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풀들은 낮은 곳만 봅니다
잎 끝에 맺힌 이슬과 비 개인 오후의 달팽이
걸음마를 연습하는 작은새와 사이가 좋습니다

무관심의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가장 낮은 곳의 삶을 봅니다
두더지에게 잡아 먹히는 지렁이
어린아이의 장난에 목이 잘린 개미
누군가의 슬픔이 떨어져 만든 눈물의 웅덩이를 봅니다

그렇게 낮은곳을 지키다
위쪽 공기가 궁금해서 기지개를 켭니다
허나 어느 농부가 휘두른 예취기 날에 발목만 남습니다

이슬이 서리가 되고
달팽이가 이웃마을로 떠나고
작은새가 어미새가 되어도
어린 풀들은 계속 낮은 곳만 봅니다
AND

씨팔


설거지를 하다가
당신과 내가 저녁 먹은 그릇을 부시다가
부서진 사람과 온전히 남은 컵라면을 떠올리고
불의에 맞서지 못하는 불의를 가진 내가 얄밉고 허투른 말장난이나 생각하는 내가 답답하고
인간이 멸망해야 한다는 소리나 입에 달고 사는 내가 싫고
심장을 꺼내 포수에게 던졌다는 어느 야구 선수가 부럽고
아들이 취직했다고 기분 좋아서 매일 술 드신다는 아버지 얼굴이 생각나는데

수고했어,
당신의 한 마디에
먼저 했던 생각들이
건조대 위의 접시마냥 다 말라버린다

씨팔(18), 심정이 에잇(8)이다
AND

떼~내


발에 걸린 돌부리
걸리적거리는 장화끈
뒷목을 건드리는 새옷의 상표

간섭만 하는 엄마
돈 빌려달라는 친구
월급 안주는 사장님
내 맘에 안드는 대통령

몹쓸 인연에 보고파 흘리는 눈물
모래 위에 쓴 편지와 떨어지지 않는 미련

떼~내

힘든 하루가 그 사람 탓인것 같으면
막연한 기다림이 가슴 끝을 막막하게 하면

떼~내

어차피 떨어져나갈 목숨만 남기고

마카 몽조리 떼~내
AND

환절기

흰색 구두와 흰색 운동화가 나란히 오후를 지나친다
낭창낭창 경쾌한 발걸음이 부러워 고개를 들어 뒤를 쫓는다
젊은 연인은 손을 잡고 계절이 바뀌는 쪽으로 사라진다
다음으로 다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청춘
앞으로만 앞으로만 돌아보지 않았던 그 시절
그리워 그리워 먼 데 석양을 바라보다가
눈이 부셔 눈이 부셔 눈을 감는다
한낱 인간이 대체 무엇을 멈출 수 있냐고
나를 조롱하는 환절기의 밤공기가 코 끝에 닿는다
여름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이 버겁다


AND

텅빈


텅빈 철봉
텅빈 그네
텅빈 시소
텅빈 미끄럼틀

혼자서 공을 차는 아이
텅빈 골대를 맞고 나오는 공
고개를 숙인 아이
몇 번이고 텅빈 그물을 가르는 공

이내,
텅빈 초등학교 운동장
AND

사랑이 문제


인간을 사랑한 선녀
수녀를 사랑한 스님

우리 엄마는 세컨드
이름도 모르는 장모님 애인

아이들 다 크면 이혼 하기로 한 부부
나이 60 먹은 아들에게 나가서 차 조심하라는 노모

남편이 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남편
침 맞으러 한의원에 갔다가 한의사와 다른길로 가버린 아내

얼굴도 못 본 여인 때문에 평생 안 읽던 책을 읽는 청년
언젠가 만날 그 사람을 위해 매일 피아노를 연습하는 소녀

세상사 모두 사랑이 문제
AND

유령


알콜이라는 유령이
내 마음속을 돌아다닌다
술이 덜 깬 채 일어나
처음 들이키는 것이 소주다
잠들기 전후가 일정해야
일관성 있는 사람
방 안엔 빈 술병만 어지럽고
해질녘 쪽창으로 스미는
붉디 붉은 당신 생각

