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갈비를 먹다

친구랑 양갈비를 먹는다
양꼬치는 먹어 봤어도
양갈비는 친구 덕에 생전 처음 먹는다
세상에서 공짜 밥이 제일 맛있고
고기는 내가 갖다 먹는 무한리필집 보다 누가 구워주는 집이 더 맛있다
친구의 푸념을 들으며 고기를 씹는다
나도 누군가를 씹고 싶지만
오늘은 말 들어주는 날이라 생각하고
장단 맞춰 고기만 씹는다
얘기를 들어주고 술과 고기를 얻어먹는 사이가 친구인가 하는 생각은
집에 가면서 하기로 한다
아이가 커갈수록 생은 무겁고
생이 무거울수록 술은 가볍다
이혼 같은 말이 오고가지만
어떤 말도 생보다 무겁지 않고 술보다 가볍지 않다
마치 양갈비와 같다
돌아오는 길
빗속에서
먹을 땐 몰랐던 생 비린내를 맡았다

AND

고등어조림을 먹다

외할머니에게서 엄마에게로
엄마에게서 나에게로 전해지고
나에게서는 대를 이어 전해질 일 없는 고등어조림을 먹는다
대통령이 아이 둘만 낳으랬다고 둘만 낳은 부모님
아버지, 엄마, 나, 동생
네 식구가 한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다
마지막으로 넷이 밥을 먹은 건 20년 전일까
엄마 나이가 지금 내 나이 때의 일이다
넷 중 아무도 정확히 기억 못하는 옛 일이다
방금 들은 말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 아버지 덕분에
오늘이 넷이 함께 먹는 마지막 밥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엄마 말 잘 듣는 아이가 돼서 열심히 먹었다
동생도 같은 생각인지 그릇을 금방 비웠다
같은 재료 같은 레시피에도 엄마 거에선 엄마 맛이 난다
할머니의 고등어조림을 먹던 엄마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괜찮다고 괜찮을거라고
부모님 이혼했던 그날처럼 뿔뿔이 헤어져 혼자 걷는 옛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던 '꼬치&소주'는 '치킨&호프'로 바뀌고
외롭던 내 봄밤을 밝혀주던 가게 앞 아기 벚나무는
20년 전 내 나이만큼 자랐다

AND

찰밥을 먹다


오늘이 그날이라 그걸 먹는다는 아버지랑
대보름이라 찰밥을 먹는다
보름전 명절에 만든 전이며 나물이며 같이 먹는다
어떤 건 냉장고 안에서 쉬기도 했지만
나만 먹고 아부지는 안 잡수면 되니까
그냥 먹는다

- 아버지 이 고사리 약간 쉬었네요
-...
- 아버지는 드셨어도 쉬었는지 몰랐을거야
- 어, 난 모르지

핀잔인지 아닌지 모를 내 말에
그저 그렇다고만 하는,
아버지 밥그릇에 하나 남은 육전을 얹는다
가족의 증명은 같이 먹는 것
혈연의 증명은 닮은 먹성

무병장수를 기원할 수 없는 아버지와 함께 무병을 기원하는 찰밥을 먹는다
복받으라는 밥에 든 콩, 팥, 밤 따위를 씹는다
어제 다녀간 엄마가 해두고 간 찰밥을 먹는다

AND

딸기를 먹다

만날 할인하는 것만 사 먹기 싫어서
9000원짜리가 아닌 9800원짜리 딸기 바구니를 집었다
어제 물건은 800원이 싼 건가,
내가 집은 딸기가 800원치는 더 신선해 보이는군,
바구니는 반납이 안된다고 해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먹고 사는 게 잘못이란 위안으로 그냥 사왔다
씻어 먹어야 한다는 아내 말을 웃어 넘기고
딸기를 먹는다
윗줄엔 큰 딸기가 아랫줄엔 작은 딸기가 있다
마트에 물건이 있으면 그때가 제철인 세상도
눈속임으로 딸기를 포장하는 일도 웃기지만
지금 먹는 딸기는 상쾌하고 맛있다
맛있지만 더 맛있으라고 설탕에 찍어 먹는다
딸기에선 왜 딸기우유 맛이 안나지? 말해놓고
답을 아는 질문을 한
늙어버린 내가 웃겨서
멈추지 않고 딸기를 먹는다
마트에 더 이상 딸기가 안 나올때까지 자꾸 사 먹고
집안 한구석에 딸기 바구니를 쌓을 일을 생각하면서
계속 딸기를 먹는다

