 코 입이 달린 것이 닮았고
콧구멍이 두 개인 것도 닮았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일요일 오후에
강원도 정선군 오일장 한 귀퉁이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누가 보는 줄도 모르고 오줌을 누는 중년 남자가 집에 잘 들어가는 일보다
먼 이국땅에서 김정남이 독살당한 일과 그 범인을 잡은 일이 중요한 일일까
둘 다 나랑 닮은 사람이고 우리는 한민족인데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아직 살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죽은자가 산자보다 더 중요한 것일까
북한사람 김정남은 죽어서도 관심을 받는 일이 행복할까
본인 토사물 위에 쓰러질 뻔 한 남자는 집에 잘 들어갔을까
나는 오늘 죽지도 않고 비틀거리지도 않고 집에 잘 들어갈 수 있을까

AND

쫓겨난 사람들

2017. 2. 18. 20:03

 생활보조금으로 받은 한 달 수입을 거의 다 집세로 내면서도 쫓겨나고 쫓겨나고 또 쫓겨나는 사람들 이야기다. 아래 인용한 부분 말고도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Y형은 작년에만 세 번의 이사를 했고(쫓겨난 건 아니지만 엄밀히는 쫓겨난 거다.) 우리집은 먼저 살던 집 주인아줌마한테 전세보증금을 아직 다 못 돌려받았다. 책은 미국 밀워키의 사례를 다루지만 한국에도 비슷한 일이 많겠지.

 자기 집이 없으면 어쨋든 이사를 가야하고 이사 몇 번 다니다보면 그게 싫어서 무리해서 집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런 무리조차 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점점 형편이 어려운 쪽으로 나가다보면 밥을 굷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면서 왜 집값을 낮추지 못하나? 왜 밥을 굶는 사람들이 있나? 이재용 구속에 나라걱정을 왜 하나? 왜 나는 이런일들에 저항하지 않나? 

AND

돌다

내가 네 주위를 365바퀴 도는 동안
너는 그사람 주위를 한 바퀴 돈다
그렇게 한 해가 가도
나는 네 주위를 돌고
너는 그사람 주위를 돈다
내가 네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동안
그녀는 내 주위를 365바퀴 돈다
그렇게도 한 해가 가고
나는 네 주위를 돌고
그녀는 내 주위를 돈다
각자의 시간을 돌고 돌아
몇 번이나 해가 바뀌어도
우리는 닿지 못하고
누군가의 주위를 돌기만 한다
AND

 컴퓨터 자판으로 블로그에 뭘 적는 게 참 오랜만이다. 키보드에서 나는 또각또각 소리가 벌써 옛 정취가 되어버렸다. 나이가 사십이고 처음 내 컴퓨터를 가졌던 게 20년 전이니 그럴만 하다. 아직은 옛것을 찾는 나이가 아닌지 스마트폰으로 적는 게 더 편하단 생각이다.

 어제는 칼퇴근 하고 할머니 보러 강릉에 다녀왔다. 얼마전부터 호스로 투입되던 음식물마저 계속 게우셔서 더 이상 영양확보가 불가능한 상태라 들었다. 고모랑 통화할 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할머니 숨이 붙어 있을 때,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새 엄마니까 그 마음이 혈연의 정은 아니다. 그렇다고 학습된 예의나 감정도 아니다.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치매 이후에 가만히 누워 계신지가 십년이 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할머니의 의식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걸까? 내면의 고요함 조차도 사라진 지금 모습이 내 할머니인가? 

 두 아이가 있는 남자에게 시집와서 네 명의 아이를 낳아 키웠고 이제 당신의 자식들과 그 자식들의 자식들이 각자의 방식과 마음으로 당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이 세상에서 숨을 멈추고 나면 치매 초창기에 바리바리 짐을 싸서 가야한다고 했던 자기집에 가시는 걸까?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누구나 죽는다는 공포를 덜어주나?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그제서야 진짜 죽음이 오나? 죽음을 포함해서 어떤 방법으로도 보여줄 수 없는 내 모습이 있고 신이라 해도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블로그 글쓰기 화면 만큼이나 오랜만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AND

벌레

모든 땀구멍에서
유충들이 기어나왔다
들어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점점 더 커지는 그것들을 느꼈다
내가 키운 벌레들이 나를 집어 삼키는 동안
나는 너와 함께 별의 죽음을 기다리던 그날밤처럼
아무 반성도 후회도 없이 그냥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AND

새와 나

 

하늘빛이 기묘했는데
나는 어느 나무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작은새 한 마리가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새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새는 날지도 않고 눈만 꿈뻑거렸다
달아나지 않는 새 때문에 당황한 손을 거두고 새와 눈이 마주쳤다
가지 위의 눈이 새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이렇게 얼어붙은 순간에
내가 어쩔 수 없는 시간에
어느새 분홍색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도 새도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하늘빛은 계속 기묘하고
나도 새도 그 아래 가만히만 있었다
AND

균열

모든 것은 작은 금 하나에서 시작됐다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가지가 뻗고 꽃이 피고 다시 씨앗이 되었다
모든 것은 작은 상처 하나에서 시작됐다
갈라진 손 끝이 뺨을 스치고 혀가 메마른 입술을 파고들고 사랑이 되고 말이 가슴을 찌르고 이별하고 마음이 찢어졌다
모든 것은, 균열조차도 작은 균열에서 시작됐다
AND



냉혈한 소리를 들어도
사람 피는 36.5도
예수님도 부처님도
피 온도는 36.5도
미친 사랑의 온도도
고작 37.2도
돼지피를 굳혀서 끓이면 선지해장국
사람피를 굳혀서 끓여도 선지해장국
동물 피를 먹는 인간과
인간 피를 먹는 뱀파이어
한 번 몸 밖에 나와 굳은 피는
끓여도 다시 녹아 흐르지 않는다
피가 끓는 사람도 피 온도는 36.5도
라면물처럼 끓어보지도 못하는 인생
AND



싸늘한 내 마음처럼
싸박싸박 눈 내린다
비어버린 가슴처럼
눈 앞에 모든 것이 하얗다
누군가 지나간 자리마다
발자국 발자국 발자국
흰 발자국 가득한 세상에
네 발자국만 없다
AND

불온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는 애인이 없고
그녀 앞에 웃고 있는 나는 아내가 있네
성당에 다니는 그녀 앞에서
소주 한 잔 마다 성호를 그으며
주여 제 마음을 용서하소서
잠시후 술자리에 아내가 합류하고
소주 한 잔 마다 성호를 그으며
주여 제 마음을 용서하소서
너무 예뻐서 미운 아내의 친구를 용서하소서
AND

불륜

남들 다 출근하는 새벽 댓바람부터
모텔 앞 길가 아우디 A6 안에서
뭐가 그리 애틋한지
남녀가 서로의 얼굴을 안쓰럽게 쓰다듬는다
AND

터널

그저 걷고 있다
아니면 뛰고 있나
그러니 걷거나 뛰고있다
불 켜진 어둠속을
그저 걷고 있다
아니면 차로 달리고 있나
어쨌거나 걷거나 달리고 있다
환한 어둠속을
안온한 어둠속을
걷거나 뛰거나 달리고 있다
바깥이 어떤지도 모르고
터널 안에서
걷거나 뛰거나
내 힘도 아닌 힘으로
달리고 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