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스커피를 먹다

막대기형 비닐 포장의 끝부분을 뜯는다
가스렌지 위에선 물이 끓는 소리
주전자 주둥이를 나오면서도 살아서 끓고 있는 물을 종이컵에 붓는다
믹스커피는 종이컵에 팔팔 끓인 물이라야 맛있다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말
할머니 제삿날에는 여전히 믹스커피가 상 위에 놓인다
한 모금 한 모금 입 안 가득 달콤한 향이 돌고
식도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물큰한 단내
끈적해진 피가 몸 안에 흐르고 심장 박동을 따라 머릿속까지 닿으면
내 어린날 믹스커피를 타주던 엄마 얼굴이 떠오르고
비로소 하루가 시작된다​
죽음과 삶 사이에서
엄마의 엄마와 엄마 사이에서
퇴사와 출근 사이에서
먹다와 마시다 사이에서
끊을 수 없는 당신과 모닝 커피를 한 잔 했다

AND

백반을 먹다

장날,
읍내 한구석의 식당
나보다 20년 이상 더 산 형들과 밥을 먹는다
전국 어디에나 있는 서울식당
전국 각지에서 모인 우리들
골고루 먹고 한 끼 때우라는 백반
생선구이와 된장찌개가 나오는 백반
초로의 식당 주인이 주문도 받지않고 차려주는 백반을 먹는다
아직은 술이 세월을 쓰러뜨리지 않았기에 소주도 한 병 먹는다
먹는 입은 지금이지만 말하는 입은 옛 일을 씹는 자리
형들이 좋았다는 옛날은 언제였나
나의 옛날보다 오래된 옛날 얘기를
나는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시절을 안주로 삼킨다
사람이 넷이니 두당 반 공기씩
밥 두 공기 추가하고
소주도 한 병 더 시키는
오후 한 시,
어른의 식사​
AND

수제비를 먹다

반죽을 만든다
전라도 밀가루와 강원도 수돗물
이런 이십일 세기
달걀은 집에 없고
소금은 깜빡했다
이런 살림살이
이런 정신머리
반죽이 손에 묻지 않을 때까지
뭐든 자꾸 치대면 정이 떨어진다
멸치 국물을 내는 동안
마늘을 다지고
감자 양파 호박 고추 대파를 손질한다
국물에 들어갈 순서대로 손질하고 싶은 내 마음의 순리
멸치를 건져낸 국물에 재료를 넣는다
어떤 모양이든 될 수 있는 반죽을 대충 뜯어 넣는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고
밀가루 반죽은 수면위로 떠오른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내 삶은 한 번도 익어보지 못했다
사랑의 모양이 아니라 이리저리 뜯긴 상처뿐이지만
호박을 더 작게 썰어넣을 걸 그랬다는 내 말에
그렇다고 하는
당신과 마주앉아 후후 불어가며 먹는
수제비는 사랑이니까
뜨거워 입천정이 다 까져도
당신이 맛있다고 하면
그게 사랑이니까
비가오든 안오든
뭔가는 먹어야 하니까
치댈수록 끈끈해지는 당신과
비 내린 다음날 수제비를 먹는다
AND

만두국을 먹다

마주 앉은 사람은 설렁탕을
나는 만두국을 먹는다
뽀얀 뼛국물 안에
고기를 갈아 속을 채운 만두가 잠겨 있고
남의 살을 먹는 주제에
먹으면 피가 잘 돈다는 파도 잔뜩 넣었다
마주 앉은 사람이 고기를 건져 먹다가 웃는다
나는 만두를 건져 먹다가 웃는다
살다보면 누군가와든 마주앉아 뼛국물을 먹는 일이 있다
친한 친구나 덜 친한 친구
처음 보는 사람 또는 자주 보는 사람
연인이거나 연인이었던 사람
방금 이혼 수속을 마친 전 아내
누군가와는 마주 앉게 된다
지금 내 앞에선
곧 나를 떠날 사람이 웃는다
뼛국물을 삼키며 웃는다
입안에서 만두가 터지고
만두에선 시큼한 김치맛이 난다
AND

