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

1년에 두 번 구입하는 로또 복권이 1등에 당첨될 확률
10년만에 탄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을 확률
또는 하늘에서 떨어진 냉장고에 깔려 죽을 확률
하필 내가 지나가는 순간에 다리나 터널이 무너질 확률
연쇄살인자가 되거나 반대로 내가 당할 확률
살거나 죽을 확률
까마득한 확률
순식간에 사랑에 빠질 확률
그보다 빠른 속도로 사랑이 식어버릴 확률
그 사랑이 다시 불타오를 확률
아득한 확률을 바라거나
빗겨가는 일로 산다
AND

가을

모기를 잡았다
흰 벽지에 피가 묻었다
침으로 닦아냈지만 핏자국이 남았다
내 피이거나
당신 피이거나
둘이 섞인 피이겠다
당신과 나와 모기가 함께 여름을 났다
당신과 나만 남아서 함께 겨울을 맞는다
이 작은 방에 함께 흔적을 남길 것이다
AND

 토요일이 재덕이 삼촌 60세 생일이었다. 어른들 모시고 저녁 먹는 자리에 아내랑 같이 다녀왔다. 메뉴는 소고기. 요즘은 꼭 그렇지 않지만 특별한 날에는 소고기. 나한테 축하 한 마디 하라고 해서 길게 말할 건 없고 아버지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진심이다. 19살 차이나는 삼촌에게는 부담되는 말이었을까? 10년 전에 농사짓는다고 강릉 내려왔을 때 같이 살 게 해준 것 말고도 고마운 게 많은 삼촌이다. 재덕이 삼촌 밑으로 삼촌이 둘 더 있는데, 예전에는 별 감정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둘 다 각자의 자리에서 나한테 잘해줬다. - 나이 순서대로. ^^ - 나이드신 분들이 많아서 질질끌지 않고 짧게 끝났지만 아내가 고생이 많은 자리였다. 가끔 발생하는 시월드 자리에서 방긋방긋 웃는 아내가 고맙다.

 작은 엄마가 생일 취떡을 잔뜩 싸줬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이 먹을 게 별로 없던 시절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늘 아침까지 맛있게 먹었다. - 냉장고엔 아직 남아 있다. - 삼촌이랑 작은 엄마부부는 쯕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회사에서는 계속 화가 난 상태다. 화가 나서 오늘 새벽에 짐 싸서 내려왔다. 계속 정선에 있게 되더라도 출퇴근 할 계획이다. 참다참다 갑질 신고도 했다. 너무 많이 참아서 병이 왔다. 주말 내내 유투브 보면서 짜증만 냈다. 잠시만 틈이나면 회사에서 짜증났던 일이 머릿속을 가닥 채운다. 내 짜증을 내가 아니라도 컨디션 안좋은 아내가 듣는다. 너무 바보같다. 어제도 원래는 오늘 아침에 정선 가려다가 아내한테 너무 악영향만 가는 거 같아서 자녁에 정선 올라왔다가 미친놈 만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

 화가 가라앉질 않는다. 지난 목요일엔 옆방 팀장 하나가 손가락을 까딱까딱 하면서 나를 불러서 손가락 잘라버릴까 생각을 했다. 산불진화 장비를 사는데 동료가 그 물건이 맞다고 해서 샀더니 다른 업체 제품이었다. 금요일에는 퇴근하고 천금같은 내 시간에 물건 찾으러 관대에 들렀는데 알고보니 강릉원주대였다. 이 건도 내가 낮에 동료에게 주소 보여주니 맞다고 했던 건이다. 아내는 몸이 안 좋다는데. 집에 있어야 될 시간에 엄한데 가서 30분을 헤맸다.

C8 싹 다 불질러버릴까.

상담 받으러 병원 가는 길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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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있고
당신이 있고
내가 있고
당신은 없고
내가 있고
세상이 있고
내가 없고
세상이 있고
내가 없어도 세상이 있고
당신이 없어도 세상이 있고
당신과 나는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세상과 세계는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나 이외의 세계에도 당신은 있고
당신 이외의 세계에도 나는 있고
나를 제외한 세계에도 내가 있고
당신을 제외한 세계에도 당신이 있고
당신과 나는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있음과 없음은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나는 어디 있는지 당신은 어디 있는지
사람들은 다 어디 있는지
세계는 어디 있는지
찻잔 안에 있는지 하늘 아래 있는지
찻잔과 하늘은 같은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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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게 대충 살기 위해서 회사를 계속 다니기로 했다. 간절하게란 말이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대충살기 어렵단 뜻인가? 정년이 보장된 회사를 그만두면 돈 문제가 간절해진다. 어느날의 메모에 생활의 동력이 없다,고 적었다. 대충 산다면 그런 거 없어도 된다. 그저 대충 살기 위함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어제 빗속을 걷던 모자간의 대화를 들었다. <엄마, 난 먹을 게 없어지면 그냥 자살할거야. 야, 그땐 농사지으면 되지.> 돼지열병에서 시작된 대화였겠지. 그때가 오면 농사는 마음대로 지을 수 있나? 아들보다 엄마쪽이 순진하단 생각을 했다. 살던대로 살다가 다 같이 죽는 게 대충 사는 거 같다. 세상의 비참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조카뻘의 회사 동료 하나가 자기는 다 같이 멸망하는 건 상관 없다고 했다. 그게 대충 사는 것이겠지. 

하던 일 계속하면서 지금 사는대로 사는 것. 서초동이나 광화문에 나갈 사람은 주말마다 나가고, 먹방 유투버들은 계속 열심히 먹고, 비건인 친구는 계속 비건으로 살고, 내 아내는 우울과 괜찮음을 반복하고, 나는 술에 취했다 깼다를 반복하고, 시덥잖은 일기를 블로그에 계속 남기면서 사는 게 대충 사는 것이겠지.

온종일 천정만 들여다 보고 누워 있는 날이 있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싫은 것들 중에 내가 제일이다. 이렇게 생이 허무로만 밀려들기도 하는 여유가 있다. 나에게 그런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 싫다. 이 여유를 즐기는 게 대충 사는 것이겠지.

영화 조커를 보고 아내에게 조커처럼 살아야겠다고 했더니 조커처럼 살지 말라는 게 영화의 교훈이라고 했다.

대충 살기로 했다. 간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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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비를 먹다

반죽을 만든다
전라도 밀가루와 강원도 수돗물
이런 이십일 세기
달걀은 집에 없고
소금은 깜빡했다
이런 살림살이
이런 정신머리
반죽이 손에 묻지 않을 때까지
뭐든 자꾸 치대면 정이 떨어진다
멸치 국물을 내는 동안
마늘을 다지고
감자 양파 호박 고추 대파를 손질한다
국물에 들어갈 순서대로 손질하고 싶은 내 마음의 순리
멸치를 건져낸 국물에 재료를 넣는다
어떤 모양이든 될 수 있는 반죽을 대충 뜯어 넣는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고
밀가루 반죽은 수면위로 떠오른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내 삶은 한 번도 익어보지 못했다
사랑의 모양이 아니라 이리저리 뜯긴 상처뿐이지만
호박을 더 작게 썰어넣을 걸 그랬다는 내 말에
그렇다고 하는
당신과 마주앉아 후후 불어가며 먹는
수제비는 사랑이니까
뜨거워 입천정이 다 까져도
당신이 맛있다고 하면
그게 사랑이니까
비가오든 안오든
뭔가는 먹어야 하니까
치댈수록 끈끈해지는 당신과
비 내린 다음날 수제비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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