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라 저래라

이래라 저래라가 많은 날이 있다
여기 주차하지 말라해서 다른데 차를 세웠더니
거기도 주차하지 마라
방금 담배를 한대 피우고 또 피우려고 했더니
여기서 담배 피우지 마라
여기 들어가지 마라
고기 뒤집지 마라
이거하지 마라 저거하지 마라
운전 똑바로 해라
담배 끊어라
골고루 먹어라
내 돈 내고 타는 택신데 뒷자리를 강요 받고
이래라 저래라
세상에 나와 50년을 살았는데
나이 먹을수록 남의 말 듣기가 싫은데
남들도 악의로 한 말이 아닌걸 아는데
이래라 저래라 이래라 저래라
듣기 싫은 나는
나는 어찌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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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엄마가 아버지 보고 갔다. 혼자 살때보다 말끔해진 아버지가 ‘여기가 서울 학교보다 좋다.’ 고 했다고 한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그 얘기를 듣고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서울 데이케어센터보다 지금 요양원이 더 좋다는 얘기다. 또 아버지 행색이 - 혈색과 차림새 - 좋아서 당연히 펑펑 울 줄 알았던 엄마가 울지도 않았다니 좋은 일이다.

 수요일에 요양원 간호 선생님한테 전화를 받았다. 요양원에서 6일간 관찰한 아버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면서 <불결행위> 란 말을 꺼내서 그 단어 때문에 충격 받았다. 아내 얘기로는 불결행위가 공식 용어라고 한다. 암튼 그 내용은 오줌을 아무데나 눈다는 것이었다. 이미 혼자 살때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한동안은 그러지 않았기에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 때문에 그런가, 생각했다. 자는 곳도 바뀌고 전화기도 없어지고 주위 사람들도 익숙하지 않을테니 당연한가, 생각했다. 그리고 걱정하고 걱정하고 걱정했다.

 어제는 엄마랑 작은 아버지 두 명이 아버지 얼굴을 봤다. 나는 그들을 요양원까지 안내만 해주고 아버지에게 얼굴을 보이진 않았다. 오늘은 나랑 아내가 아버지 만나러 갔다. 엄마에게 들은대로 아버지는 괜찮아 보였다. 혈색이 좋았고 옷도 말끔하게 입고 있었고 면도도 깔끔했다. 앞으로는 팬티에 똥을 묻히고 있을 일도 없으리라. 원체 까다롭지 않은 양반이라 요양원 생활에 금방 적응을 한 것 같다. 아버지는 강원도가 좋고 강원도 사람들이 착하다는 얘기를 반복했다. 횡설수설은 숙명이지만 본인이 고향에 와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치매가 끝까지 가진 않은 것이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아버지는 끝난 사람이 됐지만 요양원에는 요양원에서의 삶이 있다. 그렇게 삶은 계속되고 그 삶은 아버지가 ’그래도 살아야지‘란 말을 자주 한 것과 이어진다.

 오늘 아버지랑 30분 정도 같이 있었다. 앞으로도 시간 날 때마다 아버지 보러 가야겠다. 앞으로도 같이 가주겠다는 아내의 마음이 참 고맙다. 아버지를 만나는 횟수가 만나는 시간보다 중요하단 생각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계속되는 삶에 내가 있어야겠다. 집에서 요양원까지 걸어서 5분거리다. 직장도 요양원도 가까운 게 좋다.

 걱정했는데 아버지 잘 지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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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을 먹다

마지막 서울
마지막 백화점
마지막 기차역
마지막 냉면
마지막에 근접한 아버지와
냉면을 먹었다
마지막은 처음으로 이어지고
아버지에게 내 이름을 말할때마다
하얀 도화지에 새로 쓰여지는
나는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아버지는 그저 나의 아버지
계산을 하며 마음속으로만 마지막이네요, 인사를 남기는
사장은 내 얼굴을 모르지만
나는 사장 얼굴을 아는
단골에 근접한 가게에서
물냉면 곱빼기를 먹으면서
아버지를 부를 때
아버지, 아버지 두 번씩 부르고
두 배로 배가 부르고
두 배로 마음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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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냈다. 아버지는 2020년 여름에 이미 머릿속이 까마귀 고기를 먹은 상태였고 2021년 초에 정식으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오늘이 오기까지 엄마랑 나에게 긴 여정이었다.

