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떠도는 짤 중에 10대에 독립운동하다가 붙잡힌 조상님들 흑백 사진이 있다. 일본애들이 촬영한 범죄자 머그샷 모음이다. 다들 눈빛이 총명하고 조선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하고 있다. 나라 잃은 빡침을 겪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눈빛이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오늘 제가 삽니다.

집, 회사, 운동 또는 술의 반복으로 무력하게 보내고 있다. 앞으로도 쭉 이럴까봐 두렵다. 원인은 미상인데, 미상이 아니다.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주변일들 때문이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이다.

올들어 k리그 하이라이트를 유튜브에서 보기 시작했다. 박지성이 맨유에서 뛰던 시절 이후로 참 오랜만에 - 참 오래도 살았다. - 축구에 관심이 생겨서 후반기 들어 강릉종합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쓰는 FC강원 홈경기를 세 게임 봤다. 아는 형이랑 한 번, 아내랑 한 번, - 수원 삼성 응원단 짱 - 친구랑 한 번 봤다. 이번 주말 경기도 표는 사 놨는데, 누구랑 보게될지 모르겠다.

FC 강원은 재작년에 2부로 떨어질 뻔 했는데, 최용수가 감독으로 와서 극적으로 팀을 1부에 잔류 시켰고, 작년에는 안정적으로 1부리그에 남았다. 올해는 남은 게임 잘 치러도 1부 12팀 중에 10위다. 2부로 갈 가능성도 있는 10위까지는 무조건 확정인 만큼 못했다. 10위나 11위를 해야 1부리그 잔류를 두고 벌이는 데쓰매치라도 할 수 있다. 대표이사가 김병지로 바뀌고 시즌 중에 감독이 윤정환으로 바뀌면서 어떤 팬들에게는 스포츠에 정치가 개입하면 어떻게 팀이 맛탱이가 가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그 내막은 알기가 어렵다. - 정치란 비밀스러운 부분이 90프로니까 - 감독도 코치도 선수도 직업이 축구인 사람들인데, 얼마나 이기고 싶겠나. 그렇지만 상대방도 이기고 싶다는 것이 인간 세계의 생리와 닮았다. 직업의 영역에 즐기면서 같은 건 없다. 그래서 영화 머니볼이 명작이다. 윤정환 감독은 어느날의 인터뷰에서 선수들의 절박함이 없다는 얘기를 했고 강원은 그 후에도 몇 게임을 비기거나 지기만 하다가 지난 주말에 현재 1위 팀을 상대로 이겼다.

포메이션, 선수 교체 등 감독의 작전이 잘 맞아 떨어졌고 상대팀은 요즘 잘 안풀리는 중이었고 선수들의 승리에 대한 절박함도 있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주말 경기는 운전에 자신있는 사람이 대형면허 따듯 순조로웠다. 강원 골수팬은 아니지만 지금 강원도에 살고 있고 상대팀보다 약팀이니까 강원이 이기기를 바랐다. 첫 골, 두 번째 골이 들어갈 때 소리를 질렀다. 쌓여있던 어떤 것이 약간은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감독도 선수들도 팬들도 다 기뻤다. 이긴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나는 누구와 경쟁하나? 나는 어떤 목표를 향하고 있나? 내게는 원하는 목표를 위해 성실함을 발휘해서 성취한 경험이 있나? 지금 기분엔 없는 것 같다.

사람이 늙는 시기가 있다고 하는데, 요즘 내가 그런것 같다.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기후 파괴가 덮치지 않는 곳이 없고 일단 피해는 가난한 사람들부터 받는다. 아내가 경차 타고 싶다고 해서 경차 새차로 계약했다. 집 주인이 터무니 없는 가격에 내 놓은 집은 아무도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 회사에선 직원들과도 기간제 선생님들과도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다. 나랑 같은 직종에 있던 형님들 둘이 최근에 죽었다. 안면도에서 근무하는 형은 근무기간 20년을 채우자 마자 명퇴를 결정했다. 아내 동료는 우리보다 10살 어린데, 암진단을 받았다. 아버지는 한결같이 엉망이고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마음쓰는 일에 점점 지쳐간다.

아내는 책이라도 읽으라고 하지만 술을 먹는게 낫다. 그런데 최근에 술을 좀 줄였다. 그래서 무력한가? 그건 아니다. 퇴근하고 운동할 때는 기분이 좋은데, 운동 마치면 곧바로 기분이 다시 다운된다. 축구 경기도 경기가 끝난 날에는 흥분이 남아 있는데, 다음날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술도 마실 때만 기분 좋은 거랑 비슷하다.

무력감이야 평생을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고 이러다가 괜찮아지곤 하는데, 이번에는 괜찮아 질 것 같지가 않네. 잼버리 케이팝콘서트가 끝난 상암 월드컵 경기장 잔디 같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괜찮아지면 괜찮아지는데로 아니면 아닌대로 살아보기로 한다. 욕망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을 생각한다.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는 것도. - 운동화를 사야하고 머리를 잘라야 하고 차에 기름을 넣어야 하고 밥도 먹고 살아야 해서 너무 오랜만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

주말에 아버지한테 갈까하다가 오늘 축구표를 예매했다. 아버지한테 별로 미안하지가 않네. 다음주에 보면 되니까 그런가?

내 마음 고요하고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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