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갑자기 술을 먹게 됐다. 술을 자주 먹고 대체로 즉흥적으로 먹기 때문에 갑자기란 말을 써놓고 지금 이 문장을 적으면서 웃는다. 나한테 술 잘 사주는 친한 형이랑 회사 관사에서 먹었다. 원래는 피자를 한 판 시켜 먹을 생각이었는데, 배달앱을 열어보니 JK형이 좋아해서 몇 번 같이 갔던 홍어집이 첫 페이지에 보이길래 홍어삼합을 주문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홍어 냄새가 나서 배달이 나보다 빨리 도착한 걸 알았다. 엘리베이터의 홍어 냄새와 양손에 두 병씩 든 소주 때문에 11층에 내린 아주머니 앞에서 약간 민망했다. 14층에 도착, JK형은 치킨을 한 마리 시켜놓고 날 기다렸는데, 갑자기 홍어가 와서 놀랐고 좋아하는 안주를 먹게 되서 좋아했다. 치킨은 튀긴 걸 좋아하는 내 안주 홍어는 형 안주. 배려하는 인간관계란 이런 것인가 생각하며 술을 마셨다.
나는 맛있게 먹고 약간 많이 먹는다 = 잘 먹는다. 그리고 먹는 일에 진심이다. 기왕 먹을 것 가성비 따지지 말고 비싸고 좋은 거 먹자, 는게 내 기조다. 작년부터 그렇다. 기후파괴로 세상이 끝장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비관(90%), 일확천금이 갑자기 생기지 않는한 내집 마련은 어렵다는 비관(10%)에서 나온 결론이다. JK형은 나랑 자주 먹기 때문에 이런 내 생각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세계 멸망에 대한 내 비관에 한결같이 세상이 그렇게 쉽게 망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홍어랑 치킨 조합을 - 사진 찍어둘 걸 - 앞에 두고 형과 대화했다.
- 형, 이렇게 좋은 거 먹는 것도 올해가 끝이란 생각이 들어요.
- 뭔 말이야. 내년에 세상이 망할거 같애?
- 아뇨. 그게 아니라 내년이면 기왕 먹는 거 좋은 거 먹자는 생각이 안 들것 같네요.
- 먹는 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눈앞에 있는 걸 먹어라.
말을 내뱉을 땐 내년부터 그럴것 같았는데, 말을 내뱉고 나니 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건지 기분을 실천에 옮기는 건진 헷갈린다. 집에서 대충 먹고 점심 도시락도 대충 먹기 때문에 술 마실 때나 외식할 때는 잘 먹어야지란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도 사그라드는 중이다.
애호박 가격이 폭락했다. 역대 3번째로 짧은 장마였다. 이건 우리나라 얘기다.
이란에는 마실물도 없다. 아프리카 최대 도시는 물에 잠기고 있다. 독일과 벨기에에는 역대급 비가 왔다. 중국의 어느 지역에는 1년치 비가 하루만에 내렸다. 터키, 시베리아, 캘리포니아에는 산불이 났고, 캐나다와 미국은 역대급으로 덥고 그래서 캘리포니아 농사는 망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나라들은 역대 최대기온을 매일 갱신중이다.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이건 다른 나라 얘기다.
아직까지는 기후 파괴를 심각하게 느끼지는 못하는 지역에 사는 것에 감사해야 할까. 올해는 세 번 바닷가에서 수영을 했다. - 지난 6년간 1번 함 – 멀리서 보면 잘 모르지만 바닷물에 들어가서 보면 바다에 떠다니는 쓰레기가 정말 많다. 바다는 거대한 쓰레기통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입을 벌리고 받아주진 않을 것이다. 이게 내 비관이다. 아이가 없다보니 세상이 좋아져야 한다는 생각도 없고 육아에 집중할 시간에 비관에 집중하고 있다. 아니, 아이가 있었다면 더 비관적이었을 수도 있다. 이게 또 내 비관이다.
국제곡물 가격이나 선물 시장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돈이 있으면 밀이나 옥수수 선물에 투자하고 싶다. 세상이 망햐가는 걸 이용해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미국내 농지를 자꾸 사들이고 있다는 빌게이츠랑 다르지 않다. 지난주에 k 선생님에게 사람 다 똑같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류전체가 다 한통속이다.
jk형이 어제 남은 홍어를 얼릴수도 버릴수도 없어서 아침으로 먹고 왔다고 해서 사무실에서 같이 웃었다.
하루하루가 즐겁지만 무겁다.
여름날 산길을 걷는다. 땡볕아래 힘들다가 나무 그늘이 았어서 잠깐 쉬는데 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면 살 것같다. 그늘에서 나가기 싫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목적지에 닿거나 되돌아가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봐주지 않는다.
희망에서 1미리미터만 벗어나도 비관이 있다.
8월 잣나무 채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