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엔 삽당령에 눈이 20센티미터 이상 왔고 - 사무실 바로 앞에 기상청 관측 장비가 있고 사무실 모니터로 그 내용을 볼 수 있다. - 토요일엔 강릉 시내에도 눈이 왔다. 세차게 떨어지는 눈을 뚫고 점점 무거워지는 우산의 무게를 느끼면서 아내랑 강릉역에 도착했고 청량리역 근처도 하늘이 무거웠다. 아내는 기다리던 이승윤 단콘 보러 잠실에 가고 나는 아버지 만나러 신월동에 갔다. 아버지는 최근 두 달 사이에 이 두 개를 뽑고 틀니를 했다.

- 아버지, 치과에서 또 오래요?
- …..
- 아버지, 치과에서 틀니를 어떻게 하래요?
- …..
- 아버지,
- …..
- 잘 하고 있어요.
- 어, 그래.

데이케어센터에서 준 가정통신문(?)에 회신할 사항이 있어서 내용 작성했다. - 아버지, 월요일에 잊지 말고 갖다주세요. - 아버지가 약을 잘 드시고 있는지 남은 약을 확인했다. 약이 모자라거나 남지 않아서 안심했다. - 아버지, 잘 하고 있어요. - 혈압약은 4월초, 치매약은 6월 중순에 받으면 된다. 아버지 핸드폰에 온 문자랑 카톡을 확인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글자를 잊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문자나 카톡을 전혀 확인하지 못한다. 아버지 친구 엄마가 돌아가셨고 통장에 돈이 없어서 지난달 카드요금이 1,040원만 인출됐고, 이달에는 카드 누적사용이 130만원을 넘었다. 지난달에는 치매약값 때문에 이달에는 틀니 때문에 카드 사용량이 많다.

- 아버지, 돈 떨어지면 얘기하세요.
- 알았어.
라고 했지만 아버지 머릿속에 돈에 관한 것은 생활비를 아껴서 살아야한다는 것과 매달 공과금을 빼 먹지 말고 내야한다는 것 두 가지 뿐이다. 두 가지라도 유지하니까 다행이다. 나머지는 내가 챙기면 된다, 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이 착찹하다.

나이 먹는 건 무너지는 일이다. 정신이 무너지고 이가 무너지고, 그렇게 하나하나 무너지다가 마지막엔 사람이 통째로 무너진다.

아버지랑 같이 저녁 먹을까 하다가 왠지 내키질 않아서 그냥 잠실에 왔다. 몽촌토성역 앞에 버거킹이 있어서 오랜만에 와퍼를 먹었다. 서울이라 그런지 (씨팔) 송파구라 그런지 강릉에서 보다 맛있었다. 버거는 맛있는데, 아버지랑 같이 밥 안 먹은 거 후회했다. 아버지에 대한 마음에 눈 쌓이듯 후회가 쌓인다. 눈녹듯 녹을날이 있겠나? 4월초엔 꼭 순대국 아닌걸로 같이 먹어야겠다. 꼭.

일요일엔 이승윤 공연을 봤다. 잘 하더라.

스스로 정치적으로 극좌파라고 하면서 3년안에 내 집을 갖고 싶어서 부동산 학원에서 부동산을 배우고 있는 친구를 만났다. 먼저 우리집에 왔을 때, 얼마 안되는 돈을 어디에 투자해야 하나 포트폴리오 짜고 있던 게 기억났다. 봉쇄수녀원과 명리학과 투자 포트폴리오와 부동산 학원과 부모님과 함께 사는 21억 짜리 아파트와 대선에서 3번을 찍는 행위를 생각한다. 언젠간 네가 싫어하는 네 아버지가 네 집을 사줄 것이다.

인생이란 그런것이지, 란 말을 많이 하는데. 체념에 가깝다.

오늘은 3월 21일, 춘분, 사무실 뒤쪽 소각장에 고양이 공간을 마련했는데 주말 사이에 눈밭을 뚫고 고양이가 밥 먹으러 다녀가서 기분 좋았다. 눈이 많이 왔기에 가뭄이 약간은 해소된거 같아서 안심이다. 눈의 낭만보다는 해갈이란 현실이 중요한 40대 중반이다. 기후 파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많지만 오늘은 춘분이니까, 봄은 살아야 하니까, 오늘만큼은 부정을 나열하지 않기로 한다. - 이미 위에 해버렸나?

체념하더라도 살아야지.

-> 지난주 금요일 사무실 창고 위쪽, 딱 이 정도의 낭만만 있는 40대 중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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