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황정은

2010. 11. 8. 19:56
짧지만 그만큼 군더더기 없는 작품이다. 정말 오랜만에 국내 작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평론가 신형철의 한 문장 정리가 매우 적절하다.

이 소설은 사려 깊은 상징들과 잊을 수 없는 문장들이 만들어 낸, 일곱 개의 절(節)로 된 장시(長詩)다.

무재 씨, 춥네요.
가만히 서 있어서 그래요.
죽겠다.
죽겠다니요.
그냥 죽겠다고요.
입버릇인가요.
죽을 것 같으니까요.
무재 씨가 소매로 풀 즙을 닦아 내고 똑바로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죽을까요?
여기서, 라고 너무도 고요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겁을 먹었다. 새삼스럽게 무재 씨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엔 좀 헝클어진 듯 부풀어 있던 머리털이 빗물에 젖어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죽겠다고 말하지는 마요.
네.
그러면 계속 걷죠, 라면서 앞서 걷는 무재 씨를 따라서 걸었다. 눈물이 솟았다. 무재 씨처럼 매정한 사람은 먼저 가도록 내버려 두고 나는 나대로 움직이고 싶었지만 이 숲에서, 그림자마저 일어난 처지에 그럴 수도 없었서 눈을 닦으며 걸었다.
울어요?
울지 않는데요.
이런 대화를 나누며 걷는 동안 공기가 문득 가벼워졌다. 무재 씨가 멈춰 서서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비가 멈췄네요.
네.
껌 씹을래요?
네.                                        -12page-

나는 이런식의 대화가 좋다. 사람들은 멋들어지고 긴 말들보다는 짧은 얘기들을 나누게 마련이다. 그것이 연인이라고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 사람들의 대화는 보통은 이렇다고 생각한다.

'씨'는 의존명사라 띄어써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어제 나한테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작가의 필치를 따라서 써보면 이렇다.


아무래도 이 작가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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