AND

초밥을 먹다

초밥을 먹는다
한 개 삼 백 육 십원
서른 개 15,490원이 20프로 할인으론 안 팔려서
30프로 할인해서 10,840원이 된 초밥을 먹는다
뭘 하고 하루를 살았는지 열 시가 넘도록 아직 저녁을 못 먹었다
포장을 벗기자 길고 피곤했던 하루만큼 오래된 냄새가 난다
달걀, 게맛살이 많고
생선은 광어뿐인 초밥을 먹는다
당신과 함께라서 일까?
맛있다
겉도는 삶이라도 먹어야 삶이니
삼 백원씩 세어가면서
사이좋게 반씩 먹었다
쩌리가 떨이를 먹었다고 하니
아직은 쩌리가 아니라며 당신이 웃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며 웃는다
둘이 마주보고 그냥 웃는다

AND

떡국을 먹다

떡국을 먹는다
해가 바뀌었고
농사짓는 친구가 멀리까지 떡을 보냈다
벼농사를 지어도 정미소가 없으면 쌀을 못 만들고
쌀이 있어도 떡집이 없으면 떡을 못 먹는다
멸치, 달걀, 마늘, 대파까지 내 손에서 나온 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오늘 내가 떡국을 먹을 수 있는 건
설날 아침에도 배달하는 가스집 사장님까지
다들 돕고 사는 때문이다
지금 사는 모양이 어려서 상상했던 미래는 아니지만
살아 있으니 나도 누군가를 돕는거라 생각하며
그러니 됐다는 위안으로
떡국을 끊이고
한 살 더 먹는다

AND

오리로스를 먹다

주물럭과 훈제는 뭔지 알아도
로스는 뭔 뜻인지 모르는데
오리 로스를 먹는다
세상의 많은 뜻을 잃어버린 아버지가 먼저 먹자고 했다
​넷이서 먹는 양을 둘이서 가볍게 먹는 먹성이 혈연의 증명이다
오랜만에 오셨다는 식당주인의 말에 나를 아들이라 소개하는 아버지
아버지에게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될까봐
자꾸 말을 건다

- 아버지
- 응 왜
- 로스는 왜 로스에요?
- 몰라
- 로스트(roast)의 로슨가?
- ....
- 아버지 이제 드셔도 돼요
- 응 그래

기억에는 로스(loss)가 있지만
아직은 카드 결재하는 법을 잊지 않은
아버지가 계산했다
이유도 모르고 죽은 오리는 죄가 없고
이유를 잃어버린 아버지도
이유를 아직 못 찾은 나도 죄는 없다

AND

장칼국수를 먹다

겨울
점심
사람들 모이지 말라는 시기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료와 장칼국수를 먹는다
전염병과 불편함을 장칼국수 한 그릇 먹고 싶은 마음이 이겼다
어느해 이맘 때,
이별에 취해
대관령 자락 어딘가에서 길을 헤메다
막장과 배추만 넣고 끊인 칼국수를 얻어먹은 일이 있다
멸치국물에 냉이, 버섯, 감자까지 들어간 국수 맛이 그때만 못하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기도 하는 곳이니
이 국숫집이 영업집이라 그런건 아닐 것이다
김치맛도 그때만 못한 것이 국숫집 주인 탓은 아닐 것이다
최씨 삼형제 중에 막내에게 시집와서
전쟁통에 남편 먼저 보내고
다음 대의 최씨 삼형제를 혼자서 키웠다는
국수를 내어주던 할머니의 주름진 몸짓이
장칼국수란 말 안에 남았다
잊어버릴 일 하나 없을것 같은 쨍쨍한 겨울날은
혼자서라도 장칼국수를 먹고 싶은 날이 있다
아주머니라 불렀더니 할머니가 아니라 좋다고 했던 할머니 얼굴이
입안에 남은 칼칼함처럼 아련할 뿐이다

