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

오늘은 카레를 먹을까
감자랑 당근을 씻는다
제주도에서 실려온 흙이
하수구로 빠져 나간다
하수도 바닥에 쌓였다가
홍수가 나면 바다로 간다
폭풍우에 실려 태평양을 건너간다
전남 무안 생산이라고 적혀 있지만
어쩌면 중국에서 서해를 건너왔을 양파껍질도 마찬가지다
돼지고기라고 다를까
카레가루라고 다를까

캘리포니아산 오렌지를 먹는 우리는
다 어디로 흘러갈까

뱅글뱅글 생각하는 동안 완성된 카레를
맛있게 먹는 수밖에 없다
AND

봄봄

봄이 봄봄하는 날
물가를 거닐었다
개구리들은 부둥켜 안고 짝짓기를 하고
돌틈에 홀로핀 제비꽃이 예뻤는데
당신이 없어 나만 서글펐다
AND

봄 - 시마자키 도손

2017. 4. 22. 20:46

-> 아오키 군은 자살을 했다. 

 

"아오키 군, 자네는 왜 이런 곳에 와 있는가?"

 묻는 사람이 있었다.

 "왜라니,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닌가?"

 이렇게 아오키는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방의 창문에는 쇠로 만든 격자문이 끼워져 있었다. 책장이 있어야 할 곳에 책장이 없고, 그 대신 천연 암석이 있었다. 그 바위 끝에는 지금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바위가 위험하게 걸려 있었다. 방 입구의 열린 곳으로 호랑이 우리가 보이고, 게다가 그 우리는 이쪽을 향해 문이 열려 있었다. 옆 창에서 무엇인가 들여다보는 것이 있는데, 자세히 보니 무서운 살모사였다.

 "여기가 어디지?"

 아오키는 모르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알 텐데-감옥이야."

 그 모르는 사람이 말했다.

 듣고 보니, 방은 단단한 철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오키 자신은 강철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솨사슬의 길이 이상으로는 걸을 수도 어쩔 수도 없었다.

 "왜 자네는 이런 곳에 와 있나."

 "나는 법에 어긋나는 일을 별로 한 적이 없어. 보게나, 나는 겁쟁이야. 강도질하고, 살인을 하는 그런 용기 있는 사내가 아니야. 나는 벌레를 죽여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그 정도로 용기가 없는 인간이니까."

 이렇게 아오키가 말했지만, 현재 감옥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여기에 와 있는가, 누가 묶어서 이런 감옥에 넣어 버렸는가, 그것은 아오키도 모른다. 자신의 집이다. 집이다라고 생각하는 동안에 어느새 이처럼 감옥 속에 들어 있었다. 방구석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기분 좋은 향연 흉내를 내며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무리들은 감옥의 간수가 지날 때마다 손을 모아서 합장하기도 하고, 고마운 듯이 인사를 하며 자칫 간수의 발을 받을어 보이는 우스운 흉내를 내곤 했다.

 변덕스러운 박쥐가 창으로 날아 들어왔다. '야 누군가 사바 세계에 있는 사람으로 이 박쥐 얼굴과 닮은 것이 없냐?' 라고 한 사람이 말하니까, '어디 얼굴을 보여라'라고 또 한 사람이 말을 꺼내서 각자 박쥐를 잡으려고 방안을 쫓아 다녔다.

 왠지 이 소란이 두렵게 느껴져서 아오키는 창 쪽으로 도망쳤다. 그는 자신이 쓴 초고를 읽을 참이었다. 철로 만든 격자문을 잡으면서 창 밖을 보았더니 쓸쓸하게 홀로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가슴 위에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여자다운 입술을 약간 내민 것은,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창백한 뺨에는 이제 예전의 향기가 없었다. '저런' 하고 앙쾨는 무의식중에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을 감옥 속으로 끌어들이려다가 잠이 깼다.

 

-> 기시모토는 살았다.

 

 "아, 나 같은 인간이라도 어떻게든지 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고 깊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유리창 밖에는 회색빛 하늘, 젖어서 빛나는 초목, 물안개, 그리고 쓸쓸하게 농가 처마 아래에 서 있던 닭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사람들은 빗속 여행에 싫증이 나서 대부분 기차 안에서 잤다.

 다시 쏴 하고 비가 내렸다.