돈까스를 먹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유행하고
돼지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가는데
나는 나랑 사장님 뿐인 가게에서 돈까스를 먹는다
세상에 흔한 비오는 오후 네 시에
비 오는 오후 네 시보다 흔한 돈까스를 먹는다
언제부터 돈까스가 흔해졌나
언제부터 돼지고기가 흔해졌나
사람보다 흔한 돼지고기
흔해지고 나면 전멸의 바이러스가 퍼지기 좋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군
만날 딴 생각만 하고 있는 나를 닮았다
묵직한 소스가 뱃속에 달콤하게 퍼진다
안도감을 주는 맛이군
어떤 돼지들은 죽고 나는 살았다
어떤 사람들은 죽고 나는 살았다
살아서는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날
혼자서 돈까스를 먹는다
모질게 살겠다고 모듬으로 먹는다
AND

생강차를 먹다

 

점심으로 뼈해장국을 먹고

후식으로 생강차를 마시는 오후

대추차를 마시려고 했는데 대추가 다 떨어졌대서

대추차를 못 마시고 생강차를 마시는 오후

조카뻘 나이의 동료와 마주앉아 해장을 말하고

각자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생강차를 마시는 오후

생이 가볍길 바라며

찻잔 위에 둥둥 떠 있는 잣을 씹는 오후

찻잔 바닥엔 무거운 생각같은 생강조각

일부러 끝까지 비우지 않은 찻잔 속을 들여다 보게 되는 오후

AND

심계탕을 먹다 2

복날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삼계탕을 먹는다
속이 채워진 닭으로 내 뱃속을 채운다
우리나라 인구 5000만명
하루 닭 소비량 200만 마리
닭 사육 두수 1억 7천만
1억 빚은 빚도 아닌 세상이니
한 마리 닭을 먹는 일도 무심하다
닭은 인간이 만든 사료를 먹고
사료를 만든 인간은 닭을 먹는다
돌려 막고 돌려 먹는
지극하고 지독한 순환이란 말
레일 위의 기차는 여전히 빠르게 달리고 있고
풍요의 꼭지점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알고도 모르는 척
세상에 섞여서
복날 삼계탕을 먹는다
AND

또복이네 - 물회를 먹다 -

​속초 중앙시장
몇 번을 물어야 찾아갈 수 있는 골목에
지역 택시기사도 잘 모르는 작은 가게
50년 된 단골들은 다 죽어 없어졌다는 또복이네
언젠가부터 다리를 저는 김말복 할머니가
손님들 또 오라고 지은 이름 또복이네
한 축에 만원하던 오징어가 두 마리에 만원이 되가는 세월을 견딘 곳
막내 아들뻘인 나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는,
사장님 나이따라 물회가 점점 달달해지는 또복이네
물회를 먹다가 설탕을 덩어리 째 씹어도 또 가게 되는 곳


AND

우럭회를 먹다

강원도 정선까지 날 보러 온 친구와
정선까지 죽으러 온 우럭을 먹는다
간장에 와사비를 풀고
얼마전 태어난 둘째 아이 이름을 묻는다
술병이 자빠지기 시작하고
친구에게 아이 이름을 묻는다
매운탕 국물을 뜨다가
다시 한 번 아이 이름을 묻는다
횟집을 나와서 담배를 피우다가
아이 이름을 또 묻는다
둘 다 술과 담배가 가까운 곳으로만 가던 시절이 있었다
10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우럭회를 먹었던,
친구에게 아이 이름만 자꾸 묻는다
AND

순대를 먹다

하루의 마지막 시간
셔터를 내리려는 분식집 앞에 멈췄다
순대 1인분 주세요
간 위 허파 염통 귀
간을 먹으면 눈이 좋아지고
염통을 먹으면 피가 맑아진다
먹으면 뭐든 좋아지는,
순대는 돼지가 주는 축복
마지막으로 둘이 먹었던 순대가 기억나지 않는다
당신이 태어난 날에 나 혼자 먹는 순대 1인분
순대는 둘이서 1인분을 먹으면 좋은 음식
​순대는 혼자서 1인분을 먹기엔 버거운 음식​


AND

만두를 먹다

아내랑 만두를 먹는다
마트에서 두 봉지씩 묶어서 파는 만두를
만두의 자존심이라고 포장지에 자신있게 새겨 넣은 만두를 
고기 잡채 야채가 섞인 만두를
간장 식초 고춧가루 섞은 간장에 찍어 먹는다
만두를 빚던 손들은 다 과거로 사라지고
기계손으로 빚은 만두를
기계처럼 정확한 맛의 만두를
몇 개의 질문은 가슴속에 물려두고
맛있게 먹는다
두 봉지 다 먹는다
AND

