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6일, 분주했던 하루였다.

 10시에 머리 잘랐다. 아내는 나랑 다른 미용실에서 10시에 머리 잘랐다. 둘 다 네이버 예약하고 갔고 둘 다 미용실에 열 시에 연다는 걸 알았다. 이발소에선 아침 6시에 머리 자른적도 있지만 미용실은 보통 열 시에 오픈하는구나 생각했다.

 벌초 다녀왔다. 할아버지 한 분 할머니 두 분 무덤이 - 무덤을 산소라 하는 건 왜인가? 한국에서는 직계 조상의 묘를 산소라 한다는데..... - 강릉에 있고 나는 할아버지의 장손인데 강릉에 산다. 명절 가까워지면 벌초하러 가서 작은 아버지 도와야 한단 생각은 하지만 먼저 전화하게 되진 않는다.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는달까. 작은아버지 쪽에서도 어떤 부담이 - 본인 부모님 무덤이니까... -  있어서 나에게 흔쾌히 연락하진 않는다.

 벌초 날짜도 아버지가 강릉에 온다는 것도 전날 알았다. 엄마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고 나니 jj작은 아버지, 강릉 작은어머니에게 연이어 전화가 왔다. 다른 건으로 둘째 이모랑도 두 번 통화했다. 어른들과 통화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고 마음은 탈수 직전이 된다.

 구미 사시는 큰 고모가 강릉에 왔다. 아버지 쪽 오 남매가 다 모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려나? 이번 벌초에 그 정도의 의미는 있었다. 근데 아버지는 누나도 동생들도 못 알아보는 것 같았는데...

 이번 벌초 행사를 통해 얻은 정보 등(무작위)
 - 막내 삼촌 올 초에 회사 그만둠. 회사 스트레스로 11년간 신경정신과 다닌 얘기를 이제 와서니까 얘기할 수 있다고 함.(71년 생인데 옛날 사람인건지, 그런 자존감 때문에 대기업에서 높은 자리까지 간 건지)
 - 벼 이삭이 맺힐 때 즈음 날이 너무 더워서 강릉 일부 지역의 벼농사 결과물에 검은 벼가 많다고 함.(쌀값이 만만치 않겠네요, 삼촌에게 물으니 정부 비축분도 많지 않다고 함. 이렇게 위기는 서서히 현실이 되고 나 또한 물 끓는 양은 냄비 안의 개구리)
 - 아내가 가족 행사에 참석했다. 쏘리 앤 땡큐(쏘리가 먼저 나오네)
 - 엄마가 바닷가에 발 담그고 놀았음 사진도 찍었다.(나도 기분 안 좋지만 피눈물을 흘려서 번 돈이라도 투자 실패는 엄마 본인 책임임)
 - 아버지랑 경포 바닷가에서 셀카 찍음.(엄마랑도 찍을 걸)
 - 추석 때 차례 지내러 안 가기로 함.(그 다음 주말에 오직 엄마만 보러 갈게요)
 - 아버지랑 통화할 때 강릉 오고 싶어하기에 한 번 모셔와서 태어난 동네 보여드릴까 싶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아버지는 본인이 현재 서 있는 곳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이 됐다.)

 무덤 앞에 음식 차려놓고 절 하기 전에 엄마가 내년 벌초 때도 또 오겠다고 무덤에 대고 말했다. - 엄마 안 그래도 되는데...- 엄마는 본인의 투자 실패가 조상에게 못한 탓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 사람이니까 그냥 두자.

 아버지는 멍했다. 산소에서도 바닷가에서도 작은집에서 밥 먹을때도 멍했다. 누나 이름도 동생들 이름도 며느리 이름도 모른다. 고모들은 약간 속이 상했던 것 같다. 그래도 누나랑 동생인 건 아는 것 같았다. - 모르는 것도 같았다. - 멀리 있는 내 아내를 가리키며 '와이프' 라고 했다. 우리 아버지 와이프란 단어는 잊지 않았네. 많이 썼던 말이기 때문이겠지.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에 대한 아내의 소감은 '평범한 치매 노인' 이었다.

 가족 모임 끝나고 아내랑 잠깐 시간 보내고 남현이랑 남현이 여친 - 남현이 본인이 애인이란 말대신 여친이란 말을 씀 - 잠깐 만났다. 친구가 차 끌고 당일치기로 강릉에 오고 추석 연휴에는 여수에 놀러 가는 것 나랑 카톡할 때 톡 안에 어떤 애정이 있는 것이 사랑의 힘이라 생각한다. 연애의 힘인가? 사랑이라 생각하는 착각의 힘? 아무튼 힘이다. 연애하는 친구가 살짝 부럽기도 하네.

 2023년 무력한 내 삶의 가장 큰 원동력은 아내인가 턱걸이인가? ㅋㅋㅋ

 사랑인가? 물으니 사랑이지만 사랑인가? 묻는 순간 사랑이 아니기도 하다.

 답이 정해졌지민 정해지지 않은 질문

 말이 없는 건 죽은 자 뿐인가? 아버지를 보면서 이 질문을 떠올린 날이다.

 아내가 제발 복권 좀 사라는 내 소원을 들어준 날이었다는 걸 기억해 둔다. - 결과는 낙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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