AND

총알오징어를 먹다

총알오징어 8마리 만원
쌀 때 사 먹으라고 마트에서 문자도 보내주는 편리한 세상
주머니에 여윳돈이 있는 동료 덕분에
총알오징어를 먹는다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아기 오징어들은 찜통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죽은 것이 무슨 생각이 있으며
이런 생각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물이 총알보다 빠르고
총알은 어린것을 먹는 부끄러움을 숨겨주는 말
내장 째 먹어야 맛있다는 얘기가 한 두 번 오가고
바닷속 오징어 떼를 생각하는 사이에
금새 솥이 비었다
남의 삶을 먹어야 자기 삶이 온전해지는 세상
나도 오늘밤 누군가에게 잡아 먹힐지 모른다

AND

홍어회을 먹다

홍어회를 먹는다
좋아하지 않지만
앞에 앉은 사람이 좋아서
몇 점 먹어본다
여전히 입에 맞지 않지만
앞에 앉은 사람이 홍어를 좋아해서
오랜만에 만난 그 사람이 여전히 좋아서
입에 물고 우물거린다
서로가 참지 않았던 그날로부터
매 순간 내 안의 불을 삭이고 살았다
뱃속의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맛있다는 말만 한 번, 두 번
앞에 앉은 사람은 울지도 웃지도 않고
나도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콧등이 시큰거리거나 말거나
삭힌 홍어회만 씹는다

AND

김치전을 먹다

한 장에 오천원
셋이 앉아 한 장에 소주 다섯 병을 먹는 김치전을 먹는다
김치전은 집에서 해 먹어도 맛있지만
술은 밖에서 사 먹는 게 맛있다
소주 한 병 사 천 원
비쌀수록 맛있는 소주를 입 안에서 굴리며
나와 내 앞사람과 그 옆사람이 굴러가는 얘기를 한다
마주앉은 세 사람이 세상이라면
글러먹은 세상이 굴러가는 얘기를 한다
빈병이 굴러다니기 전에
한 장 더 시킨다
가게 주인은 말이 없고
솔직히 이집 김치전은 맛이 없다
맛 없다면서 한 장 더 시키는 이유는 뭔지
김치전을 먹기 위해 소주를 먹는지 소주를 먹기 위해 김치전을 먹는지
답을 아는 뻔한 질문이지만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AND

탕수육을 먹다

탕수육을 먹는다
오늘은 월급날이다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돼지고기 튀김이 먹고 싶었다
혼자서 대(大)자는 무리고 중(中)자를 시킨다
- 소스는 따로 주세요 -
돼지고기와 밀가루와 기름
튀김은 순수함의 결정체
그 순수를 양조간장에 찍어 먹는다
익숙한 향이 주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다
- 맥주도 한 병 주세요 -
전염병이 도는 세상이라
식당엔 나와 주방장 뿐
TV에선 무관중의 프로야구 중계
아웃카운트가 하나 늘어날 때마다 고기 한 점과 맥주 한 모금
의미 없는 규칙,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
- 잘 먹었습니다 -
튀김은 절반 이상 남았고 야구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의 기분도 아직은 제자리에 있는데
집으로 향하는 텅빈 거리
입안에 간장 냄새만 남았다

AND

도시락을 먹다


올해 나온 쌀로 지은 밥
이런걸로 사기를 치진 않겠지
형형색색의 반찬
세상은 무지개 빛이 아니다

허겁지겁 먹는데
밥알이 입안에서 뒹군다
내가 농사지은 쌀로
지어 먹었던 밥은
간장이랑만
김치랑만
대충 아무렇게나 먹어도
속이 든든했는데
포장지의 엄마 미소로
나를 유혹했던 밥이
맛이 없다