당신이라는 유령이
내 마음속을 돌아다닌다
AND

연중무휴


휴일 고속도로엔
자동차가 개미떼
사과 장사 트럭엔
매일 새 사과가 가득
등산복 창고 대방출은
장소만 바꾸며 계속
인간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을 아파트 광고
풍년든 해 벼이삭처럼
흔해빠진 물건들

너무 많은 사람
너무 많은 사랑
너무 많은 기대
너무 많은 비참
너무 많은 희망
너무 많은 절망

사람들이 모두 지겹다고 하는 것
그저 안타까워 마음만 뒤척이는 것

너무 많은 너
너무 많은 나
너무 많은 우리
다시, 너무 많은 사람

연중무휴의 생

AND

새똥

새똥을 맞았다
어깨 위에 툭 툭,
회색 동그라미 두 개
기척도 없이 왔다가
모습도 보이지 않고
울지도 않고 떠난 새
황급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봐도
보이지 않는 당신
AND

좋은날


어린 옥수수 다 자빠지고
밭에 씌운 비닐 다 날아가
당산 나무에 귀신처럼 걸렸다
비닐하우스는 장풍을 맞았고
내 가슴도 같이 무너져 내렸다

나 몰라라, 바람 지맘대로 떠나고
오늘은 농약치기 좋은날
약 먹고 죽기도 힘든날
나 죽어도 계속 살아갈 풀을 잡아야지
내 기분 아랑곳 않고 쌩쌩한 벌레를 잡아야지
내 마음 다잡아야지

약냄새에 갈곳을 잃은 흰나비 내 주위를 맴돌고
홧김에 마신 술에 속만 아프다
AND

갑각류


붉게 피어오르는 생이 있고
껍질 채 붉어지는 죽음도 있다
너의 붉은 눈물을 뿌리친 그날부터
붉은 얼굴로 네게 등을 보인 그날부터
내 피는 차가운 푸른 빛
게장을 먹으면 몸이 붉어진다
갑각류 알러지가 생겼다
붉게만 붉게만
사멸하는 사랑이 있다


AND

재산


VIP 카드
통장 잔고
골프 회원권
고급 자동차
강변의 아파트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 하나 못 가졌지만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은 당신이 내 전재산
AND

좋다


나는 나 좋다는 사람이 좋다
근데 나 좋다는 사람이 없다
내가 먼저 네가 좋다고 하면
너도 너 좋다는 나를 좋아할까
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이지만
네가 너무 좋다

AND




봄 산에 나무들이
때맞춰 때맞춰
꽃을 피운다
벌이 날아들고
바람이 불고
꽃 지면 열매를 남긴다
꽃은 때를 놓치는 법이 없다

나무 아래 이끼도 제 꽃을 피우는데
나는 손에 쥔 열쇠를 찾아 헤매고
대문 앞에 둔 택배를 분실하고
두 눈 뜨고도 당신을 잃고
내 마음속에 나는 없고
때맞춰 울줄만 안다

어쩌겠느냐
어쩌겠느냐

때맞춰 울기만 한다



AND

용서


절실하지 않은 삶이 있을까

너는 삶이 절실하냐고 물었다
나는 쉽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너는 다른 길로 갔고
나는 절실함을 잃었다

내게 가장 절실했던 네가 떠나고
내 삶은 그저 저물어가기 위해 절실한 것

기억이 무너지도록 술을 마시고
해질녘 술이 깨고서야

용서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절실하지 않은 삶이 있을까
AND

우리들의 실패(모리타 도우지 노래 제목)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그러니 성공은 실패의 자식이다
내 신체적 결함과 관계 없이
그저 날 닮으면 좋은 것이 핏줄인데
실패한 부모는 어째서 자식의 성공을 바라나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지 않고
죽음만이 모든 존재를 관통하는 평등한 실패다
바나나맛 우유엔 바나나가 안 들어갔고
성공이란 향기로 실패란 실체를 가릴 수 없다

