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씨팔, 욕을 그만 할랬더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 아이고네
아이고, 씨팔
이러니 달라진 게 없네
아이고는 누가 잘못 됐을 때나 하는 말인데
그럼 누가 죽기라도 했나
북망산천을 본 사람이 있나
지옥을 살아도 북망산천을 모르니
어야디야는 그저 노래가락 속의 말일 뿐
아이고, 씨팔, 어야디야
AND

가끔은 부끄럽다


가끔은
아무일도 없이 지나간 하루가
별일 없이 잠자리까지 온 내가
부끄럽다

가끔은
너에게 전화를 하는 일이
세상과 상관 없는 내 사랑이
부끄럽다

가끔은
영원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일이
그 영원을 너에게 고백하는 일이
부끄럽다

가끔은
이 가끔이란 말이
부끄럽단 말의 반복이
부끄럽고 부끄럽다

가끔은
세상에 부끄러운 일이
세상에 부끄럽고
그걸 생각하는 내가 부끄럽다

그래서 가끔은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이 싫고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 나도 죽도록 싫고
그저 살아 있다는 게 부끄럽다


AND

생일


이유도 모르고 태어나
운좋게 살아남아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축하란 말을 듣는 날
AND

내가 온전할 때


똥 눌 때
눈꼽 뗄 때
코딱지 먹을 때
침 흘리고 잤을 때
자꾸 네가 생각날 때
나는 내가 동물 같다

비데가 시원할 때
비눗물로 세수할 때
코 푼 휴지 버릴 때
잠옷을 챙겨 입고 잘 때
자꾸 네가 생각날 때
나는 내가 인간 같다

나는 널 생각하는 일로만 온전하다
AND

감자탕을 먹다 - 감자탕의 반대말 -

감자탕을 먹는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돼지 등뼈
이국적인 감자탕
이국의 반대말은 뭐지
그게 뭐든
반대말을 잇고 또 이으면
스페인과 나를 이어주는
눈 앞의 등뼈처럼
어렵지 않게 너에게 닿을 것 같다
이름만 겨우 아는 앞사람에게
너에게 못한 말을 쏟아내고
그리움만 남은 밤
그리움의 반대말은
나인가 너인가 아니면 감자탕인가
밥까지 볶아 먹고
상 위엔 김가루가 붙은 숟가락
김가루의 반대말도
숟가락의 반대말도
감자탕의 반대말도
결국엔 너


AND

살아야한다


내 나이 마흔
나 태어났을 때 살아있던 사람 절반 이상이 죽었다
40년 동안 죽은 사람도 많지만 새로 태어난 사람은 더 많다
그러니 세상이 그만큼은 바뀌었을까
오직 죽음으로만 한 시절이 끝나고
나 사는 동안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존재가 태어나서 가는 길은 하나고
도처에 편의점처럼 쉬운 죽음이 있음에도
나와 내 주변의 죽음은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쉽지 않다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을 느티나무 아래서
해 넘어가는 쪽을 보며 마른 담배를 피운다
독한 연기가 가지에 닿고 잎에 닿는다
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살아서는 세상이 바뀌지 않음을 알아도
살아야한다
죽을때까지는
살아야한다
AND

가을밤


씨팔, 그게 아니라고
당신이 틀렸다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려다
꿈에서 깼다

가슴 속 하나 가득
풀리지 않는 덩어리

미처 끝내지 못한 말이
공기 속을 떠돌 때

벌떡 일어난 내 등을 쓰다듬는 당신의 손
걱정하는 당신 이마를 어루만지는 내 손

우리들의 가을밤은

그것이면 되었다
그것으로 족했다
AND

말장난


말이 없는 말
소용 없는 소용
진실이 아닌 진실
존재하지 않는 존재
진심이라고 믿는 진심
질리도록 지겨운 진리
글을 잊은 문장은 말이 없고
위안인지 망각인지 양귀비 꽃말같은 밤
무력감에 마신 술 기운에 더 무력해지는 밤
당신 때문에 아닌데 다 당신 때문이라고 소리질러 버리는 그런 밤
말장난 같은 밤
AND

 지진 때문이 아니라 지진 후의 막막함 때문에 잠이 안온다. 정선엔 진동이 없었다. 강릉, 속초에선 느꼈다고 한다. 나는 페북에서 지진 소식을 보자마자 아내랑 원전부터 떠올렸다. 지진 소식이 나올까 싶어서 튼 테레비 뉴스에선 자막으로만 원전은 정상가동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이 정도 지진이면 계속 지진 관련 방송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tv에선 대통령과 여야 대표가 만난 그림이 오랫동안 나왔다. 물 사러 밖에 나왔다가 술 마시던 동료들이랑 잠깐 함께 했는데, 직접 나에게 오지 않은 지진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게 싫었지만 결과적으론 나도 마찬가지다.

