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와 악마

검은 날개의 천사가 라흐마니노프 2번을 친다
흰 건반이 날뛰는 동안 검은 날개가 펄럭인다
붉은 입술의 악마와 푸른 이빨의 천사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입을 맞춘다
입술이 닿았던 자리에서 내가 태어나고
내 날개 한 쌍은 각각 다른 색이다
협주곡 2번이 3번으로 바뀌고 음악은 멈추지 않는다
이곳이 악몽은 아니다
이곳은 현실도 아니다
왼쪽 날개를 펼치자 지옥의 방청객들이 고통을 노래한다
오른쪽 날개를 펄럭이자 천사들이 울부짖는다
다들 뭔가를 애원하고 바라지만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음악은 끝나지 않는다
나는 끝까지 날아 오른다
소리가 멀어진다
나는 천사인가 악마인가

AND

사랑 - 퇴근
퇴근 후 네가 없는 걸 알면서도 네 이름을 부르면서 집에 들어온다

사랑
내가 취해서 비틀거리며 돌아간 그 곳에 당신이 있있으면​

사랑
40년 넘게 사는 동안 
내 손이 예쁘다고 얘기한 유일한 사람이 당신

사랑​
북극은 바다 남극은 대륙
내가 녹아 너에게 닿는 것

사랑​
당신이 내 인생 최고의 환대

사랑
네가 내 복이고 내가 네 복이지

사랑
네가 뭐라고 날마다 이렇게 애틋하냐

사랑 - 이분법 -
세상의 이분법을 다 곱하면 은하계 끝에 닿고도 넘칠텐데
그 중에 나는 당신의 애인

사랑
혼자서 폭식을 할 때도 너를 생각한다

사랑 - 걱정
날 걱정해 주는게 너라서 좋다

사랑 - 연결
영원히 답이 오지 않아도 모든 순간에 연결돼 있다. 너와 나.

사랑 - 별 -
너라는 별의 이름을 알면
내가 그 이름이 될텐데

사랑 - 사진사 -
너를 카메라에 담는 게 내 일이다

사랑
누군가 나를 안아 줄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게 너였으면

사랑
내 엄지 발가락의 궂은살로 너를 긇어 줄까?
내 짓궂은 삶이 떨어져 나가도록

사랑
너는 나의 마지막 이름

사랑 - 물거품 -
너를 사랑하는 것 말고도 내 머릿속엔 몇 가지 생각이 있는데
너를 너무 사랑해서 다 물거품이다

사랑
너는 나의 프랙탈 반복되는 너를 설명할 수 없다

사랑
영업시간 이후에도 너랑 한 잔 더 마시고 싶다

사랑
나비 두 마리가 꽃 위에서 춤을 추다

사랑
영업시간 이후에도 너랑 한 잔 더 마시고 싶다

사랑
내 손으로 네 발을 감싸줄게

사랑
너는 나의 존재증명

사랑
너는 나의 생활

사랑
연애란 게 끝나는 순간이 있는데 우리에겐 그게 없다

사랑
구름이 있어야 파란 하늘이 더 푸르게 반짝이듯이 당신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한다

사랑
기억할 수 있을 때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를 하다

사랑
전화는 먼저 하는 사람에게 용건이 있으니
나는 당신에게 무슨 용건이 있을까?

사랑
두 개의 담배를 연달아 피우면서 너를 생각하다

사랑
사랑인가 늘 생각하지만
당신이 곤히 잠든 모습을 들여다보고
안심해서 잠드는 일이 사랑이다

사랑
나도 날 걱정하지 않는 이 세상에
날 걱정하는 사람이 너 뿐인 것

사랑
모든것을 기억할 수 없으니
당신의 한 때라도 기억하려고 한다

사랑 -조건
세상 어딘가엔 있다
나를 조건없이 좋아해 줄 사람이

사랑 - 이유 -
새출발이 필요하다고 하면 마누라라도 놓아주는 것

사랑
전세계에서 우리 둘만 아는거

신년
누군가에게 어떤 마음을 먹은채 한해가 가고
그 마음 그대로 새해가 온다

사랑
삶에서 사랑을 빼면 앎이 되는지도 모른다

사랑
바이칼호 1642미터 밑바닥에 앉아서 물 위에 숨쉬고 있을 너를 생각하다가 죽고 싶다

사랑
잠든 당신 배 위에 살며시 손등을 얹으면
온 세상이 그저 우리로만 통하는 일

사랑
나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너에게 돌아오긴 할거다

사랑
세상 일이 다 바보 같을 때
거기에 한 마디 더 덧붙혀도 되지만
네 생각을 하는 일

사랑
나이 40줄에 아내에게 잠투정하다

사랑
아무데도 기록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어딘가에 작은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 것