AND



전생에 자살을 했다
벼랑에서 떨어지고도 살아 있으니
그제서야 꿈인 줄 알았다
한 여인을 사랑하였으나
그 끝에 닿지 못하였고
밥을 굶지는 않았으나
배불리 먹지도 못했다
세상에 점 하나 남기지 못하고
두려워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이생이라고 다를까

사랑의 언저리를
생의 귀퉁이를
꿈이 꿈인 줄 모르고

그저 맴맴돈다
AND

먹는 인간 - 헨미 요

2017. 4. 18. 12:07
자그레브에서는 동물원 앞에 있는 식당 '막시밀'이 난민을 위한 무료 급식소가 되어 있었다.
묘한 광경이다.
동물원에서는 곰이 구경꾼에게 빵을 얻는다. 바로 바깥에서는 어마어마한 수의 인간이 목숨을 이어 가기 위해 음식을 얻으려고 줄에 선다. 내가 찾아갔을 때 메뉴는 독일이 원조한 깡통 수프와 폭찹이었다. 이 곳에 이슬람계 난민이 오는 경우는 드물지만, 사라예보에서 탈출했다는 예순여덟 살의 여성 이슬람교도인 니콜라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은 채 돼지고기를 씹어 먹고 있다.
식욕이란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순수'한 민족이나 종교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보스니아의 이슬람계 주민들도 원래 10~15세기 발칸 지방에서 성행한 보고밀파 기독교도였지만, 그 뒤 터키의 지배하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나쁠 리 없다.
먹고사는 것이 민족이나 종교에 대한 자부심보다 중요하다.
유엔 관계자에 따르면, 사라예보 동물원의 굶주린 곰은 자그레브 동물원으로 이송되는 길에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날벼락이다. 하지만 지금은 곰보다 인간이 문제다.
"일본으로 데려가 주시오. 먹을 것만 주면 화장실이든 하수구든 다 청소할 테니까."
예순한 살이라는 난민이 나한테 매달리면서 따라왔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부고이노에서 탈출했다는, 오른쪽 눈이 부연 남자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아내를 두고 왔고. 난 이제 사바 강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자그레브 중심부에서 네오고딕 양식 첨탑으로 하늘을 찌르고 있는 성슈테판 대사원.
이 사원도 유고 출신 가톨릭교 수녀인 마더 테레사의 내방을 기념해, 주로 거지나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무료 급식소를 두고 있다.
1991년에 세르비아 측과 전쟁 상태로 들어가기 전에는 하루에 두세명이 올까 말까 했는데, 지금은 급식 인원인 80명을 넘는 굶주린 사람들이 찾아온다.
수녀에게 취재 요청을 거절당했지만 나는 주린 배를 안고 불안한 발걸음으로 언덕을 오르는 남자들 틈에서 급식소에 들어갔다.
문이 열리고 겨우 5분 만에 사람들로 꽉 찼다. 문이 닫혔다.
먼지, 땀 냄새, 게다가 지독한 썩은 내 때문에 나도 모르게 기침을 마구 해 댔다. 벽에 걸린 마더 테레사와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이 때에 전 남자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크로아티아인만이 아니라 다양한 얼굴들이다. 터키계 얼굴이 보이고, 콧수염을 기른 옛 신사는 세르비아계였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수프 냄새가 난다 했는데, 수녀가 "여러분, 이걸 들어야 식사할 수 있습니다." 하고 운을 떼더니 성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식사가 보류되었다. 누군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다음에는 기립해서 찬송가를 부른다. 숟가락을 꽉 쥔 남자들이 노래를 부른다. 악에 받친 듯 숟가락을 휘두르면서 노래하는 남자도 있다.
아니, 입만 뻥긋거리는 사람이 많다. 다리를 떠는 사람도 있다. 오로지 의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훌륭한 자선이지만 좀 잔혹하다. 바로 음식을 나눠 주면 안 될까?
11세기 기독교회의 동서 분리, 반목, 스라브족의 분열, 식전 의식이 이런 분쟁의 깊은 뿌리에 얽혀 쓸데없는 기억을 되살리지 않을까? 신앙이 없는 나로서는 조금은 지나친 걱정을 한다 싶은 사이에 찬송가가 끝났다.
아아, 그 뒤에 이어지는 남자들의 식욕은 대단했다.
다양한 민족의 피를 받은 각양각색의 얼굴들이 똑같이 맹렬하게 달라붙었다. 그러니 종파든 뭐든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직하구나. 왠지 성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빵이 왔다. 받을 수가 없었다.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의 손이 창 밖에서 뻗쳐 왔기 때문이다.

- 크로아티아 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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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삼 년의 풍요

어제 낮에 동생 아이 돌잔치에 갔다. 돌아가신 큰 이모만 빠지고 이모들이 다 모였다. 언젠가는 이모들이랑 부페를 먹은 적 있을텐데도 처음처럼 느껴졌다. 이혼한 전 막내 이모부도 빠졌다. 아버지랑 이모부들은 술을 마셨다. 이모들도 거들었다. 소고기며 초밥이 가득 담긴 이모들 접시를 보면서 '역시 이모들이 뭘 드실 줄 아셔.' 같은 멘트를 날렸다. 그렇게 잔치가 끝났다.
저녁에는 처부모님과 대기업 브랜드 한식 부페에 갔다. 꽉찬 사람들과 가득찬 접시들로 웅성웅성 풍요풍요 했다.
터질듯한 과식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과식했다. 가족의 증명은 과식이고 과식의 결과는 굵은 똥이다. 똥은 양변기 배관을 타고 바다로 간다. 물고기 밥이 되고 다시 무언가의 똥이 될까. 세계의 빈곤과 상관 없는 하루하루와 달갑지 않은 풍요를 견디기가 어렵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금 여기가 내 자리가 아니라는 기분에 휩싸인다. 나이 육십이 된다고 달라질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동료들이, 사람들이 두렵다.

