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다. 밤사이에 눈이 왔다. 3시부터 6시 사이에 집중적으로 눈이 올거라고 한 일기예보가 정확했다. 다섯시 반에 일어났다. 눈은 이미 30센티미터 가까이 쌓였다. 특설령, 성탄제같은 오래된 단어들이 떠오르고 그 단어들이 들어간 시를 떠올렸다. 크리스마스라서 일찍 일어난 건 아니다. 그저 어제 일찍 잤다. 나이 먹음이란 설레임이 사라지는 일인가 생각해본다. 1984년 7살 때 크리스마스가 기억난다. 당시에 태권도장을 빙자한 유치원에 다녔다. - 영어, 수학, 미술까지 가르치는 한국 태권도장의 교육 시스템이 멀리 구미에도 위용을 떨치고 있다는 얘기를 어디서 읽었다. 암튼 그 한국적인 태권도장에 이종사촌 아이랑 두 살 어린 내 동생도 같이 다녔는다. 크리스마스때 산타 복장을 한 선생님이 우리집에 와서 선물을 주고 갔다. 내 건 소리만 나는 광선총이었고 동생 건 광선총보다는 값싼 장난감이었다. 나랑 동갑인 이종사촌 아이는 나랑 같은 걸 받았다. 산타 할아버지가 동화 속 이야기란 걸 안 건 내 또래들이 같은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기 전이다. 엄마랑 이모가 선물값을 얼마씩 내야 한다는 얘기를 나누는 걸 들었더랬다. 그렇다고 내가 뭐 엄청 조숙한 아이였던 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남의 얘기 듣는 걸 좋아했다. - 엿듣기와 엿보기, 어른들의 세계란 아이들에게 항상 흥미로우니까 - 나이 먹음이란 설레임이 사라지고 어린시절의 어떤 순간을 머릿속에서 각색해 내는 일인가 생각해본다.

설레임은 기대, 기대는 소망, 암튼 다 크리스마스랑 어울리는 말들이다. 올해 유일하게 기대했던 일이 신문사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해서 상금도 타고 작가 소리도 듣는 거였는데, 실패했다. 상심했지만 세상에 잘 쓰는 사람이 많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등단이 간절했다면 사람들이랑 이런 얘기를 주고 받지도 못할 것이다. 매년 떨어지는 일인데, 올해 유난히 기록에도 남기게 되는 건 허리가 아파서 상심이 더 크게 느껴져서다. 살면서 허리 아파본 일이 없는데, 지난주부터 허리가 아프다. 스쿼트 자세를 바꿨는데, 그게 잘못됐는지 거동이 불편한 지경에 이르렀다. 버티다가 어제 병원에 갔다. 너무 아파서 작년의 아버지처럼 디스크가 터진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디스크 쪽은 아니고 근육이 아주 많이 경직돼 있다는 진단이었다. 여자 프로배구 중계를 즐겨본다. 운동선수들은 운동이 직업이니까 시합전후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몸을 풀어준다. 내 운동에는 그게 없었다. 아픈 건 내 탓이다. 그래도 화가 난다. 허리 아픈건 핑계고 허리 안 아팠으면 등단 실패에 대해서 며칠동안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어제 퇴근길에 요약할 수 없는 삶을 산다는 게 어떤걸까, 막연히 생각해 봤다. 얼마전의 메모에는 ‘나는 곤조는 있지만 신념으로 살진 않는다.’ 고 적었다.

신념이 있다는 건 박근혜 사면에 대해서 너무 화가 나서 며칠동안 잠도 못 자고 청와대 앞에 피켓이라도 들고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박근혜 사면 속보가 뜨자마자 ‘이 아주머니가 몸이 많이 안 좋나? 감옥에서 죽으면 여러가지로 곤란한 일들이 많을테니 사면을 하나’ 생각했다. 피노체트의 아내가 99살까지 살고 죽었다는 소식에 기쁨에 겨운 칠레 시민들이 노래부르고 축제를 벌이는 영상을 봤다. 이순자는 전두환보다도 더 조용히 죽겠지. 나도 누군가에겐 나쁜 놈이지만 확실하게 나쁜놈은 욕하고 보는 솔직한 세상에 살고 싶다.

시베리아 제트 기류가 어쩌구 하는 때문에 중국 대부분 지역에 한파가 몰아닥쳤다는 날씨 뉴스를 보고 오늘부터 우리나라에 온 한파도 그 영향이겠구나 생각했다. 어떤일에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 기후파괴에 관심이 많음 - 이렇게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다. 세계지도적으로 보면 기후파괴의 피해 측면에서 한국은 중국과 같은 라인에 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긍적적이지 않다. 지금, 최고 풍요의 시대를 살아본 것이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 적은 시에는 살아야겠다, 살아야한다, 는 느낌이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잘 안 든다. 그래서 예전만큼 시를 많이 못 쓰나보다. 설레임도 화도 신념도 살아야겠다는 희망도 없다. 그럼 뭐가 남지?

사랑인가?

인류의 미래야 흘러가는대로 흘러갈 것이다. 이 일기를 쓰는 일을 포함해서 뭔가 하고 있다는 건 살아있고 싶다는 뜻이고 바로 그게 사랑이다.

- > 예쁜 걸 많이 보지만 엊그제 상고대는 정말 예뻐서 잘 걷지도 못하는 허리를 부여잡고 회사 근처로 나가서 찍었다. 예쁜 걸 쫓는다는 건 살아있단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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