사랑
99렙을 찍고도 끝나지 않는 모험의 세계

사랑?
항상 사랑하고
너는 내 마음을 모르는 게 좋다

사랑
우연을 인연이라 하고 인연에 의지를 더해 불가피(不可避)가 되는 것

베스트
네가 세상 베스트

사랑
아내가 기운 내라고 했다
고마워서 기운이났다

사랑?
너에게 매몰되었다

사랑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영역이다

사랑
당신이 내 생에 유일한 낙관이다

사랑
내 믿음이 어딘가로 방향을 바꾼다면 당신을 향했으면 좋겠다

사랑
당신과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게 내 생활이다

사랑
해무가 바다를 애무하듯
당신 발바닥에 담배 연기를 내뿜고 싶어

사랑
사랑은 다른 말로도 사랑
몹쓸 이율배반

사랑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물러서지 않는 일

사랑
스물 네 시간 일 초라도
더 보고 싶다

사랑
너에게만 병적으로 파고드는 일

사랑
사랑이란 두 글자를 더 이상 적지 않는다고 멈추지 않는다

사랑
나이 오십에도 투정이 느는 일

사랑
당신이 살아있어 줘서 고마운 거

사랑
물음표가 없는 두 글자

사랑
니 안에서 내 손이 불타고 있어

사랑
언제나 지금이 더 좋다

사랑
어떤 말로 표현하든
아니, 말로 표현 못하더라도
너랑 같이 있는 게 제일 좋다

사랑
사랑해. 문자를 보내자
사랑해! ^^ 답장이 오고
하루종일 그 메세지만 들여다보는 일

사랑
분명, 네가 나는 아닌데
그렇다고, 네가 너도 아닌 것
우리가 남이 아닌 일

사랑
이상하게도
만취해서 잠들기 전 같이
제정신이 아닌 순간엔
항상 네가 떠오르는 일

사랑
감기에 걸린 전화기 너머의 네 목소리도 하루의 위로가 되는 일

이기심
감기에 걸린 전화기 너머의 네 목소리에 그저 내 삶의 위로만 받는 일

사랑 - 생각
나한텐 너 밖에 없다는 생각의 반복으로 산다

AND

 서울에서 2박 3일 보내고 어젯밤에 강릉으로 돌아왔다. 새벽에 다섯 번 깨고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했다. 피곤하다.

 23일 저녁에 아버지랑 치킨 먹었다. 올들어 세 번째인데 아버지가 먼저 두 번보다 맛있게 먹었다. 아버지 먹는 모양새가 어설퍼서 순살 치킨을 시켰다는 점은 섭섭하지만 24일 아침에 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반쯤 먹고 남았던 치킨도 다 먹었고 맛있다고 했기에 만족했다. 앞으로 아버지랑 치킨은 페리카나 순살 반반으로 고정하기로 한다.

 여러가지 정황상 아버지는 23일 오전에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못 찾았다. 나는 23일 밤에 친구랑 술을 먹고 친구네서 잤는데, 택시에서 내리고서 휴대전화 잃어버린 걸 알았다. 다음날 아침에 전화기 어떻게 찾을지 약간 막막했는데, 택시에 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카카오T 사용 기록을 ARS로 조회해서 택시 기사분과 통화를 했고 친절한 택시 기사분 집이 마침 신월 1동(아버지 사는 동네)이라서 파출소에서 전화기를 찾았다. 휴대전화 잃어버리기는 치매에 걸리나 안 걸리나 마찬가지네, 생각했다.