최저임금 6030원
최고급 편의점 도시락 3500원
집에 쌀도 있고
벌어둔 돈도 있지만
지난달에 실직하고
불안한 미래 때문에
나이 40에
태어나서 처음
편의점 도시락을 먹었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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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을 먹다

1월 1일,
아내가 자는 동안 두 끼를 먹었다
아침은 남아있던 된장국
점심은 새로 끓인 청국장
허기가 진 것도 아니었는데
허겁지겁 먹었다
새 날엔 새로 끓인 것을 먹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해피뉴이어
늦게 일어난 아내도 청국장을 먹는다
- 잘 먹었어
새 날, 오래된 관계
새 마음, 해묵은 실패
새로 끓인 찌개, 되돌릴 수 없는 나이
갈팡질팡하며 영원한 첫날을 산다

AND

불고기를 먹다

아버지랑 둘이 앉아서 아침부터 불고기를 먹는다
국도 없고 다른 찬은 김치 하나다
어제는 아버지 생일이고 엊저녁에는 나 혼자서 같은 걸 먹었다
아버지 사는 모습은 볼때마다 안됐지만
밥은 먹어야 그렇게라도 산다
불과 고기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
인류의 번영 과정을 떠올리게 되는 조합
아버지랑 뭘 먹을때는 가급적 그 음식의 기원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미 쇠락했고 나도 쇠락하는 나이다
각자의 전성기를 모두 흘려보낸 두 사내가
오래된 식탁에 마주앉아 먼저 태어난 사람 70살 생일밥을 먹는다
아버지는 잠들고
나는 왔던 길을 돌아 멸망으로 향한다

AND

돼지국밥을 먹다


아버지랑 병원 근처 국밥집에서 돼지국밥을 먹는다
이 고기가 어떻게 내 앞에까지 왔는지
왜 바닷가에 있는 부산같은 대도시에서 돼지국밥이 유명한지
서울 변두리에 부산돼지국밥집이 있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떠오르는 생각들은 일단 잊고
먹는일에 집중한다
마주앉은 아버지는 방금전 일도 잊는 사람이 됐고
다행이라면 옛날에 태어난 나를 잊지는 않았다

- 아버지.....
- 어, 왜?

말을 이을 수 없어서 국밥에 고개를 묻는다
뜨거운 김이 안경에 서리고 뺨을 달군다

- 아버지, 맛이 어때요?
- 응, 맛있어.

- 역시 한국 사람은 따뜻한 국밥이죠?
- 응, 맛있다.

- 아버지.....
- 어, 왜? 나 괜찮아.

말을 이을 수 없어서 식어버린 뚝배기에 고개를 묻는다
자꾸만 고개를 묻는다

AND

토스트를 먹다

오후 네 시,
동네 초등학교 앞 '새참 토스트'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아이들과 섞여서​​
토스트를 먹는다
싸구려 식빵에 밴 달콤한 마가린 냄새
양파랑 쪽파를 썰어 넣고 부친 계란
얇은 햄과 치즈
머스타드와 케첩, 설탕까지
모든것이 조화로운
토스트를 먹는다
아침에 퇴근하던 아버지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을 걸어와
아침까지 잠들지 않던 내 방 앞에 두곤 했던
2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맛의
토스트를 먹는다
뒤섞여 조화롭지 않고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때보다 더 커버린 중년의 아이가
아이들 사이에 우뚝 서서
토스트를 먹는다

