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쳤다
할아버지 약사가 약국 문을 열 때, 나는 그곳을 지나쳤다
읍내 사거리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친구를
길바닥에에서 봉지에 담긴 귤을 파는 할머니를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빠와 딸을
시장 한 복판에서 하체가 없는 걸인을
나는 그냥 지나쳤다
한 밤 중에 발톱을 자르는 아버지를
술 취해 비틀거리는 어머니를
나 때문에 울고 있는 당신을
몸살로 출근도 못하고 끙끙대는 나조차도
나는 그냥 지나쳤다
사고로 멈춰선 앞차를
타버린 나무와 긴 겨울비를
어딘가에서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뉴스를 지나쳤다
모든 길을
모든 사람을
모든 순간을
나는 지나쳤다
케냐 커피에선 케냐 맛이
두 잔 째의 커피에선 두 잔 째의 맛이 나고
나는 지나치듯 커피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