 23일에 나를 재워준 친구네 집은 역곡역 부근이다. 고등학교 때 이 친구네 집에 많이 갔다. 그때 친구는 온수동에 살았다. 서울에서 벗어났지만 삶의 터전이 많이 바뀌진 않았다. - 돈 없는 집들은 다들 조금씩 서울 바깥으로 밀려난다. - 술이 꽤 취해서 들어갔는데도 어렸을 때 느꼈던 특유의 친구네 집 냄새가 났다. 같은 사람이 살고 있어서 그렇다. 나이 먹고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네 집에 갈 일이 거의 없기에 집안의 냄새가 바뀌지 않은 점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친구한테 얘기했더니 그런가, 하고 말았다. 본인 집 냄새를 본인은 모르는 법이다. 나는 남의 집에 갔을 때, 그 집 특유의 냄새(atmosphere)에 대해서 얘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막상 우리집 냄새에 대해서는 들은 기억이 없다. 지금 엄마집에 가면 나는 냄새가 어릴적 우리집 냄새일까? 궁금하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아버지랑 목욕탕에 갔다. 아버지가 정말 오랜만이라고 하면서 좋아했다. 아버지와 나는 59.5kg 노인과 82kg 중년이다. 아버지 체중은 위암 수술 후에 5kg 정도 줄었다. 벗은 아버지 몸은 보기에 많이 야위었다. 아버지는 내 몸이 보기 좋다는 맥락의 말을 했다. 아버지랑 열탕에 몸을 담그고 매주 일요일마다 목욕탕에 가던 어린날을 떠올렸다. '응답하라 1988' 같은 것. 그때는 어지간한 집은 다들 일요일에 목욕탕에 갔기에 목욕탕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아버지는 비누칠도 어설펐다. 45세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71세 아버지 몸에 비누칠 해준 걸 기억해둔다.

 아버지랑 순대국도 먹고 만두도 먹고 한우소머리곰탕도 먹었다. 아버지는 머핀도 먹고 두유도 먹었다. 아버지에게 내년에는 요양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무슨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거기도 사람들이 많은지, 같은 걸 물어보고는 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내일 학교(데이케어센터)에 가는지 계속 물었다. 나는 그냥 기계적으로 같은 대답을 하고 아버지는 같은 말을 또 묻고의 반복이다. 아버지는 니가 고생이 많다는 얘기도 반복해서 했다. 아버지랑 이런 얘기를 나눌때 마음이 찢어지는 정도는 아닌데, 충분히 상처받는다.

 아버지 집에서 잉글랜드 프로축구 하이라이트랑 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봤다. 잉글랜드 축구는 빡세고, 러브 액츄얼리는 늘 사랑스럽다. 삶은 빡세고 사랑스럽다. 아버지랑 같이 있을 때, 대학 후배한테 전화가 왔다. 명절이라 전화했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다. 내 말투의 기계같은 면 때문에 후배가 '형, AI에요?' 물었지만 정말 고맙다. 날 생각해서 먼저 전화를 해준거니까. 내가 좋아하는 형 중에 한 명(ys형)은 가끔 내가 전화하면 항상 '일우야 고맙다'고 한다. 나도 후배에게 '고맙다'고 했다. 이런 게 삶의 사랑스러운 면이다. 꼭 먼저 연락줘서 고맙다고 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전화를 귀찮게 느끼지 않는 것도 - 때로는 귀찮게 느끼더라도 - 삶의 사랑스러운 면이다. 20대 중반에 친구들 전화 잘 안 받은 적 있는데, 그때 아버지가 니 생각해서 전화하는데 널 생각한다는 게 고마운 일이니 친구들 전화오면 전화 잘 받으라고 나한테 한 마디 한 적 있다. 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일한 삶의 교훈이다. 아버지는 그런 마음으로 살았고 나도 그런 마음으로 산다. 내 전화 잘 받아주는 친구들이 항상 고맙다.

 12월 30일부터 1월 2일까지 아버지랑 함께 한다. 아버지 다시 만날 때까지 아버지한테 별일 없어야 할텐데. 아버지 만나면 목욕탕도 가고 치킨도 순대국도 먹고 병원도 가고 휴대전화도 내 이름으로 새로 장만하려고 한다.