수요일에 퇴근하고 강릉발 청량리행 기차를 탔다. 목요일에 청량리발 강릉행 기차를 아버지랑 같이 탔다. 힘들단 말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힘들다. 아버지는 기차에서 조금도 눈을 감제 않았고 양평 조금 지나서 도시 이미지가 사라지자마자 강릉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 냄새 타령을 했다. - 만종역 근처에서도 평창역 근처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아버지 나이 73세, 23년을 고향인 강릉에서 보내고 나머지 50년을 서울에서 살았어도 고향이 좋은건가? 생각했다. 오늘 오전에 아버지 태어난 동네까지 드라이브를 했다. 아버지는 본인이 거기서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것도 모른다. 그래도 <강릉> 이라는 단어 한 마디가 주는 포근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린시절을 보낸 곳은 몰랐지만 본인이 다녔던 초등학교는 알아봤다. 아직 치매가 끝까지 가진 않았다.

먼저 서울 왔을 때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일들을 했다. 통장 하나랑 신용카드를 없앴다. 아버지 명의의 휴대전화를 해지했다. 요양원에서 휴대전화 사용을 반대하기에 내 이름으로 번호 하나 새로 만들어서 아버지에게 주는 계획은 보류했다. 요양원에 44명의 노인이 있는데, 그들이 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니 요양보호사 선생님들 입장에선 끔(깜)찍하긴 하다. 어제 저녁에 작은 고모를 만났고 오늘 점심은 작은 아버지 내외랑 함께 먹었다. 고모도 삼촌도 숙모도 치매였던 할머니의 경험치가 있기에 -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거의 10년을 살았다. - 아버지의 치매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좋은 일이다. 아내도 나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멘트 - 일우가 고생이 많다. - 를 옮겨주면서, 정신줄을 완전히 놓치는 않은 것만해도 어디냐고 했다. 아내는 며칠 전에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아버지는 나 결혼하고 우리집에 처음 와봤다. - 엄마도 2012년에 한 번 와 본게 전부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한 번도 딸 집에 못 와봤다. - 아버지는 출가한 큰 아들 집에 처음 온 날 그 집에서 자고 다음날 아들 집 앞에 있는 요양원에 갔다. 뭔가 운명적으로 느껴진다.  

양말을 신으라고 했더니 장갑을 발에 끼우고 있던 아버지, 며느리를 사모님이라 부르는 아버지, 찬물에 믹스커피를 휘젓고 있던 아버지, 끓이지도 못할 라면을 사 놓던 아버지, 맨 얼굴에 면도 하느라고 일회용 면도기를 잔뜩 사 놓던 아버지, 치매 걸리고도 가끔은 막걸리를 사 마신 아버지, 바지 후크랑 모든 옷의 지퍼를 다 망가뜨린 아버지, 빤쓰를 안 입고 있을때가 많던 아버지, 나에게 ‘니가 고생이 많다’는 말을 많이 한 아버지, 나랑 있으면서 ‘엄마는?’ 이라면서 전처를 많이 찾았던 아버지, 나랑 같이 순대국도 먹고 해장국도 먹고 치킨도 먹고 커피도 먹고 서울에서의 마지막 밥으로 백화점 식당가에서 냉면을 먹은 아버지, 먹는 모양새가 많이 어설프지만 젓가락질은 여전히 잘 하는 아버지

