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만에 다시 읽었는데, 예전 읽었을 때 만큼의 감흥은 없었다.
그렇지만 르 귄은 <르 귄>
p102 ~ p104
"당신은 우리가 왜 예언을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겐리?"
"전혀 모르겠습니다."
"잘못된 질문에 대한 답이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비를 맞으며 오세르호드의 어두운 숲속을 걷는 동안 나는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흰 모자에 감싸인 파세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두려움과 존경심을 느끼게 했다. 그가 맑고 친절하며 솔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마치 13,000년 전의 그윽한 시선처럼 느껴졌다. 아주 오래된 사고방식과 생활에 깊이 침잠해 있지만 상대방을 영원으로부터 똑바로 주시하는 위대한 동물처럼, 자기의식을 털어 버리고 그 완전하고 지고한 품성을 인간에게 주는 것 같은 완전함과 통일감으로 충만한 시선.....
숲속에서 파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려지지 않은 것, 그리고 예견되지 않은 것, 증거를 댈 수 없는 것,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 위에 서 있습니다. 무지는 사고의 기반입니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것이 행동의 근거입니다. 만일 그 모든 것이 증명되어 버리면 신도 없고, 종교도 없게 됩니다. 한다라교도 없고, 요메시도 없고, 마을의 신성함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입증되어 버리면 신이 있어도 종교는 없게 됩니다. ..... 제게 말해 주세요, 겐리.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에 확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알 수 있고, 또 무엇을 피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당신의 미래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죽는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대답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겐리.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 삶을 지속하게 하는 것은 바로 영원히 우리를 괴롭히는 '불확실성'입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무지' 바로 그 한 가지인 것입니다."
이 부분만이라도 영문판으로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말이 필요없는 17장. 오르고린 창조신화
태초에 얼음과 태양만이 있었다.
여러 해 동안 따뜻한 태양이 얼음지대에 있는 크리배스를 녹였다. 이 크리배스의 주변에는 커다란 얼음 덩어리들이 있었는데, 그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어느날 얼음 덩어리의 갈라진 틈으로 녹은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얼음 덩어리 중 하나가 말했다.
"나는 피를 흘리고 있어."
다른 얼음 덩어리가 말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어."
세 번째 얼음 덩어리가 말했다.
"나는 땀을 흘리고 있어."
얼음 덩어리들은 심연에서 기어 올라와 평원 위에 올라 섰다.
'나는 피를 흘리고 있어.' 하고 말했던 얼음 덩어리는 태양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 태양의 내부에서 배설물을 한 움큼 집어내 그 거름으로 지구의 언덕과 계곡을 만들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어.' 하고 말했던 얼음 덩어리는 얼음을 '호' 불어 녹여서 바다와 강을 만들었다.
'나는 땀을 흘리고 있어.' 하고 말했던 얼음 덩어리는 흙과 바닷물을 모아 그것으로 나무와 식물들, 그리고 약초와 벌판의 초원을 만들고, 또 동물과 인간을 만들었다.
식물은 토양과 바다에서 자랐고, 동물은 육지와 바닷속에서 헤엄치며 놀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모두 39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얼음 위에서 계속 잠들어 있었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 얼음 덩어리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태양이 자신들을 녹이게 했다. 그들은 고아 젖이 되었고, 젖은 잠자는 사람들의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자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났다. 젖은 사람의 아기만이 먹는 것인데 그것이 없으면 아기는 깨어나지 못한다.
첫번째로 깨어난 것은 에돈두라스였다. 그는 굉장히 키가 커서 일어서면서 머리로 하늘을 찢어 눈이 내리게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보자 그들이 움직이는 것이 두려워 한 사람씩 주먹으로 쳐서 죽였다.
그는 36명을 죽였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도망쳤다. 그의 이름은 하하라스였다. 그는 얼음평원을 넘어 육지로 달아났다. 에돈두라스는 그를 뒤쫓아 결국 그를 붙잡아 때려죽였다. 그는 시체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고브린 빙하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마지막 한 사람 막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에돈두라스가 하하라스를 뒤쫓아가자 재빨리 도망친 것이다.
에돈두라스는 꽁꽁 언 죽은 형제들의 시체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 달아난 막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매일 시체들 중의 하나가 말했다.
"그가 불타고 있어? 타고 있어?"
그러면 다른 시체들이 일제히 얼어붙은 혀로 말했다.
"아니, 안 타고 있어."
그런데 에돈두라스가 잠들어 있는 동안 케머가 시작되었다. 그는 몸을 뒤척이며 꿈속에서 큰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가 막 잠에서 개어나서 죽은 형제들이 말했다.
"그가 불타고 있어! 그가 불타고 있어!"
그러자 어린 막내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얼른 얼음집에 돌아와 에돈두라스와 하나가 되었다. 에돈두라스의 자궁과 육신에서 태어난 아이 중 두 명은 사람의 종족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된 어린 막내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햇빛 속을 걸을 때 그들을 뒤쫓는 어두운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다. 에돈두라스가 말했다.
"왜 내 아이들은 어둠의 그림자를 달고 다니지?"
케머 상대인 막내가 말했다.
"아이들이 모두 죽은 형제의 시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죽음이 항상 발뒤꿈치를 뒤쫓고 있어요. 아이들은 시간의 중간에 서 있답니다. 태초에는 태양과 얼음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었지요. 하지만 우리가 죽는 마지막 순간에는 태양이 제 몸을 삼켜버릴 테고 그림자는 빛을 잡아먹고, 그래서 얼음과 암흑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겁니다."
평론가들은 페미니즘 SF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보내지만 나는 르 귄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통찰력이 좋다.
어제는 무척 피곤했지만 오랜만에 활자들을 쭉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도 당신이랑 함께라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