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 황정은

2021. 12. 25.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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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영이 창을 열었을 때 풍령에 달린 실이 끊어졌다. 라는 문장을 쓰고 좋아서 며칠 온화한 기분으로 살았다.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을 잘 마무리해 마감하고 싶다.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는 단편이 될 것이다. 1년 전에 쓰겠다고 약속을 해두고 쓸 수 있을까, 망설이며 시간을 보내다가 쓸 수 없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 쓰고 있다. 웃는 얼굴로 이 소설을 마무리하고 싶고 그런 장면으로 소설을 마무리할 생각에 행복하다.
사랑이 천성이라고 내가 말한 적 있던가?

133면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 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111면
소설을 쓰는 나는 이 모든 사건들 속에서 그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를 궁금하게 여기고 그들 각자의 노동 조건이나 그가 속한 공동체의 이민사나 가족사, 그날을 전후로 그가 본 것 들은 것 읽은 것 등등을 생각해볼 테지만 이 글을 쓰는 나는 소설을 쓰는 내가 아니니까 이유가 궁금하지 않다. 이유를 생각하는 것으로 이유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 그저 게으름을 생각할 뿐이다. 혐오라는 태도를 선택한 온갖 형태의 게으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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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라는 필터 없이 태양광에 노출된 스타맨의 헬멧이며 로드스터의 핸들이 태양광을 받아 매우 반짝일 때마다 나는 어째선지 인간 종의 수명-필멸성mortality을 생각한다. 할 일이 너무 많아 5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며 산다는 그 차의 차주-일론 머스크도 그걸 자주 생각할 거라고 생각하고는 한다. 심심해서 미국 대통령을 해본 것 같은 도널드 트럼프도 은근히 그걸 자주 생각할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 2021년 올해의 책, 올해는 독서량이 많지 않았고, 황정은은 여전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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