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 1시 52분에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 마침 자다가 깨서 잠깐 멍하게 있던 중이라 바로 전화를 받았다. 머릿속에서 시간 혼란이 온 아버지는 아무도 없는 그 시간에 1시간 정도 걸리는 산책코스를 돌고 왔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내가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네, 안녕하세요.' 하고 전화를 받았다. 데이케어센터에서 차 타러 나오라고 전화한 줄 알았던 거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새벽에 나한테 전화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고 뭔가가 이상했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엊저녁에 통화할 때도 했다. 이 정도만 말똥말똥해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다만 새벽에 시간개념 없이 밖을 돌아다닌 걸 처음이라 살짝 걱정이다. 아버지한테는 사람 없을 때는 어디 돌아다니시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가 체크카드를 사용하면 나한테 알림이 온다. 데이케어센터에 있는 날이 많으니까 알림은 한 달에 많아야 10개 정도 온다. 마트에서 뭘 사거나 머리를 자르거나 김밥을 사먹거나 이런거다. 8000원 이하가 많다. '8000원 이하만 소비하는 삶' 짠하다. 어제는 빵집에서 빵을 샀다는 알림이 왔고 - 센터에서 저녁을 먹었지만 빵이 드시고 싶었나보다 생각함 - 커피가 먹고 싶은데, 커피가 떨어져서 커피 사러 나왔다고 하길래, 아버지는 위암이라 커피 드시면 안된다고 했다. 위암이라 반복해서 얘기해줘도 자꾸 잊는 걸 보면 아버지 머릿속에는 애초부터 본인이 '암'에 걸릴수도 있다는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세상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아버지의 지금 상태는 어떤면에선 좋고 어떤면에선 좋지 않다. 햄버거와 찬물의 공통점은 위 아래가 있다는 것이고 다른 많은 것들도 그러하니까.

아버지가 위암 판정 받고 서울 몇 번 왔다갔다 한 이후에 부쩍 우울해졌다. 산불조심 기간이라 주말에 사무실에서 근무를 섰다. 일요일 오후 늦게 친구 N이 어렸을 때 사진을 카톡으로 보냈다. 고등학생이던 나, 20대 초반이던 나를 봤다. 친구들이랑 부석사 갔던 것도 생각나고 고교동창들 이름이랑 별명도 떠올랐다. 뭔가 위로가 됐다.

나는 지금 어떤 추억을 쌓고 있나? 아버지와의 추억을 쌓고 있네. 아버지한테도 추억이 쌓일까?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중요한가? 과거가 아름답게 기억된다면 그것은 그게 다 지나간 일이기 때문이다. 먼저 아버지 만났을 때는 아버지 회사 다닐 때 얘기를 들었다. 사장이 아들한테 회사를 물려줬고 그 사장이 술 먹고 노는 것만 좋아해서 많은 직원들이 몰래몰래 돈을 빼 가고 그러다가 회사가 망했다는 얘기였다. 아버지의 기억은 내가 바로 위에 쓴 문장보다 약간 길 뿐이다. 짧게 요약할 수 있는 기억. 짧게 기억되는 과거. 아버지는 아직 나를 알아보고 내 이름도 안다. 나도 언젠가는 아버지를 짧게 기억할 뿐이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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