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벌초했다. 1년에 한 번 하는 벌초. 아버지 고향이 강릉이고 할아버지랑 할머니 두 분 산소가 강릉에 있고 나는 강릉에 살고 장손이라 벌초는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 근데 작년에는 빠졌다. 핑계 거리가 있었는지 진짜 빠질만한 이유가 기억이 안난다. 내가 빠지면 강릉에 사는 작은 아버지가 벌초 독박을 쓰게된다. - 삼촌은 혼자 해도 별일 아니라 생각하는 것 같긴 하다. - 암튼 올해는 엄마 뇌수술과 막내 작은엄마 암수술로 벌초하고 산소에 절하는 걸로 추석 차례를 대신하기로 했기에 큰 행사가 됐다.

아마도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 남자형제 넷이 다 모인 마지막 날이 아니었나 싶다. 원래 계획은 아버지한테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엄마랑 둘째 삼촌만 강릉에 오려고 했는데, 이모들이 ‘그래도 일우 아바이 정신 조금이라도 있을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벌초를 같이 가는게 좋겠다’ 고 해서 아버지도 오게 됐다.

아버지는 어제 데이케어센터에 갔다와서 강릉갈거니까 오산 엄마집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들뜬 기분으로 금요일 퇴근 시간에 가리봉(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가기 위한 버스를 탔다. 그런데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혼란이 와서 어딘지 모르는 곳에 내렸다. 나는 지난번에 아버지가 혼자서 엄마집에 찾아오지 못한일이 신경 쓰여서 계속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가 버스에서 어디서 내렸는지 모르고 현위치를 헷갈리길래 택시를 타고 가리봉역으로 가시라고 했다. 아버지는 택시에서 전화를 했고 택시기사가 구로역으로 가는 중이라고 말하라는 소리가 아버지의 말과 겹쳐들렸다. ‘아버지, 구로역에 내리시면 인천가는 것도 오니까 헷갈리지 말고 천안, 오산, 신창 가는 열차 타세요.’ 얼마후 아버지에게 신창가는 열차를 타는 중이라고 전화가 왔다. 안심했다. ‘아버지 주무시지 마시고 오산역에서 잘 내리세요.’ 아버지가 잘 도착했나 궁금해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흥분한 목소리로 방금 집에 도착했고 아버지가 오산역이 아니라 오산대역에서 내렸고 역 앞에 있지 않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바람에 택시타고 돌아다니면서 아버지를 찾았다고 했다. - 오늘 만나본 엄마는 어제 소리를 너무 지른 탓에 편도선이 부었다. - 애가 많이 났을 일이다. 엄마는 아버지랑 집에 돌아오자 마자 왕만두 두 개 넣고 아버지 드실 라면을 끓이는 중이라 했다. 이게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어제, 정처없는 모험가가 되어서 목적지는 있지만 어떻게 가야하는지는 헷갈리는 방랑을 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아버지는 어제부로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 확정됐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 엄마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엄마가 잘 받아들여서 좋다.

산소 풀 다 깎고 절하고 술 뿌리고 절 받은 음식 좀 먹다가 강릉 작은 고모까지 9명이 막국수를 먹고 막국수 집 옆에서 커피를 마셨다. 어른들은 수다를 떨었고 나는 아버지랑 많은 얘기를 했다. 주로 한 얘기는 ‘아버지, 잘 하고 있어요.’ ‘아버지, 저희 다음주에 만날거에요.’ 두 가지다. 아버지는 강릉에 오니 어릴때 생각이 났는지 초등학교 두 번 옮겨 다닌일과 학교 주변에 살던 친구들이 멀리서 오는 친구들한테 텃세 부린 일을 내게 말했다. 여름이면 할아버지가 주도해서 안목해수욕장에 물놀이를 두 번 이상 갔는데, 한 번은 괜찮지만 두 번째부터는 음식 준비하는 할머니가 무척 싫어했다는 얘기도 했다. 이 얘기는 저번에 들었던 얘기라 내가 맞장구를 잘 쳐주니까 아버지가 좋아했다. 아버지, 친구들이 텃세부린 얘기도 제가 기억할게요.

다른 친척들은 몰라도 강릉 작은 아버지랑 강릉 고모는 자주 연락하고 싶고 방문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마음처럼 잘 되진 않는다. 작은 아버지 쪽은 아무래도 작은 어머니가 부담스러워서 그렇고 고모쪽은 별 이유도 없는데, 그렇다. 집이 중앙시장근처고 고모 수선집이 중앙시장에 있으니까 가끔 방문해서 이런저런 얘기 좀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잘 안된다.

커피 다 마시고 다들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갔다. 암수술과 뇌수술, 벌초, 형제자매, 두 명의 할머니, 죽어 잊혀진 형제, 잠깐의 즐거움, 명절이라는 부담은 가족이라는 부담, 점점 멍해지는 아버지, 마음같이 되지 않는 일들.

친구 전화를 받고 술 마시러 가기 전에 쓴다.

아내가 엊그제 술 마셨는데 왜 또 술을 먹냐고 해서 삶이 괴로워서 그렇다고 했다. 진심이다. 아내는 그러면 몸도 안좋고 머리도 안좋고 그러면 안된다고 했다. 두 번 연속 거절했기에 세 번 연속 거절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것도 진심이다. 아내가 걱정하는 일이 사랑이다. 우울도 전염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얼마전에 적어뒀다. 하지만 우울이 전염되는 건 별로다. 내 우울은 기후 우울과 치매 우울과 무주택 우울이다. 세상에 흔한 우울이다. 가을이 왔고 내가 치매에 걸린건 아니고 집도 빚도 없으니 안심하자.

오랜만에 만난 고모가 인상적인 얘기를 했다. 내가 아버지한테 자꾸 아버지라고 하니까, 아버지란 말이 너무 듣기 좋다고 하면서 알려줬다. 본인 어릴때, 다른 애들은 다 밖에서 놀고 집에 돌아올 때, ‘엄마’ 부르면서 오는데, 본인만 ‘아버지’부르면서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고모는 기본적으로 정이 무척 많은 사람인데, 할머니도 좋아했지만 할아버지도 많이 좋아했던가 보다.

오늘은 아버지를 오랜만에 봐서 좋았고 강릉 삼촌이랑 이런저런 얘기한 게 좋았다.

아버지, 다음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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