오늘, 성공이란 말은 우리들의 실패
실패한 우리들이 성공이란 말로 대를 잇는다

과연 실패의 어머니는 누구인가
AND

귀통령


뽀로로는 초통령
소녀시대는 군통령
박근혜는 대통령, 씨팔

초통령도 군통령도 대통령도
세월따라 유행따라 바뀌지만

귀요미야,
너만은 변치않는 나의 귀통령
AND

면접 준비


구두약을 산 게
샴푸로 머리를 감은 게
머리에 뭔가를 바른 게
수염을 남김없이 자른 게
넥타이까지 반듯하게 맨 게
남자 냄새 나는 스킨 로션 뚜껑을 연 게

줄담배를 피운 게

다 참 오랜만이다
AND

도화가 네 개


내 사주에는 도화가 네 개
연월일시에 다 바람끼가 들었다

복숭아 꽃 피는 계절이면
봄바람에 마음이 살랑거린다

매일 보는 아내가 유난히 더 예쁘고
봄치마 입고 거리에 나온 여인네들이 자꾸 맘에 걸린다

여러 사람 홀리는 사주로 태어나 그렇게 살지 못하고
산에 나물 하러 와서 막 피어오르는 작은 꽃들만 눈에 품는다

어느날 돌풍에 뿌리채 뽑히고
기울어진 나무들을 보고서야

내 인생이 삐딱한 이유를 알았다

바람 불어도 멀쩡한 건 잡목 뿐이니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살아야겠다

봄바람 지나고 나면 여름이고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기울어 있는 게 인생이다
AND

버스정류장


내리는 사람은 없고
타는 사람만 있는
버스 정류장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여학생
지팡이에 의탁한 할머니
마늘 냄새 풍기는 아저씨
장바구니를 든 아줌마

잠시 멈췄던 버스가 출발하면
나를 지나쳐가는 사람들 사람들
아, 목적지가 있는 사람들

마지막 차가 떠나고
풀이 죽은 정류장에서

다음차에는 다음차에는,
당신이 내리기를 기다린다

머리 위로 텅빈 바람이 지나간다
AND

이면
 

언제나 더 애정하는 것은
뒤쪽이나 반대편이다

달의 이면
태양의 반대편

포장마차 뒤쪽의 토사물
늦은 밤 골목의 노상방뇨

월요일 새벽의 청소부
식당 뒷문 앞에서 담배를 입에 문 주방장

나를 유혹한 낯선 여인의 뒷덜미
내 본능은 반대편도 본능

알몸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의 이기
당신의 전체에 선명히 자리잡은 생채기

솔직함에 대한 강박으로 당신을 힘들게 했지만
당신에게만 솔직하지 못했다

축제 끝의 폐허
열정 후의 죄의식

그래도 더 애정하는 것은
언제나 뒤쪽이나 반대편이다
AND

중년

자꾸 자꾸 까먹는 거 같아서
반쯤은 진담으로 치매란 단어를 입에 올려도
인생에 새로 배우는 것 보다는 기억이 더 많다
AND

이름의 이유


모든 존재에는 이름이 있고
모든 이름에는 이유가 있다

철수와 영희
도꾸 메리 쫑

목련 양지꽃 해바라기 가락지나물
해송 신나무 들메나무 물푸레나무

떡취 개미취 병풍취 단풍취
졸참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내 이름은 어일우

가슴에 담고 싶은 풍경을 만날 때마다
당신 머릿속에 내 이름이 맴돌기를
당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세 음절이
내 이름의 이유이기를

그리하여 내 이름은 어일우
AND

망루의 노래


여기,
부러진 날개로
망루에 오르는 이가 있다

저 바닥은 순응자들의 세계
날개가 퇴화된 신들의 세계
죽음은 없지만 삶도 없는 세계
정성이 지나쳐 욕심이 되어버린 세계

지겹도록 지기만하고
죽어 곤죽이 되더라도
최후의 인간이 되기 위해
마지막엔 날아 오르기 위해
유일하게 허락된 추락의 자유를 위해

이를 악물고
망루에 오르는 이가
여기,
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