AND

맥주를 먹다

친구를 만났다
먼 내륙에서 바다까지 나를 보러 온 친구
함께 커피를 마시고
누가 날 찾아올때마다 먹지만
어떻게 생긴지 모르는
삼숙이 매운탕을 먹었다
자리를 옮겨 비틀즈를 들으며 맥주를 먹는다
멀리 오징어 잡이 배 불빛이 선명하다
아직은 비틀거리지 않는 시간이다
맥주을 먹는지 안주로 나온 굴 튀김을 먹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친구의 얘기를 먹는지
잔이 빌 때마다 묻지도 않고 잔을 채워주는 사장님까지
먹는 일도 사는 일도 항상 질문 속에 있다
친구는 생활인이니 술은 내가 사야지
그렇다면 내 삶은 생활이 아닌지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생활인지
일탈은 생활에 포함되는지
우리 중에 일탈하지 않은 사람은 누군지
잘 지내란 말로 헤어질 뿐인 친구와
abbey road 위에서 비틀거리며 맥주를 먹었다

AND

족발을 먹다

족발을 먹는다
마늘족발 대(大)자
전화한지 삼십분도 안되서
1.8킬로미터를 달려오는 배달민국
족발은 서민음식이라는데
얼마부터 얼마까지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서민 음식인가
나는 서민인가
족발, 쟁반국수, 국수 소스, 새우젓, 상추, 배추, 마늘, 고추, 된장, 콜라까지 모든것이 플라스틱 안에 들어있다
무언가를 플라스틱과 함게 먹는 일은 의식조차 못할만큼 익숙하다
위쪽에 살점을 다 먹으니 바닥에 뼈가 보인다
발가락 뼈도 있고 종아리 뼈도 있다
애인과 마주앉아 뼈를 잡고 살을 뜯는다
사랑은 육식을 닮았다
앞다리든 뒷다리든 상관없이 맛있다
국산이든 수입이든 상관없이 맛있다
눈 앞에서 먹으니 그게 사랑인가
애정하는 것은 돼지고기인지 당신인지
둘 다 아니면 허겁지겁 족발을 먹는 나인지
먹기 위해 키워지는 것과 먹기 위해 사는 것 사이에서
혼란스럽게 족발을 먹는다

AND

투게더를 먹다

여름밤
1974년생
나보다 네 살 많은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동생과 둘이 먹던 삼십 년 전엔 서로 더 먹으려고 선을 긋고 다투기도 했지만
원한다면 혼자서 한 통 다 먹을 수 있는
모자라면 한 통 더 사 먹을 수 있는
'함께'란 이름을 가진 아이스크림을 애타게 먹고 싶지는 않은
21세기를
나는 사랑한다
열대야에 아이스크림이 빠르게 녹고
숟가락으로 녹은 부분만 살살 긇어 먹는다
달콤하다
숟가락이 닿은 부분은 더 빠르게 녹고
입 안이 달콤할수록
단단함이 사라지는 속도는 북극의 빙하가 녹는 속도만큼 빠르다
다 먹지 못하고 냉장고에 넣는다
하루만큼 유예된 멸망도 입 속에선 달콤하다
어쩌면 마지막인 여름밤
어쩌면 마지막인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내와 나
온 가족이 함께 '투게더'를 먹었다

AND

참치회를 먹다

참치회를 먹는다
얼었다가 녹은 걸 먹는다
얼렸다가 녹인 걸 먹는다
모든 인간은 어쨋든 다른 생명을 먹는다
넷이 앉아서 자리에 없는 사람을 욕하면서 먹는다
참치는 욕을 먹고 살진 않았다
세상에 사람보다 참치가 흔한건지
무한리필 해주는 참치를 먹는다
참치를 먹는지 다른 걸 먹는지도 모르고
주방장이 주는대로 먹는다
세상에 참치보다 술이 흔한건지
참치를 먹는지 술을 먹는지 모르고 먹는다
참치회를 먹는다
셋이 남아서 먼저 간 사람을 욕하면서 먹는다
참치를 간스메로만 먹어봤다던 사람을 욕하면서 먹는다
참치는 욕을 먹고 살진 않았다
참치는 죽고 나서야 욕을 듣는다
모든 인간은 욕을 먹는다