 엇나가지 말고 체념하지 말고 물의를 일으키지 말고 살아야지. 세 개가 같은 말이다.  

AND

가을은 무슨

무심히 찾아온 가을이 속도를 붙인다
외로움에 가속도가 붙는다
춥다. 점점 더,
느티나무 이파리 떨어지는 모습을 보다가
누군가 나를 봐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가을은 무슨 색입니까, 묻던 당신에게 이제는 답할 수 있다
가을은 당신이 나를 봐주길 바라는 색이다
노란색도 붉은색도 아니고
당신 생각에 잠기는 색이다
가을은
겨울로 가는 색깔
당신이 더 그리워지는 색깔
사랑을 묻지 않으면 떠올리지 않는 색깔
끝난 사랑을 되돌릴 수 없는 색깔

AND

연태 고량주

혼자서 연태 고량주를 먹는 밤
가게엔 양꼬치 집 사장님과 나 뿐
대화는
오늘은 왜 혼자왔어요, 와
양갈비 두 개 주세요, 뿐
혼자와서 두 사람 치를 먹는 게 서럽진 않다
이 집에서는 후식으로 물만두도 먹어야 한다
파인애플 향이 식도를 파고든다
사탕수수를 먹어보진 못했지만 사탕수수 향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 술은 수수로 만든다
사실 자세히 모른다
모든 일의 유래를 몰라도 그냥 사는 게 삶이다
인간이 돌도끼를 던질때부터 그랬을거라고 위안 삼는다
유래도 모르지만 투명한 술병이 예뻐서 그냥 먹는다
소 중 대 중에 중자 병이 예쁘다
예쁜걸 좋아하는 것도 원래 그런 일이다
연태땅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른다
간도, 연해주가 어딘지 모르는 것과 같다
혼자 마셔도 술병이 빈다
술의 순리가 살아가는 순리
갈비를 뜯을 때 물만두를 시키고
이것도 살아가는 순리
그냥 마시자
한 병 더 마시자
아무말 없이
아무말 없이




AND

 지난 금요일에 의료보험공단에서 전화가 왔다. 공단직원이 치매는 장기요양 5급이라도 시설급여가 가능하다는 얘기를 해줬다. 몰랐다고 알려줘서 고맙다고 금방 신청하겠다고 답했고 오늘 내용변경 신청했다. 팩스 보내고 나서 얼마후에 신청완료 카톡이 왔다. 공단 직원이 장기요양 내용변경신청 어떻게 하라고 했을 때, 나는 되묻지 않고 한 번에 알아들었다. 모든 보호자가 나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장기요양 등급 담당하는 일은 극한직업이구나, 생각했다.

 아버지는 12일에 봤을 때보다 더 멍해졌다. 만날 때마다 더 멍해진다. 그저 멍한 상태다. 14일에는 데이케어센터에서 돌아온 후에 길을 잃었다. 이번에도 친절한 이웃 덕분에(이번엔 엄마가 사례를 했다고 함) 집에 돌아왔다. 어떤 경로로 길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 생각을 할 때마다 왜 이렇게 갑자기....란 소용 없는 질문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온다.

 어제 12시에 엄마가 오산 집으로 돌아가고 내가 아버지 집을 나올때까지 4시간 30분 정도 아버지랑 단 둘이 같이 있었다. 아버지 좀 누우세요, 하니 아버지는 누웠고 바로 잠들었다. 잠에서 깬 아버지는 티셔츠 위에 티셔츠를 겹쳐 입으려는 시도를 했다. 왼쪽 팔을 먼저 넣고 티셔츠를 뒤로 돌려서 반대쪽 팔을 넣으려고 시도했다. 재킷이 아니라 티셔츠를. 그 모습을 아버지 뒤에서 10분 정도 지켜보다가 그렇게 입는 옷 아니라고 알려줬다. 화를 내는 말투는 아니었다. 체념하는 말투긴 했다. 체념은 무정함이다. 아버지 치매 확정되고 나서 나와 아버지의 거리는 처음부터 그랬다. 아버지는 내 말을 정확히 못 알아들었지만 옷 입는 시도는 멈췄다. 내가 말 안했으면 한 시간도 그러고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텔레비젼 켜는데 십 분, 바지 입는데 십 분, 티셔츠 (거꾸로) 입는데 십 분, 두유에 빨대 꽂는 일에 십 분. 아버지의 시간은 이렇게 흐른다.

