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를 벴다. 2400평 베는데 세 시간 정도 걸렸다. 작년에도 그랬는데 벼 베는데 감흥이 없다. 이를테면 한 해 동안 열심히 하고 열심히 자라준 보답을 받는다는 기분 같은 것이 없단 얘기다. 농업을 직업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인가? 고구마 꽃이 피어도 그런가보다, 벼베기를 해도 그런가보다 한다. 오늘 죽든 10년 후에 죽든 큰 차이가 없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우리집에서 저녁을 했다. 작목반 형들이랑 아저씨들 말고도 동네 형들이 몇 분 더 오셨다. 아내가 고생했다. - 고생했어요. 올해의 모든 미션은 토털리 컴플리트. - 즐거운 자리였다. 노래를 하래서 노래를 했다. 내 기타에 맞춰서도 하고 아내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도 했다. 밥 먹다가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 사람들이 시골에는 없다.고 하는 문화 생활이다. 사실 나는 영화도 잘 안 보고 티비 없이도 잘 지낸다. 게임과 책과 기타면 충분히 문화 생활이 된다. 나는 그렇지만 동네분들은 그렇지가 않다. 내 노래를 듣고 무척 좋아하신 몇몇 형들을 보면서, 쌀값은 쭉쭉 떨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니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술 마시는 거 말고 다른 즐거운 일이 있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벼는 수매하기로 했으니 이제 들깨 털고 거구마 캐서 팔면 올해 농사가 끝난다. 남들은 12월에 끝나는 한 해가 10월 말이면 끝나는 걸 보면 농부란 건 참 좋은 직업이다. 개인적으론 남들보다 덜 벌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벼베기를 마친 기념으로 쌀 개방에 대한 나의 악마적인 생각을 적어본다.

쌀개방은 이미 다가온 현실이다. 땅만 가지고 있는 상태로 농사일의 거의 90%를 영농대행으로 벼농사 짓는 노인들은 쌀개방과 함께 지금까지의 농사 방법이 의미를 잃게 된다. 이것 저것 대금 주고 가을에 내 쌀이다.라고 하며 벼농사 짓는것 보다 도지쌀 받아 먹는 것이 더 이익인 싱황이 되는 것이다. 그네들이 내놓은 땅을 하나하나 확보해서 도지 주고 농사 짓는 평수를 몇 만평 씩 늘린 대농들은 결국 기곗대 때문에 현상 유지가 고작일 것이다. 이 대농들도 점점 나이를 먹고 벼농사에서 손을 떼겠지. 그런 중에 나는 벼농사를 시작할거다. 내 손으로 완벽하게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5천평 정도가 좋겠다. - 물론 벼농사는 하늘이 짓는다. - 토종벼를 심어서 적절한 값에 직거래를 하고 기계는 기술센터에서 빌려 쓰기로 한다. 그렇게 몇해가 지나고 수입 쌀값이 무척 많이 오른다. - 지금도 미국쌀이 그렇게 싸진 않고 초대형 자연재해의 빈도는 점점 높아지는 추세다. - 돈은 그때 벌어야겠다. 물로 계속 내 쌀을 사 먹던 사람들에게는 계속 비슷한 값으로 쌀을 팔 것이다.

봉화의 어느 정미소에서 80킬로 한 가마에 155000원 줬다는 글을 읽었다. 정미소에선 거기에 삼만원 정도 더 얹어서 팔겠지. 어느 정미소에소는 수입쌀도 섞어서 팔겠지. 80킬로면 도시의 맞벌이 부부가 일년 먹고도 남는다. 쌀 값이 상식을 벗어났다. 농업을 버린 이 나라도 너무도 싼 쌀 가격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국민들도 언젠가 후회할 거다. 그리고 그 후회의 순간까지 나는 묵묵히 벼농사를 지을 거다.

나의 다짐이 되버렸네.

우리나라 젊은 소농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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