AND

곰국을 먹다

곰국을 먹는다
꽝꽝 얼린 것을 녹이고
밥을 말아서 먹는다
시절은 잿빛이라도
쌀밥과 곰국은 뽀얗게 같은 빛이다
혼자서 곰국을 먹는다
뼈를 부딪치던 사랑은 어디 갔을까
뼛국물보다 든든하던 사람은 어디 갔을까
뼛속까지 사랑해도 이별을 하고
혼자먹는 곰국은 이별과 같은 말이고
곰국의 반댓말은 사랑인가 이별인가
얼었던 곰국을
혼자서 먹어도
뱃속은 따뜻하다
눈물은 빛깔이 없고
나는 소금도 안 친 곰국을 먹는다

AND

오징어 회를 먹다

친구를 만났다
오후 세 시,
바닷가에서,
10년만에,
풍년이라는 오징어 회를 먹는다
10년 전도 지금도
산 것을 잡아 먹는 일에 풍년이란 말을 쓰는 시절이다
친구 앞에선지 오징어 회 앞에선지
그것도 아니면 술 앞에선지
아내도 뒷전, 생활도 뒷전이다
앞서는 것이 있어야 뒷전인 것도 있다
날로 먹는 오징어는 끈적하다
두고온 미련 때문인지 원래 그런지
취기가 오르자 오징어가 붉게 달아오른다
초장 때문인지 발가벗겨진 것이 부끄러워 그런지
답을 알면서도 자꾸 되묻는 일은
세상이 모르는 다른 답을 듣고 싶어선지
바다에는 오징어보다 플라스틱이 많고
그런 바다에서 잡은 오징어를 먹어도 되는지
플라스틱이 오징어고 오징어가 플라스틱이 아닌지
생활은 왜 계속 뒷전으로만 밀리는지
생만 있고 활이 없는 삶
그래서 자꾸 날것을 먹게 되는지
멀리 오징어 잡이 배가 불을 밝히고도
생활은 여전히 무언가의 뒤에 있고
흐트러진 채 흐트러진 오징어 회를 먹는다

AND

자화상 - 볶음밥을 먹다 -

토요일 오후
주섬주섬 일어나
냉장고를 뒤진다
마늘 양파 파프리카 그리고 토마토 케첩
뱃속에 들어가는 것들은 이름만 불러도 기분이 좋다
편으로 썬 마늘을 소금 후추 넣고 기름에 지지다가
마늘이 갈색으로 변하면
나머지 재료와 밥을 넣고 볶는다
지지고 볶고 산다는 표현만큼
먹고 가는 일도 진부해진지 오래다
냄비째 상에 올린다
냄비가 둥글어 밥도 둥글다
숟가락으로 눈과 입을 파낸 볶음밥은
어딘지 나를 닮았다
나를 먹는다는 생각으로
턱에서 시작해서 이마까지 깨끗하게 먹는다
나를 파 먹고 또 하루를 살았다

AND

된장국을 먹다

새벽 두 시,
된장국을 먹는다
허기를 참지 못하고 
멸치 육수도 내지 않고 된장과 토란만 넣고 끓인
맑고 담백한 토란 된장국을 먹는다
배추, 아욱, 시금치부터
새우, 게, 돼지고기까지
아무거나 넣고 끓여도
한 가지 재료만 넣어도 여러 재료를 섞어 넣어도
맑게 끓여도 탁하게 끓여도
다 맛있는 된장국을 먹는다
어차피 된장국인 된장국을 먹는다
된장은 힘이 세고
나도 된장처럼 살겠다 다짐하며 된장국을 먹는다

AND

보쌈을 먹다

삶은 고기를 먹는다
삶는 것과 찌는 것의 차이는 뭔지
어차피 삶은 찜통이 아닌지
뼈와 기름이 적당히 붙어 있는 삶은 고기를 먹는다
적당하다는 말보다 적당하지 않은 말이 없고
오늘도 적당히 보낸 하루가 끝나는 중이다
상추에 고기를 얹고 마늘, 고추, 김치 같은 것을 그 위에 얹어서 먹는다
싸 먹으니까 보쌈인가
가능하다면 삶도 한 입에 쌈 싸먹듯 살고 싶다
내 뱃속의 고기가 된 돼지의 삶
고기는 삶아 먹어야 맛이고 삶은 고기다
삶은 고기 삶은 고기 삶은 고기​
삶은 고기를 먹는다

