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고마운 소, 평화롭고 관대한 짐승, 나는 소를 보면 저절로 머리구 숙여지고, 나는 소를 보면 저절로 눈이 감겨진다. 무거운 짐을 다 실어나르고 힘든일을 다 해도 한 번도 공투세 한 적이 없다. 평화롭고 관대한 짐승."
KK할머니는 어려서 조선에 책에서 배운 소에 대한 구절을 기억하고 계신다. 조선에 책에서 배우셨다니까 일제 시대에 배운거겠지? 할머니는 기미가요도 외신다. KK할머니의 아들인 O형은 술이 취하고 기분이 좋을 때면 신경림 시인의 '낙타'를 암송한다. 유전이란 것이 무섭다.
우리 엄마는 내가 뱃속에 있을 때, 콜라랑 순댓국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둘 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아이템이다.
아이템 하니까 생각났는데, 어제 지후랑 교회 갔다 오는 길에 길가에 떨어진 칼을 보고 내가 아이템 주워야 하지 않냐고 물었다. 지후가 그걸 주워서 뭘 하게. 했는데, 내가 반사적으로 공격력 증가.라고 하는 바람에 지후가 나한테 한심하다고 했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한참 웃었다.
"인마역동(人馬亦同)이라고 소는 사람과 같잖아. 사람두 열 달 되야 낳는데, 소두 열 달 되야 낳잖아. 사람과 같은거야. 근데도 소를 막 잡아 먹으니. 그래 꿈에 소가 뵈면 조상이라고 하더라구 그게, 그러더라구"
KK 할머니는 교회의 모든 행사에 참석하신다. 일주일에 네 번은 교회에 가신다. 유모차를 끌고 가신다. 그런 할머니가 이런 미신적인 말씀을 하신다. 할머니는 우리집 뒤에 있는 참나무는 눈에 거슬려도 베지 말라고 했다. 그 나무를 베다가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안좋은 기운이 있다고 하셨다. 공격 받으면 바로 반격하는 이스라엘을 멋진 나라라고 설교하는 목사님과 KK할머니의 신앙 사이의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아 괜찮은거는 내 사정이지. 만약에 말썽거리가 된다 하면, 이유가 있을거란 말이여? 나 자신은 이유가 있갔지만? 아 법이라는 거이, 예를들어 밭을 해 먹으려고 나무를 했다 하더래도 벌매신청을 해야 한단 말이여."
산에서 허락 없이 나무를 하는 것에 대해서 단속을 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할머니가 O형에게 얘기했더니, O형이 괜찮다고 했다고 한다. 많은 할머니들이 그렇듯이 KK할머니도 걱정이 많다. 그런데 그 걱정이 지후의 걱정과 비슷하고 결과적으로 지나친 걱정이라기 보다는 올바른 선택에 가깝다.
요즘 지후가 나한테 화를 낸다. 예전보다 자주 낸다. 내가 대책없이 다 괜찮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경우가 많다. 달콤한 신혼이 끝나서.그런 것은 아니고 불확실한 미래, 익숙하지 않은 환경 때문에 남들의 눈과 입에 최대한 적게 오르내리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까 할머니의 얘기를 들으면서 지후말을 잘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눈에 띌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