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아버지 만난다. 혈압약 타고, 치매지원센터에 치매약값 지원금도 - 그 동안 미뤄왔음 - 신청할까 한다. 아버지 핸드폰도 좀 들여다보고 카드 쓴 것 포함해서 재정상태도 살짝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니까 금요일에 서울 가는 거는 일상적인 점검방문 이다. - 아버지 잘 있나 보러 가는거 - 엊그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한테서 보고싶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가 뭔가 얘기하다가 갑자기 '좀 보고싶고' 라고 했다. 아버지 나 보고 싶구나, 생각이 들면서 짠했다. 오늘 아침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7시에 걸려온 아버지 전화를 못 받았는데, 7시 20분에 전화걸어서 아버지가 전화 받자마자 '아버지,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요' 라고 했다. 아버지도 나도 무심결에 한 말이다.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나온 말. 보고 싶다와 미안하다. 보고 싶다는 말은 거짓말로 하기 어려운 말이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니까 엄마 보고 싶네. 미안하다는 말은 기계적으로도 쓸 수 있는 말이다. 가족들끼리는 가짜로 미안하다고 하기 어렵다. 가족주의는 아니고 결국은 거짓없는 사람들이 남는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주말마다 부고 문자가 많이 오는 계절이고 지난주에 K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K  오빠가 내 또래라고 했던 것 같으니까 돌아가신 분은 우리 아버지랑 또래일거라 생각한다. 70대 초반, 요즘 시대에는 아직 정정한 나이, 그렇지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 육체적으로 대단히 튼튼하던 우리 아버지도 계단을 내려올 때 내가 손을 잡아주면 더 편하게 내려오는 지경이 됐다.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지만 주변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 현재까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죽음이 큰이모 돌아가신 일이다. - K에게는 잘 추스르라는 말 정도 하고 말았다. 누구나 그 앞에 무력한 것이 죽음이고 그렇게 죽음은 공평한 사실이 된다. 죽음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반댓말이다. 친구가 로또복권 3등에 당첨된 것도 아버지를 만나러 서울에 가는 일도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지금도 다 죽음의 반댓말이다. 결혼식과 장례식, 부의금과 축의금 같은 말과 항상 주변에 죽음이 따라다니는 사람을 떠올려봤다.  

 동생이 아버지 더 나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럴거라고 했다. 아버지가 더 나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보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며느리 이름은 잊어서 '니 와이프도 보고 싶은데 같이 한 번 안 오냐' 고 하지만 내 이름은 잊지 않아서 지금처럼 '어, 일우야' 하면서 전화 받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노래 하나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노래를 만들었다. 가사에 반백년을 살았단 얘기가 들어갔다. 거의 반백년을 살았지만 아직은 고꾸라지고 싶지 않다.

 아침에 죽은 새를 봤다.

죽은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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