 엄마는 배 안고프다고 해서 아버지랑 둘이 순대국을 먹었다. 아버지는 먹는 모습도 만날 때마다 어설퍼진다. 그걸 보는 일이 힘들다. 힘들다.

 아버지가 요양원 가는게 맞는건지 모르겠다. 그러자고 결정을 했는데도 모르겠다. 모르겠다.

AND

가난한 사랑

출퇴근 길 지하철 신길역 연결 통로 꽃집을 지나면 꽃이 예뻐서 사고 싶고
너에게 꽃을 건네주는 상상을 해보는데
돈이 없어서 못 사고 고개 숙인 채 꽃다발과 눈만 마주친다

AND

 어제 인터넷으로 장기요양등급 변경 신청했고 오늘은 아버지 인지검사 날이다. 1년에 한 번 하는 인지검사를 두 달 전에 받았어야 했는데, 스텝에 꼬여서 1년 2개월 만인 오늘 받았다. 강릉에서 8시 30분 기차를 탔고 이대목동병원에 도착했을 때, 검사실 앞에 엄마가 혼자 앉아 있었다. 엄마를 꽤 오랜만에 보는데 포옹도 안 하고 서로 손만 잡았다. 나도 엄마도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지친 영향이다. 사실 아버지 때문에 지치기론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이다. 현재 심장 문제로 이대목동병원에 입원해있는 둘째 이모는 수시로 아버지 오산으로 데려가서 같이 살라는 얘기를 한다. 이모같은 외부 스트레스 요인이 아니더라도 엄마 스스로 갖고 있는 이혼한 전남편에 대한 책임감이 크다. 알지 모르겠지만 아버지 걱정 많이 한다고 나한테 따로 얘기한 적 있었고, 오늘도 아버지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비슷한 맥락의 얘기를 했다. - 엄마, 알아요.

 아버지는 지난 일요일에 길을 잃었다. 한밤중에 어떤 이유로 신정동까지 걸어 갔는지 모르겠다. 오늘 엄마 얘기를 들어보니 엄마랑 아버지가 통화할 때 아버지 주변에 있던 친절한 이웃이 신월1동 파출소를 - 동네에서는 길을 잃어 버리지 않으니까. 혹은 엄마랑 통화 안했으면 어떻게든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 목적지로 택시 태워줬다고 한다. 지금은 시도조차 못할 일이지만 예전에 경기도 오산에 혼자 가다가 지하철인지 버스인지 잘못타서 길을 잃은 적이 한 번 있다. 아버지가 치매 걸리고 길을 잃은 게 엊그제 케이스까지 공식적으로 두 번이다. 기록해둔다. 걱정된다.

 인지검사 선생님이랑 상담하고 - 인지검사 선생님이 갑자기 보호자가 바뀐일로 당황하길래, 저 아주머니는 이혼한 전처라고 말해줬다. - 셋이 병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셋이 밥 먹을 때마다 아버지랑 엄마 이혼하던 날 생각이 난다. 셋이 밥 먹는 거 오랜만인데 별 감흥이 없었다. 나랑 엄마랑 둘 다 아버지에게 지친 탓이다. 엄마가 맛없다 해서 그런지 맛있게 먹은 내 결론도 맛 없는 한 끼였던 게 됐다. - 엄마의 말 한마디, 그 영향력을 생각한다. - 나는 아버지에게 배부르면 그만 드시라고 했고 엄마는 그 반대였다. 아버지는 처음엔 배 부르다고 밥을 남겼다가 엄마 얘기에 꾹꾹 눌러담은 밥 한 공기를 다 먹었다. 이게 더 깊은 애착의 힘인가?