갈비탕을 먹다

입구에 돼지가 웃고 있는 갈비집
숯불에 굽지 않으면 갈비도 아니지
수천만명이 일 년에 한 번은 먹을 수 있을만큼
많은 갈비와 그보다 훨씬 많은 숯이 함께하는 세상
갈비를 못 시키고 갈비탕을 먹는다
너랑 나랑 둘이
우리는 가족
건너 테이블엔 엄마와 아빠와 딸 그들도 가족
옆 테이블엔 엄마와 세 자녀 아빠는 없지만 그들도 가족
아빠가 없던 테이블에 초밥을 사들고 나타난 아빠
초밥과 갈비
아빠와 딸은 닮았다
엄마와 아이들이 닮았다
물고기와 육고기처럼
너랑 나도 닮았다
돈 몇 천원 때문에 갈비 대신 갈비탕을 시켰지만
같은 걸 씹어 먹으니
숯불과 갈비처럼
우리는 한 식구
AND

쭈꾸미를 먹다

밥을 시킨다
보통맛 2인분요
보통맛 매운맛 아주 매운맛 중에 골라야 한다
보통맛은 보통맛이라 아주 보통맛은 없다
보통맛을 먹는다고 다 보통사람은 아니다
어떤 대통령은 자기가 보통사람이랬는데
알고보니 씨팔놈이었다
나도 내가 보통사람이라 생각하는데
사실 나는 씨팔을 입에 달고 사는 보통사람이다
순한 사람 중에는 아주 순한 사람도 있는데
보통사람은 보통사람이라
아니, 사람은 다 사람이라
아주 보통사람은 없다
나는 보통맛 불향 쭈꾸미도 매운데
아내는 밍밍하다고 한다
눈이 마주치니 웃는다
보통날 보통맛으로 보통의 사랑을 산다


AND

닭도리탕을 먹다

닭에게 미안하지만 또 닭요리를 먹는다
다행히 수컷으로 태어나서 바로 죽지 못하고
불행히 30일만 살다가 내 눈앞에 고기로 나타난 닭
단골집 사장님에게 1시간 전에 말해둔 닭도리탕
도리는 새
고개를 도리도리
고개를 절래절래
닭을 단도질해서 만드는 닭도리탕
양파, 감자, 고추, 당근
이것저것 다 섞어 끓이는 닭도리탕
여럿이 섞여서 함께 먹고
소주랑 맥주를 섞어 먹고
침도 섞이고 술잔도 섞이고
나중에는 숟가락도 섞이고
그러고도 모자라 밥까지 볶아먹는 닭 볶음탕
회식날 정성껏 닭도리탕을 먹었다
AND

양념치킨을 먹다

치킨을 먹는다
둘이 먹으니 반반으로
내 전화번호만 보고도 집 주소를 아는 치킨집 사장님
많은 것을 들켜버리고 사는 세상
먹어야만 삶은 이어지고
닭고기 밀가루 기름 물엿
고기도 좋아하고
튀김도 좋아하고
단 것도 좋아하는 나
남은 양념까지 박박 긁어 먹는
영혼을 잃고 먹고야 마는 영혼의 맛
당신과 함께 먹는 치킨
치킨의 다른 이름은 행복
양념치킨은 행복의 네 제곱
AND

삼계탕을 먹다

입안에서 닭뼈가 구른다
한번에 살을 발라내지 못하자
닭뼈를 굴리며 생각이 생겼다
엄마말 잘 들으면 그런것처럼
입안의 닭뼈도 피가 되고 살이 될까
닭뼈가 내뼈가 되고
닭살이 내살이 되고
똥이 되고 흙이 되고
유식한 말로 순환이라고 부르고
손가락으로 원을 그려본다
누군가는 삼계탕을 먹다가 닭 목뼈가 목에 걸려 죽기도 할 것이다
입안에서 또 다른 닭뼈가 구른다​
AND

컵라면을 먹다 2

​컵라면을 먹는다
그리움에 생이 허하여 술을 마시고
마신 술에 속이 허하여 컵라면을 먹는다 
싸구려 용기에 새우가 그려진 컵라면을 먹는다
컵라면을 불려서 먹어야 해장이 된다던 엄마의 말
엄마는 자식들 건사한다고 허리가 휘도록 술을 마셨다
내가 술로 중년이 된 사이 술로 노파가 된 엄마
갈비뼈에 금이 가도록 술을 마신 엄마
언젠가의 엄마처럼 면발도 새우건더기도 나도 퉁퉁 부었다​
한 나라에 살아도 자주 보지 못하는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전화도 못하고 불어터진 컵라면을 먹는다
AND

