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좋게 읽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예감이란 것은 자신의 무의식을 반영하기 때문에 거의 틀리지 않는 법이다.)


 올해는 이 책을 읽었다. 아내의 죽음 이후의 생각에 대해서 쓴 에세이다.



p. 120 ~ 

 그렇게, 분노로 인한 문제가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게 분노를 느낀다. 인생을 포기하면서 그들을 저버리고 배신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비이성적인 생각이 또 있을까. 기꺼이 죽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자살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별의 아픔을 겪으며 신을 원망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비이성적인 생각이다. 어떤 사람은 우주를 원망하는데, 사별이 불가피하고 돌이킬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내가 느낀 감정은 딱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2008년 가을 내내 나는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무심한 마음으로 신문을 읽었고 티브이 스포츠 경기를 챙겨 보았다. '뉴스'라고 해봤자 어디까지나 버스를 꽉꽉 메운 예의 나태한 승객들, 자기밖에 모르는 그들의 유아론과 무지의 상태를 실어나르는 동력원을 더 확장하고 더 모욕적으로 강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선가 나는 오바마의 당선에 죽자고 신경을 쏟았지만, 다른 세상사에는 일절 관심을 끄다시피 했다. 금융체제가 붕괴되어 불타오를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었지만 나에겐 대수롭지 않았다. 돈이 아내를 살려낼 수 없었다면, 돈의 효용가치가 도대체 무엇이며, 또 닥친 화를 면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가? 기후 문제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고들 했지만, 내 관심사의 범위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차를 운전해 병원에서 집까지 다녔는데, 철도교가 나타나기 직전의 어느 길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나는 소리 내어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하고 했다. 

 "이건 그냥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바로 '이것', 이토록 거대하고 강렬한 '이것'이 '모든 것'의 이유일 뿐이었다. 그 말엔 어떤 위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 말은 가짜 위안에 저항하는 대안이었는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가 다만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면 우주 자신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을 터이니, 우주 따윈 될 대로 되라지. 세상이 그녀를 구할 수도 없고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면, 도대체 내가 뭣 때문에 세상을 살리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이 부분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어떻게 살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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