'먹는 인간'에서 식욕이란 정직하단 문장을 읽었다.

돌아가지 못하는 이 생에서 나는 무엇에 정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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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번 국도

2017년 4월 11일 화요일 오전 11시 35번 국도
회사도 때려치고 정선에서 당신이 있는 강릉으로 가는 길
내 뼛 속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반칙 같은 날씨
이 생에 어디가 지금보다 아름다울까
만나면 부서질 환상속을 홀로 달린다
2017년 4월 11일 여전히 오전 11시 35번 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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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다

술이 더디다
시간이 더디다
나이를 먹어선가
세상이 할배들 자전거 굴러가듯 더디다
술 취한 내가 더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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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굿맨 브라운은 황혼녘에 쎄일럼 마을의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문간을 넘고 나서 젊은 아내와 작별의 키스를 나누려고 고개를 돌렸다. 페이스라는 이름에 잘 어울리는 그의 아내가 예쁜 얼굴을 길가로 내밀며 굿맨 브라운을 부를 때 그녀의 모자에 달린 분홍색 리본이 바람에 나부꼈다.

YOUNG GOODMAN BROWN came forth at sunset, into the street of Salem village, but put his head back, after crossing the threshold, to exchange a parting kiss with his young wife. And Faith, as the wife was aptly named, thrust her own pretty head into the street, letting the wind play with the pink ribbons of her cap, while she called to Goodman Brown.

 

-> 예전에 EBS 라디오에서 들었던 걸 오늘 읽었다. 첫 문단이 딱 맘에 들어서 원문을 찾아봤다.

AND

장마

이제 막 담배를 꺼내 물었는데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종이컵 안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네 얼굴이 커피색으로 번진다
어느새 세상은 잿빛이구나

흠뻑 젖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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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반부터 한 방 먹여주고 시작한다. 가슴속에 있는 얼굴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얼굴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도. 재미있게 읽었다.

 

64p. 베니치아 화가의 기법으로 그린 세큐레의 초상화가 있었더라면 12년이나 계속된 여행 중에도 고향에 두고 온 옛 연인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리운 여인의 얼굴이 가슴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면, 세상 어느 곳에 있든 그곳이 내 집이나 마찬가지니까.

 

299p. 죽기 직전. 유년기의 마지막 시절에 들었던 시리아 동화가 떠올랐다. 혼자 사는 노인이 한밤중 잠에서 깨어 부엌에 가서 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물 컵을 탁자에 놓는데 그곳에 놓여 있던 초가 없어진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실낱 같은 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노인은 그 빛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자기 침대에 낯선 사람이 손에 촛불을 들고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노인이 물었다. "댁은 뉘시오?" 그러자 그 이방인은 "죽음이다."라고 대답했다. 노인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는 "이제 왔군." 하고 말했다. 죽음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노인은 "아니야. 너는 다 끝나지 않은 내 꿈이야." 라고 단호하게 말하고는 이방인의 손에 있는 촛불을 단숨에 불어 껐다. 그러자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노인은 빈 침대에 들어가 다시 잠을 청했다. 노인은 그 후로 20년을 더 살았다. 

AND

20170404까지 사진

사진 2017. 4. 4. 20:15

강릉 포남 1주공
저만치 가을 1
저만치 가을 2
맘에 드는 컷.  핀트 나감.
균열 - 정선 조양강
강바닥
강릉 남대천 버드나무

AND

수선화

나는 이제 시작하려는데
너는 꽃잎을 땅으로 기울이고
네가 시드는 일이 내 탓인 것만 같으니
너는 너만 사랑하다 저물고
나도 너만 사랑하다가 지겠구나
AND

비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어둠 소리
바다는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생명
너와 함께 했던 바다
갈매기가 소리지르던 바다
언젠가의 바다
그밤의 바다
기억속의 바다
지금은 네가 없는 바다
파도 위로 부서지는 빗소리
나는 물 속에서 비를 맞는 물고기
바다는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생명
AND

울다

인간의 한 평생 보다 오래된 버드나무 아래
봄이 올라오는 자리에서
당신은 울고 있다
어쩌면, 의 여지도 없이 울고 있다
버드나무 이파리 향하는 방향따라 울고 있다
벌들이 올해의 첫 번째 꽃으로 달려드는 시간에
억지로 짜내지 않아도 모든 풍경이 글이 되는 때에
봄비 그치고 오만데서 봄이 쏟아지는 순간에
당신은 봄을 맞으며 울고
나는 우는 봄을 바라보고 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