AND

잡채밥

잡채밥을 먹는다
칼국수도 7000원
백반도 7000원인 시대
8000원으론 남는게 없고
10000원은 과하고
그렇다고 9000원을 받기는 애매한
8500원 짜리 잡채밥을 먹는다
밥 위에 적당량의 당면, 고기, 야채
달지도 짜지도 않은 계란국
적당함은 어정쩡함
어정쩡함은 망설임
망설임의 값 500원
오늘도 칭찬할 일도 비난할 일도 없는 하루
지갑엔 내게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만 원짜리 한 장
​12000원 짜리 잡탕밥은 너무 과하고
혼자 5000원짜리 짜장면을 먹는 일은 마음 속 어딘가를 긁어 놓기에
뭘 먹을까 망설이다가 어정쩡하게 주문을 하고 적당한 가격의 잡채밥을 먹는다

AND

카레를 먹다

양파 껍질은 잘 벗겼는데
감자 껍질 대신 손가락 껍질을 벗겼다
피 묻은 감자를 씻어서 잘게 잘랐다
감자 대신 손가락을 자르진 않았다
다행이다
언제든 다칠 수 있는 인간의 약한 몸을 생각하면서 카레를 만든다
그 몸을 지탱하기 위해 잘게 다져진 재료들
결코 단단하지 않은 것들끼리 어울려 산다
아무 재료나 넣어도 맛있는 마법의 가루
인도에서 시작해서 영국과 일본을 거쳐 전세계로 퍼지면서
내 밥상에 올라온 세월을 생각하면서 카레를 먹는다
입 안의 카레향은 누군가의 희생
결코 옳지 않은 일들로 하루를 산다
강황과 울금 사이
커리와 카레 사이
감자껍질과 손가락 껍질 사이
마주 않은 나와 너 사이에서
카레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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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해장국을 먹다

어제도 술을 마셨다
장터 국밥집에서 뼈해장국을 먹는다
우거지, 올갱이, 콩나물 해장국도 있고 짬뽕을 먹어도 되지만
뼈해장국을 먹어야 할 것 같은 날이 있다
숙취로 정강이나 무릎뼈가 쑤신날이 있다​
40년을 먹어봐도 해장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이 해장이니 뼈해장국을 먹는다
남의 뼈로 내 뼈가 단단해지는 기분으로 뼈해장국을 먹는다
스페인, 독일에서 온 돼지등뼈에서 살을 발라내면서
죽어서 바다를 건넌 돼지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세상을
훗날, 유럽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해장국집을 차릴 생각을 한다
뼛국물을 바닥까지 비우고 나온 국밥집 앞
인파 사이로 뼈를 삶는 솥뚜껑이 들썩거리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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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맥을 먹다

소맥을 만다
섞는 걸 만다고 하는 이상한 세상
많은 쪽이 작은 쪽을 잡아 먹는 당연한 세상
오늘도 그만둘까 생각했다
그만두는 대신 소맥을 만다
그만뒀어도 소맥을 말았을 것이다
매일 습관적으로 소맥을 말고 있으니 삶이 돌돌 말리는 것을 말릴 수가 없다
술에 혀는 꼬이지만 삶이 뒤틀려 꼬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1:9로 2:8로 3:7로도 말고 어떤날은 반반으로 만다
소주의 비율이 높아질수록 술은 달고 삶은 쓰다
황금비율이니 꿀 맛이니 하며 마신다
삶이 아니면 죽음인 일
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부끄러움을 모르고 소맥을 만다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소맥을 마신다
소맥은 쏘맥이라 불러야 맛이지만
여전히 살아서 쏘맥을 말고 있는 나는 쑥맥은 아니다
병이 사람과 사랑을 병들게 하고
가지런히 놓인 술병이 나와 내 사랑을 병들게 한다
빈 앞자리와 마주 앉아 텅빈 소백을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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