컵라면을 먹다

​비 개인 아침 옥상
물 고인 바닥마다 파란 하늘이 있다
사발면이란 이름이 붙은 컵라면을 먹는다​
옥상은 기억의 장소
컵라면은 사색의 음식
뭘 먹든 떠오르는 당신 얘기를 
더는 적지 않으려 했지만
사발이란 이름만큼 예쁜 스티로폼 용기 안에
당신 얼굴이 라면 기름과 섞여있다
국물까지 싹 비우고나면
남는 것은 텅빔
텅빈 하늘을 밟고서 
컵라면을 먹었다​
AND

삼겹살을 먹다

회식
삼겹살을 먹는다
왜 회식날은 삼겹살을 먹을까
너무도 가볍게 결정되는 삼겹살의 운명
일 인분 만 이 천 원이 너무 무겁진 않은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
삼겹살이 없던 시절에
우리는 뭘 먹고 실았을까
그 보다 오래 전 돼지가 먹히기 위해서만 키워지기 전에
우리는 뭘 먹고 살았을까
세상은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고 하는데
내 하루는 늘 퍽퍽하고
내가 지금 소주와 함께 삼키는 것이 살덩인지 뼈인지 아니면 기억인지
질문도 다 던지지 못하고 가는 생에
답을 정해둔 질문으로 가득한 삼겹살 얘기가
무슨 질문인지
모든 팀장들은 술을 잘 먹는데
대체 얼마나 술을 마셔야 팀장이 되는지
이 또한 무슨 답이 정해진 질문인지
왜 삼겹살을 먹으며
나는 질문만 남기는지
대체 왜
AND

순대국을 먹다

피곤했던 하루
하소연 할 사람 없어 더는 갈 데 없는 하루
혼자서 순대국을 먹는다
기분상 소주도 한 병 먹는다
돼지 내장들이 뚝배기 안에서 부글부글 생을 끓이고
건너 테이블엔 마주 앉은 연인
순대국은 사랑의 메뉴
순대를 빼고 순대국을 시키던 당신이 떠오르고
오직 먹히기 위한 삶을 살았을 돼지 머리로 이어진다
머릿속에 취한 피가 도는 걸 보니
나란 인간은 먹기 위해 태어난 존재
터덜터덜 집으로 가는 길
돼지 내장들이 내 내장 안에서 부들부들 생을 죽인다
피곤했던 하루
혼자서 순대국을 먹었다
AND

소고기를 먹다

입 안에 기름기 가득 소고기를 먹는다
입술이 번들거리도록 소고기를 먹는다
미끈한 키스같은 등심을 곱씹는다
붉어진 당신 얼굴을 보며 붉은 고기를 굽는다
소는 짧은 생에 울다 죽었다
소고기보다 눈물이 붉다
눈물보다 당신이 붉다
붉은 마음으로 이별 소고기를 먹는다
AND

아이스크림을 먹다

아직은 교복이 어색한 아이들이 아이스크림 콘을 먹으며 신났다
아직은 2월
계절이 바뀌는 일을 이렇게도 안다
​부러운 것은 시기하는 것
충동에 들게 하는 것은 다가오는 봄인가 지나간 젊음인가
주머니엔 꾸깃한 천원짜리 한 장
학교 앞 구멍가게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 콘을 집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세상에 있던 이름, 브라보
껍질을 벗기고 천천히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얼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그리운 것은 코 앞에 봄인가 발 뒤편의 젊음인가
AND

피자를 먹다 - 시카고 피자 -


피자를 먹는다
냉장고 안에서 이틀
차갑게 식은 정통 아메리칸 스타일
치즈까지 단단해진 시카고 피자

피자를 식히려면 냉장고가
피자를 사려면 마트 회원카드가
회원카드를 만드려면 돈도 자동차도 필요하다
필요를 따라 올라가면 물건의 목록은 하늘에 닿는다

포장 박스도 따뜻할 때 먹으라 권유하지만
냉장고는 있어도 전자렌지는 없어서
살며 모든 걸 가질 순 없다는 걸 알기에
차가운 치즈를 곱씹는다

시카고에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오래된 팝송과 마이클 조던만 떠오르지만
시카고에서 오지도 않은 시카고 피자를 먹는다