우리 아버지 잘 지내야 될텐데… 이 말이 절로 나온다. 사랑이겠지. 사랑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사랑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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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빛 바랜 운동화를 꺽어 신고 장바구니를 든 노인
식빵 두 봉지 새우깡 두부 소주를 사는 노인
바지 주머니에서 꾸깃한 돈을 꺼내 계산을 하는 노인
느릿한 말투로 포인트 적립 번호를 알려주는 노인
말보다 느리게 준비해 온 검은 봉다리에 물건을 담는 노인
약간 구부정하고 얼굴엔 주름이 패인 노인
노인이란 말을 대체할 말이 없는 노인
신발은 한 켤레 뿐인지
식빵 두 몽지를 며칠동안 먹는지
외출용 바지는 단벌인지 지갑은 없는지
포인트는 얼마나 쌓였는지
아픈덴 없는지 같이 사는 사람는 없는지  
궁금증을 자극하는
먼데 혼자 사는 내 아버지를 닮은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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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취미/자작곡 2024. 1. 1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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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지난주에 또 길을 잃었다. 아버지 집에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신정동 파출소에서 전화 왔다. - 까치산역까지 걸어갔다가 방향을 잃고 신정동까지 갔을거라 추측해본다. - 아버지를 발견하고 아침 7시 30분에 전화해 주고 집에까지 데려다 준 친절한 경찰이 아니었다면 우리 아버지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요양등급 내용변경한 건 3일에 처리가 됐고, 이버지가 길을 자꾸 잃으니 요양원 진행을 서둘렀다. 아주 다행히 집 바로 근처에 있는 요양원에 빈 자리가 하나 있어서 입소(이용?)를 결정했다. 서류 준비 때문에 목요일 오후부터 바빴다.

 아버지 신분증을 엄마가 갖고 있어서 금요일 7시 차를 타고 경기도 오산에 갔다. 시속 110킬로 미터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눈을 감고 잠들면서 '기사와 나 뿐인 고속버스에서 운전자가 졸면 둘이 같이 죽겠구나' 단순 명료한 죽음을 생각했다.

 엄마는 제사 준비 중이었다. 제주(祭主)가 치매에 걸렸어도 본인 형님과 이혼한 전 형수님 집에서 지내는 제사가 중요한 삼촌들 꼴 보기 싫다. 점쟁이가 제사는 계속 지내는 게 좋겠다고 하니까 그 말 듣고 본인 몸이 엉망인데도 혼자서 제사 준비하는 엄마도 문제다.

 데이케어센터에서 아버지 데리고 나와서 은행 세 곳 들르고 요양원 입소용 건강검진 받고 고지혈증 약 문제로 의사랑 상담했다. 우체국에서 어떤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 어디 아프냐고 해서 치매라고 했더니 본인은 치매 안 걸릴라고 뭣두하고 뭣두하고 하면서 계속 말을 걸길래, '할머니도 치매 걸리고 싶어요?' 말할까 하다가 속으로 이 할머니도 치매 걸리길.... 하고 저주를 퍼붓고 말았다. 은행에서는 이름을 본인이 써야 한다고 하고 보험료 자동이체 때문에 전화한 콜센터에서는 치매라도 본인이 직접 전화해야 한다고 하고, 정신없이 다니다가 농협 체크카드 잃어버려서 농협 다시 들르고 자꾸 짜증이 치미는데, 아버지는 계속 멍하고, 중간중간 내가 목소리를 높일때마다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아버지를 보니까 더 화가 나고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아버지랑 밥 먹다가 순대국에 소면 사리를 두 번 넣어 줬는데, 너무 맛있게 먹길래 잘 드시니까 좋네, 진짜 좋네, 라고 했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진짜 좋다'는 내 말이 진심이라 눈물이 났다.

 고모(아버지 누나)가 전화해서 요양원에 가면 학대도 많이 하고 죽으러 가는거라던데 어떻하니, 하길래 엄청 짜증이 났지만 좋게 좋게 얘기했다. 전국에 장기요양인정자(아버지처럼 요양 등급 받은 사람)가 100만명 정도 된다. 고모 생각대로라면 나는 백 만명이 요양보호사한테 학대받는 나라에 살고 있네. 무지(無知)가 무섭고 본인 위주로만 생각하는 무지는 더 무섭다. 그리고 요양원에 가면 요양원에서 죽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죽으러 가는 거 맞다. 

 아버지는 자꾸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경기도 오산에 있고 엄마도 많이 아프고 앞으로 자주 못 볼거라고 말해줬다. 강릉으로 간단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강릉>이란 단어에 몰두했다. 치매에 걸렸어도 고향은 고향인가?

 회사에 일이 있어서 더 빨리 진행은 못하고 19일에 입소할 계획이다. 여기저기 전화하고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는 일이 너무 힘들다. 아버지 요양원 입소 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다. 서울 가는 것도 이번주면 끝이다. 아버지가 요양원에 가고 나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아버지 요양원 가고나면, 엄마가 괜찮은 사람 만나서 홀가분한 상태로 재혼해서 편하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 했다.  