 늘 '나도 마찬가지고 이런것이 인간이라 어쩔 수 없다.' 에서 멈춘다. 세상에서 가장 논리정연한 말로 무너져가는 이 나라를 비판하고 비인간적이고 비논리적인 세상을 개탄하는 일이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견디다 못해 손에 돌멩이라도 집어드는 일과 곡기를 끊는 일도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현실은 그저 현실. 그렇다면 나를 바꿔야할까? 바뀐 나도 그저 나. 1분 전의 나, 1분 후의 나, 지금을 흐르는 나.

 어제 영화 밀정을 봤고 오늘 문혁과 인간에 대해서 쓴 위화의 산문을 몇 개 읽었다. 그 영향으로 가끔 하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된 나는 그저 나.

 새벽에 일어나 우물에서 물을 긷고 - 또는 냇물을 떠다가 -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데우고 물이 끓으면 표주박에 맥심 모카골드 인스턴트 커피를 끓여 먹는다. -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면 나무도 미리 해둬야겠지. 이 커피 참 맛있겠다. -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옛날의) 방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저런 이유들이 있지만 결국 제 좋은대로 할 뿐이다. 인간이란 그러한 자기를 인정해 주고 좋아해주는 사람,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는다.
 
 산다는 게 그저 이런 것 같다.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AND

드라이브


나는 앞차를 따라가고
뒷차는 나를 따라오네
나는 두 차 사이에 갇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길을 가네

앞차는 그 앞차를 따라가고
뒷차 뒤에는 또 뒷차가 있네
서로가 서로에게 갇혀서
벗어날 수 없는 길을 가네

내가 앞차를 앞지르고
뒷차가 나를 앞질러도
아무리 앞뒤가 바뀌어도
선두도 없고 끝도 없는 길을 가네

나를 앞지르던 뒷차가
건너편에서 오던 차와 부딪쳤네
선을 넘는 것은 모험
안전한 모험은 없네

아, 모순 없는 인생

순간 사라질 순 없기에
계속 이 길을 가네
삶은 살아야하는 것이기에
계속 이 길을 가네
AND

드라이브 - 9월 닭목령 -


천지사방에 나 밖에 없는 410번 지방도
짧아진 해의 끝을 쫓아 너에게 가는길
물큰한 여름 풀냄새는 빠르게 스치고
가을은 네 기다림처럼
한 잎 한 잎 내 앞에 내린다
AND

풍요


내가 싼 똥을 보고
어제 이렇게 많이 먹었나
스스로 놀랄 때가 많다
AND

툭,

툭,
누군가 내뱉은 말을 듣고
툭,
가을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이
툭,
비밀을 털어 놓는다
툭,
빗발치는 빗소리처럼
툭,
끊어진 사랑이여
툭,
주저앉은 마음이여
툭,
쉽게 부서지는 것들이여
툭,
떨어지는 눈물이여
툭,
털어낼 수도
툭,
놓아버릴 수도 없는 삶이여
AND

36.5도


며칠 째 몸이 뜨겁다는 당신 귓속에 체온계를 넣는다
딸깍, 36.5도

안심하고 기분이 좋아져 내 배꼽에 체온계를 넣는다
딸깍, 36.5도

- 더러워
- 배꼽에 때 파내면 병 걸려

당신 배꼽에도 체온계를 넣는다
딸깍, 36.5도

- 누가 그래
- 밤에 발톱 깎으면 안되는 거랑 똑같은 거야

당신 발에 체온계를 갖다댄다
딸깍, 더러워

더럽다며 깔깔 웃는 당신과
미신처럼 맹목적으로 배꼽을 맞추며 산다

36.5도 짜리 사랑을 한다
AND

씨팔, 암


암에 걸릴 것 같은 세상에서
암에 걸릴 것 같은 일을 당해도
암에 걸릴 것 같다는 말은 하지 말자
암에 걸려서 가진 놈들만 배불리지 말자

씨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세상에서
씨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일을 당해도
씨팔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지 말자
옆에 있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그 소리를 듣게 하지 말자

씨팔, 암에 걸리지 말자
AND

반환점


보고 제출 요청 알림
기안 검토 협조 결재의 삶

장복중인 항생제처럼
더 곪지만 않도록

반복반복반복

마음에 부레가 생기고
부력을 갖게 됐네

나무 토막 하나 없이
바다를 떠도는 조난자처럼

반환점을 찾아
허공을 떠도는 신세

예정된 하루와
끝을 알고 하는 사랑
그리고 세상이 바라는 생각

반환점으로 향하는 삶은 가짜입니까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