 밥 먹고 아버지 담당 선생님 만났다. 의사는 아버지의 인지능력이 급격히 나빠진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머리 mri를 찍고 결과를 본 후 약을 바꿔보자고 했다. 1년에 3점 정도 떨어지면 보통이라고 하는 30점 만점짜리 인지검사에서 오늘 아버지는 9점을 받았다. 2년 전에는 19점. 1년 전에는 17점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아버지의 치매 치료(?)에도 건강보험 산정특례를 적용해줬다. 우리 아버지, 나도 엄마도 모르는 사이에 작년 이맘때보다 훨씬 이름없는 식물같은 사람이 됐네. mri는 오늘 못 찍고 촬영 동의서만 썼다. 19일 아침 7시 30분에 촬영인데, 동생이 시간 된다고 해서 동생에게 맡겼다. 다행이다. 오늘은 피검사 소변검사 심전도 검사를 순서대로 했다.

 검사실 옮겨 다니다가 아버지 가방이랑 목도리를 엠알아이 촬영 동의서 쓴 곳에 두고 왔다. 그 사이에 아버지 약 사러 갔던 엄마는 신용카드를 약국에 두고 왔다. 두 건 다 빨리 알아채고 찾아오긴 했지만 누가 누굴 돌보는건지, 심각하다.

 병원 나와서 오목교역 근처에 신한투자증권에 갔다. 엄마가 갖고 있는 증권계좌 정리가 목적이다. 엄마가 창구 직원에게 증권계좌가 있는 유래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하길래, 내가 이 사람(엄마) 명의로 증권계좌가 있는지 있다면 정리하고 싶다고 말했고, 그 다음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오늘 한 일 중에 꽤 잘한일이다. 오래전에 집에 돈이 하나도 없을 때, 동생 등록금 마련한다고 80년대부터 갖고 있던 포항제철 주식 팔기 위해서 증권회사에 엄마랑 같이 온 적 있다. 그때 생각이 났다. 그때 포철주식 판 돈이 딱 동생 등록금이 었다고 엄마가 말해줬다. 그때 엄마 나이가 지금 내 나이보다 어리다.

 엄마는 이모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아버지를 데이케어센터에 데려다줬다. 기차 시간이 남아서 친구한테 들렀다. 이 친구 엄마가 우리 엄마랑 동갑인데, 폐에 종양이 두 개 있고 두 달 후에 그 종양이 얼마나 커지는지 봐야 암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나이 먹고 손상되는 내장을 생각한다. 손상되지 않는 삶이란 무엇인가? 나도 가끔 위축성 위염이 찾아오면 소화가 안되는 기분과 함께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온다.

 낮에 만난 친구한테만 얘기하고 말까하다가 여기 적는다. 아버지 소변검사 하는데, 오래 걸렸다. 좌변기가 있는 화장실 한 칸에 들어가서 내가 시범을 보여주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아버지가 소변검사를 이해했다. 아버지랑 나랑 음경 모양이 닮았다. 씨발 핏줄. 이런 생각을 했다. 친구 아버지는 돌아가신지가 10년이 넘었는데, 친구도 어느날 아버지랑 본인 음경이 닮은 걸 알았다고 한다. 씨발 핏줄. 한 번 더 생각했다.    

 청량리역에 앉아서 쓰다가 집에 돌아와서 마저 쓴다.