많은 아버지 컷 중에 베스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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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35번 국도 강릉방향
굽이진 고갯길
얼었다가 녹아 흐르다가
다시 얼고
자동차 한 대가 미끄러지고
사람은 다치지 않고
흙먼지에 섞여
조금 더 녹아 흐르하다
다시 얼고
자동차 한 대가 미끄러지고
고라니 한 마리가 치여 죽고
피와 찢어진 가죽에 섞여
조금 더 더 녹아 흐르다가
다시 얼려다가
얼지 못하고 흘러 내리다가
첫 잎의 향기를 맡고
다시는 얼지 못하고
계속 흘러 내리다가
초등학교 앞
노란 가방을 맨 아이 발자국에
무심히 밟혀 사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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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0일이다. 지난주 금요일에 '1월 5일이구나, 벌써 새해가 5일이나 지났네, 5일씩 몇 번만 더 지나면 올해가 끝이네, 올해도 다 갔구나' 생각했다. 올해가 다 갔다고 생각하는 날짜가 나이 먹을수록 점점 빨라진다.

 토요일에 서울 갔다가 일요일에 돌아왔다. 아내랑 함께 했다. 아내 부모님, 아내 오빠 가족과 점심을 먹었다. 1월 13일 생일이 지나야 17살이 되는 조카 아이가 고등학교 조기 졸업하고 카이스트에 합격했다. 지나간 아버님 생일과 조카 아이 축하 식자다. 만 17세면 앞으로 10년 동안 놀고나서 앞으로 어떻게 살까 생각해도 좋겠단 생각이다. 종로 한 복판에 있는 중국집에서 이것저것 먹었는데, 크림 새우가 맛있었고, 아버님과 조카 아이가 짜장면을 많이 남겼다. 풍족함이 흘러 넘치는 시대지만 여전히 음식을 남기는 일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아버님, 앞으론 그러지 말자구요. 생애 처음 가본 블루보틀에서 커피까지 마시고 어머님이 싸주신 월병이랑 찹쌀떡 챙겨서 - 어머님 사랑 - 아내랑 신월동으로 왔다. 
 
아내는 오랜만에 시아버지를 만났다. 1박 2일 동안 아버지를 지켜본 아내는 아버지가 그럭저럭 심각하진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혼자서 못 지내는 사람이 됐을 뿐이다. 아버지랑 순대국집 두 곳에서 순대국을 먹었다. 두 곳 모두 주인이 나랑 아버지를 알아보는 집이다. 우리 아버지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도 알고 있는 집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야 별 생각 없겠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들의 시선이 부담 되기도 한다. 아내까지 셋이라서 이번 주말은 그 부담감이 강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랑 뭔가를 먹어야 하고 아버지가 순대국을 가장 무난하게 잘 드시기에 순대국 집엘 간다. 다음 주말에도 어쩌면 그 다음 주말에도, 내가 아버지를 만나는 모든 날에. 순대국은 실제로 우리 집안의 소울 푸드이기도 하고 - 엄마가 나 임신중에 순대국과 코카콜라를 많이 먹음, 네 다섯 살 때부터 가족 외식으로 시장에 순대국 먹으러 갔던 기억이 있음. - 뚝배기에 담긴 국밥 이미지 자체가 소울 푸드란 말과 어울린다. 일요일 점심 먹고 나서는 아버지랑 둘이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먼저 아버지랑 호수 공원 돌았던 게 언젠지 모르겠는데, 아버지는 확실히 그때보다 훨씬 멍한 사람이 됐다. 호수공원을 돌고 공원 옆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씩 마셨다. 예전에 스타벅스 돌체 라떼 같이 마셨던 게 기억났다. 아버지는 나에게 순대국과 스타벅스로 기억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게 잊혀질 것이다.