AND

낮술

점심 손님이 다 빠져 나간 식당
아구찜을 시킨다
늘어진 콩나물과 아구
나른한 나와 친구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꾸벅꾸벅 조는 주인장
파리와 선풍기의 궁합
고춧가루 붉게 타오르는 미더덕이
입안에서 뜨겁게 터지고
지 혼자만 냉정한 소주병
잠든 주인 머리맡에 꾸깃한 사 만 칠 천원을 곱게 펴두고 거리로 나선다
아구와 나 친구와 소주
폭염속에 생이 무르익는
8월의 오후 네 시
AND

돈가스를 먹다

해장으로 돈가스를 먹는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 살면서
이리 기름진 걸 먹어도 되나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온 소곱창에
이 나라 저 나라 술을 짬뽕했으니
국적은 문제가 아닐까
매일 매일 돈가스 해장으로
미끌미끌 미꾸라지가 되려나
기름기 뺀 얼굴아래 기름진 내장을 감추고
언제 어디서든 달아날 수 있게
마무리로 끈적한 데미그라스 소스를 핥는다
식당 사장님이 나를 보고 웃는다
해장 돈가스에 속만 느끼하다


AND

드립커피를 먹다

커피를 시킨다
- 늘 먹던대로 드릴까요
- 예
커피맛까지 세분화된 세상에
먼지처럼 살고 있다
카페 주인이 느리게 흐르는 물처럼
고요하고 자연스럽게 커피를 내린다
쿠키를 굽는 한쪽 구석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
유조선이 바다에 흘린 것 마냥
커피 위에 기름이 둥둥 떠 있다
다 비운 커피잔에서 고등어 굽는 냄새가 난다
- 늘 먹던 맛이 아닌데요. 커피 한 잔 더 주세요
- 예
다음 커피를 기다리다가 트림을 한다
트림에선 순대 냄새가 난다
생의 언젠가 바닷가에서 순대를 먹은적 있다
새 커피에선 늘 마시던 냄새가 난다
AND

햄버거를 먹다

동네 슈퍼 빵 코너 구석
2,500원 짜리 햄버거
터미널 제과점에도
다른 동네 마트 빵 코너에도
같은 가격인 납작한 햄버거
시간당 6030원 최저 시급을 받고
식품공장에서 햄버거를 만드는 사람들
그 햄버거를 여기저기로 운반하는 사람들
나랑 같은 걸 먹으며 맛있어 할 사람들
하지만 어쩌면 삶이 지겹기만 할 사람들
빵 사이에 고기랑 야채
싸구려 소스와 허름한 포장지
쉴틈 없는 제조 공정과 굳건한 대량생산 시스템
자신의 생산품을 제 돈을 주고 소비하는 대중
반복 반복 반복
삶 삶 삶
그것은 햄버거

AND

감자탕을 먹다 - 감자탕의 반대말 -

감자탕을 먹는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돼지 등뼈
이국적인 감자탕
이국의 반대말은 뭐지
그게 뭐든
반대말을 잇고 또 이으면
스페인과 나를 이어주는
눈 앞의 등뼈처럼
어렵지 않게 너에게 닿을 것 같다
이름만 겨우 아는 앞사람에게
너에게 못한 말을 쏟아내고
그리움만 남은 밤
그리움의 반대말은
나인가 너인가 아니면 감자탕인가
밥까지 볶아 먹고
상 위엔 김가루가 붙은 숟가락
김가루의 반대말도
숟가락의 반대말도
감자탕의 반대말도
결국엔 너


AND

새벽밥을 먹다

새벽 다섯 시
일어나서 돈가스를 튀긴다
허기허기허기
냉장고에는
케첩과 마요네즈가 있고
복숭아랑 냉동만두도 있다
안심안심안심
돈가스를 먹고
복숭아도 하나 먹는다
허기허기허기
만두까지는 과하다고, 생각하다가
하나 남은 바나나를 발견한다
안심안심안심
487번 스티커가 붙은 바나나를 먹고는
좀 있다가 뭘 먹을까, 고민한다
젠장젠장젠장
세상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자활센터에서 만든 돈가스와
가난한 농부의 복숭아와
바다까지 건너온 바나나의 노력을
삽시간에 먹어치운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자꾸 남의 노력을 탐한다
허기허기허기허
허기여차디여차


AND

동지 팥죽을 먹다


퇴근길
시장에서
팥죽을 산다

온종일
사람들 먼지를
뒤집어 쓴 팥죽

차갑게 식은 하루
붉고 차가운 위선
살아남은 자의 후회
괜찮은 편이라는 거짓말

팥죽을 먹는다
숟가락이 무겁다
기나긴 오늘 밤이 무겁다
생이라는 것이 이토록 무겁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