AND

겨울, 별

35번 국도, 강릉에서 부산까지
삽당령, 해발 680미터
동지, 오후 네 시에 찾아온 어둠
물은 아랫 마을로 별은 하늘 너머로
고개를 들어 별을 본다
겨울엔 별이 많다
겨울 별은 시리도록 밝다
나란히 박힌 세 개의 별과
그 마지막 별 아래 두 개의 별
그 다섯별을 둘러싼 다섯 개의 별
그 주위에 무수히 많은 별별별
그 사이에 보에지 않는 별별별
이미 이름이 있겠지만 나의 이름은 아니므로
당신의 무언가를 따와서 이름을 새로 붙여주고 싶은
별들, 혹은 별자리
그렇게 내 이름도
우리가 언젠가 함께 보았던 별의 이름으로
당신 마음에 남기를
모든 이름이 별의 이름으로 기억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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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서울 와서 데이케어센터에 내년도 센터 이용 계약서랑 아버지 투약 의뢰서 등 서류 몇 가지 전달하고 센터 선생님 한 분과 면담 시간을 가졌다. 이 선생님은 아버지에게 굉장히 호감을 갖고 계신 선생님이고 센터에서 간호부장이다. 요즘은 아버지 면도도 직접 해주신다. 아버지도 키 큰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자주 언급했더랬다. 센터에서는 당연하게도 최근 몇 달 사이에 아버지의 인지능력이 급격히 나빠진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장기요양등급을 4등급으로 받고 요양원으로 모셔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의 신체는 여전히 요양원에서 살기에는 너무 건강하지만 내 결정 혹은 결심은 세상에 흔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녁엔 친구 만나서 한 잔 했다. 처음 들어갔던 술집에 가방을 두고 와서 그 가방을 찾아둔 친구를 오늘 아침에 다시 한 번 만났다. 아침부터 버스랑 지하철을 갈아타고 한참 걸어서 경기도 부천에 있는 친구네 집까지 찾아가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른이 되서 여유가 생긴건가? 어젯밤이랑 오늘 아침엔 모텔 욕실에 있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오랜만에 포근함. 하룻밤 4만원 짜리 방에 욕조가 있는 게 맞나? 잠깐 생각했다. 물론 오래된 모텔이고 방도 후지긴 하다.

 오늘 오후엔 센터에서 아버지 모시고 와서 아버지랑 순살 닭 튀김도 먹고 축구도 봤다. 오늘은 달콤한 양념이 묻은 치킨을 시키는 실수를 하진 않았다. 다만 맛이 별로 없었기에 다음번엔 브랜드 치킨을 한 번 시켜 드려야지, 생각했다. 아버지는 닭을 맛있게 먹었다. - 물론 먹는 모습이 점점 어색해지고 있다. - 콜라는 나 한 모금 아버지 한 모금 먹고 싱크대에 버렸다. 잘한 일이다. 아버지는 축구를 집중해서 못 봤고 내가 뭔가를 얘기하면 다른 얘기만 했다. 내일 엄마가 온다는 얘기를 50번 정도 해줬다. 얼마전엔 본인 전화번호를 묻길래 100번 넘게 얘기해줬다. 집에 들어오는 도어락 비번을 순간 잊어서 센터에서 돌아와서 집에 늦게 들어오게 됐고 그것 때문에 번호를 물었으리라 추론해 볼 뿐이다. 우리 아버지는 무얼로 사는거지? 어떤 의미로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 어제 '계산된 삶' 을 읽었고 지금은 '수확자들'을 읽고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한 거겠지. 살아 있으면 살아야 해서 사람이다.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다음주엔 서울에 두 번 와야되고 그 다음주에도 그 다음주에도 서울에 온다. 약간 힘든데, 번거롭게 느껴지진 않는다. 나이 먹어서 그런게 아니고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내 삶이 매우 심플하기 때문에 그리고 수시로 서울에 올라오는 일이 머잖아 끝날 것을 알기에 그렇다는 걸 안다.

 아버지가 나랑 엄마랑 센터 선생님들 빼고는 다 잊어가는 것 같기에 동생에게 아버지가 너를 잊는 것 같으니 수시로 전화 하라한 게 삼 주 전이다. 아버지 전화기 통화 목록을 쭉 들여다 봤는데, 아버지 친구 한 명은 며칠전의 통화기록에 이름이 있는데 동생 이름은 쭉 없었다. 동생은 나보다 번잡한 삶을 사니까, 아이 두 명 키우는 게 힘들겠지, 생각했다. 그래도 섭섭한 마음이 있다. 아버지랑 친했던 건 내가 아니라 동생인데.

 아버지는 삼 주 전보다 더 멍해졌지만 아직? 나를 잊지는 않았다. 본인 아이를 잊는다는 건 본인 아이를 잃는 일만큼이나 심각하구나 생각해본다. 아버지 저를 오래 기억해 주세요. 엄마는 저보다는 더 오래 기억해 주시고.

 청량리에서 강릉 가는 표를 끊았다고 생각했는데, 강릉발 기차표를 끊었기에 환불 후 강릉가는 기차표 예매하고 잠깐 비는 시간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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