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에 고구미 만나서 산 속에서 오붓하게 돼지고기 두 팩 구워 먹었다. 술은 꽤 먹었지만 과하지 않았고 베프랑 오랜만에 만나서 좋았다. 고구미는 대학에 이어서 농업학교도 내 후배가 됐다. 좋다. 마트에서 장보는 중에 항정살을 집어드는 나를 보면서 기름기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생각했다. 내가 연어랑 참치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튀김도 뺄 수 없구나. 고구미가 내가 올해 만든 '첫봄'이란 노래를 들어주고 좋다고 했고 한 번 더 불러 달라고 했다. 기분 좋아서 시도 두 개 읽었다. 이런 순간이 내게 힘을 준다.
고구미는 토요일 아침 다섯 시에 피망 농사 지으러 평창으로 돌아가고 같은 시간에 인천에서 출발한 건쓰짱을 여덟 시에 만났다. 커피 마시고 몇 나디 나누고 점심 먹고 누워 있다가 저녁 일곱시에 프로 축구 봤다. 11,000명이 넘는 관중이 들었다. 빗속에. 건쓰짱은 축구장은 첨이라고 했고 응원에 들뜨는 모습을 보였다. 강원 서포터즈 응원에 들뜨는 정도면 수원 삼성 응원을 보면 기절할 판이다. 강원이 졌지만 경기는 잼있었다. 강원은 올해 폼이 좋은데 상무랑은 두 번 붙어서 두 번 다 졌네. 연패했다고 상대팀이 천적인건 아니다. 스포츠 경기란 그런 것이고 인생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친구들 사는 거 보면 나는 괜찮은 건가 싶기도 하다. 신경정신과에 우울증 약 타러 세 번째 들러서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그런 생각에 드네. 아버지 만나고 나면 우울한거랑 - 어제도 아버지 만났다. - 집이 없는 것 - 10억은 부자도 아니지만 10억 부자가 아닌 것 - 회사가기 싫은 것 제외하면 큰 스트레스는 없다. 아이가 없고 빚이 없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는 뭔가가 없기에 생기기도 하지만 뭔가가 없기에 없는 경우가 더 많다. 내 스트레스 요인 중에 허리 통증과 어깨 통증 재발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편인데. 아프지 않다면, 통증이 없었다면..... 생각해 본다. 친구들은 자녀들의 학폭 연루, 아파트 대출금, 피곤한 직장생활, 아내와의 갈등 등의 문제가 있다. 몸 아픈건 우리 나이엔 공통이다.
우울증의 해결책으로 연애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남현이를 보면 맞는 것 같다. 이 친구는 카톡으로만 대화해봐도 원래보다 더 선량해졌고 예쁜말을 쓰는 사람이 됐다. - 원래도 나쁜 말을 쓰는 놈은 아니다. - 나는 기본적으로 아내랑 잘 지내니까 - 얼굴 본다고 설레는 건 아니지만 내 아내는 귀엽다 - 만일 내가 아내가 아닌 사람과 연애를 하면 우울증의 해결대신 배덕감에 정신병 수준의 희열을 느끼거나 죄책감에 미쳐버리거나 둘 중에 하나일 거라 생각한다.
약발이 잘 드는지 최근 2주 동안 딱 한 번 울었다. 근데 자다 수시로 깨는 건 여전하다.
머릿속이 맑게 살고 싶어서 조만간 담배를 끊으려고 한다. 담뱃갑에 그려진 10종류의 담배 경고 문구를 모으는 중인데, 간접흡연 피해 하나 남았다. 근데 그 한 갑이 잘 안 걸리네. 그 담배 한 갑을 마지막으로 금연 하고자 한다. 잘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