 뇌동맥류 수술을 했고 올해 또 칼을 댈 일이 있을 거라고 점쟁이가 말했다는 엄마, 위암 수술을 했고 치매에 걸린 아버지, 유방암 수술을 한 어머님, 심장이 뛰게 하는 보조기구 시술을 받고 담낭 제거를 기다리는 둘째 이모, 담당을 제거한 친구 어머니, 다리에 심각한 수술을 한 친구 아버지, 왼쪽 어깨를 올리지 못하는 친구,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친구, 다리에 큰 수술을 한 친구, 수시로 오줌을 누러가야 하는 또래 친구들, 갑작스럽게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렸던 나, 새해 들어 왼쪽 어깨가 아프더니 팔까지 저리기 시작하는 나, 40세 무렵에 노안이 시작된 아내, 암 수술을 받은 내 또래 사람들, 갑자기 죽은 40대 사람들, 점점 늘어난다는 2, 30대 치매 환자들. 늙고 병드는 일을 생각한다. 어디까지가 삶이고 어디까지가 삶이 아닌가, 언제부터 죽음이고 언제까지가 죽음이 아닌가. 

 45세, 어느날 갑자기 쓰러져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다. 혼란한 국제 정세와 내가 살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더 혼란하게 느껴지는 국내 정세를 생각하면서 짜장면을 많이 남긴 가족들과 끝까지 배가 고팠을 안네 프랑크 누나,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던 독립투사들을 생각하면서 언제든 이상하지 않을 나의 죽음 같은 걸 생각한다.

 가족 모임도 좋았고 아버지를 만난 것도 좋았다. 아내랑 함께 해서 더 좋았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시아버지랑 함께 있어준 아내에게 고맙다, 고 생각하면서도 급작스런 나의 죽음 같은 걸 생각하는 1월이다.

스타벅스 블론드 바닐라 더블샷 라떼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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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일부터 2일까지 아버지랑 함께 있었다. 오늘 첫 출근 했다. 아버지랑 3박 4일은 진짜 힘드네. 신년 카운트다운 할 때, 나는 연기대상 프로그램 틀어놓고 웹툰 보고 있었고 아버지는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랑 순대국, 치킨, 갈비, 삼겹살을 먹었다.

  31일 낮에는 동생이 아버지 집에 다녀갔다. 살아가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1일에는 목욕탕에 갔다. 
  1일 밤에는 뭔가 견디기 힘들어서 밤 11시에 잠든 아버지를 두고 집을 나와서 모텔에 가서 잤다. 2일 아침에 아버지는 내가 어제 같이 누웠었단 사실도 잊었다.
 엄마는 2일 낮에 막내 이모 - 내 사랑 명옥이 이모 - 랑 같이 다녀갔다. 막내 이모랑 살아가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아버지 보러 온게 아니라 많이 아픈 언니 보러 온 거였다. 아버지는 데이케어 센터에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 드시라고 고구마를 삶았다. 

 새해 첫 진료라 그런지 병원에 사람이 많았다. 두 시간 기다려서 아버지 뇌가 점점 위축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약간 바뀐 처방전을 받았다. 의사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의사 선생님 만난게 17시였는데, 아버지 뒤로 16명이 대기중이었다.

 아버지는 매운 양념 치킨을 잘 먹었고 얼큰 순대국을 제일 맛있게 먹었다. - 처음에 잘 못 먹길래 매운 건 시키지 말자, 생각했는데 뜨거워서 그랬던 거였다. - 목욕탕을 좋아했고, 목욕탕에 가서 보니 빤스를 안 입고 있었다. 엄마 언제 오는지 자꾸 물었지만 엄마를 만나지는 못했다. 내 동생의 존재를 잊은 줄 알았는데, 잊지 않았다. - 센터 선생님들 빼면 엄마, 나, 내 동생 이렇게만 확실하게 아는 것 같다. - 

 아버지는 증상을 늘어놓는 게 무의미한 완숙한 치매 환자가 됐다, 어느새. 아버지에게 섬망과 환청이 없어서 다행이다, 그나마. 

 12월 18일에 접수됐다고 연락온 요양등급내용변경에 대한 답변이 오지 않는다. 기다린다. 설이 2월 10일 경이니까 1월 중순까지는 공단에 연락하지 않고 기다려보기로 한다. 아버지가 갈 요양(병)원 알아보는 중이다. 엄마 마음이 편한 곳으로 하기로 한다. 아버지에게 요양원 얘기를 하면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알아서 하라고 한다. 아버지랑 오래 같이 있었더니 아버지한테 니가 고생이 많다, 고맙단 말을 많이 들었다. 알아서 하란 말에도 고맙단 말에도 맴이 찢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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