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병 - 박준

2013. 3. 25. 20:26

     꾀병                           - 박준 -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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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날개'같다. 신문 기사에서 우연히 읽었다. 많이 좋았다. 83년생인 시인이 부러웠다. 아내가 말했다. 83년 생도 그렇게 어린게 아냐. 서른 넘었을 걸? 내가 말했다. 맞다 우리가 늙었구나. 지후 무릎에 누워서 당신 얼굴에 들어오는 볕을 만지면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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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 김수영

2011. 11. 27. 20:16
 눈     - 김수영 -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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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주부터 2주간 과수 실습이다. 사과나무에 매달려서 '적과'(摘果)를 했다. -열매를 솎았다.-
 일본에서 만든 것 같은 한자어로 된 농업 용어들이 너무도 많다. 어제만 해도 왜화(矮化), 기지현상(忌地現象) 같은 용어들을 배웠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아직 어린 열매들을 거침없이 잘라냈다. 작업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하는 것이 좋다. 위에서 보면 아래서 보지 못했던 열매들이 보인다. 가끔은 간혹 남아 있는 사과꽃도 눈에 띈다. 예쁘다.고 잠깐 생각하고는 이내 무심하게 제거한다.

 사과나무에 대한 이론들은 저녁마다 꼼꼼하게 정리했다. 잊고 있었던 공부라는 것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는 것 같다. 

 수요일에는 데이트를 했다. 잊고 있었던 감각이 살아나는 듯 했다. 
 오른손 끝에서 시작해서 머리를 거쳐 왼손 끝으로, 감각들이 흘러내렸다.
 
 
 내일은 드디어 모내기다.

 술은 적당히 먹자.

 
 그 꽃 - 고은 -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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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 - 김수영

2011. 4. 16. 00:52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훨씬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소인이 돼간다
 속돼간다 속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19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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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설 연휴에 3100만명이 귀성길에 오른다고 한다. 해외로 놀러가는 사람들은 58만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인구가 5000만명이니까 어림잡아 60%의 사람들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이동하는 것이다. 귀성길에 오른 3100만명의 사람들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은 숫자일거다. 여기까지 생각했다가 몇 해 전에 봤던 광경이 떠올랐다.

 명절 연휴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화장실에 간 애인을 기다리는 공원 매점 앞, 파라솔 아래에 두 사람이 컵라면을 먹고 있다. 엄마로 보이는 중년 여인은 국물이 있는 것을 마주 앉은 어린이는 짜장(자장)을 앞에 두고 있다. 테이블에는 김밥도 두 줄 놓여있고, 여자는 이미 한 캔의 맥주를 비우고 두 캔째를 시작했다. 아들로 보이는 어린이는 한 올 한 올 면발을 집어 먹는데, 여자는 보란듯이 김밥을 라면 국물에 찍어서 아귀아귀 씹어 먹고는 맥주를 들이킨다. 두 사람은 한 마디 말도 섞지 않는다.

 담배 한 대가 타들어 가는 동안 특별할지도 모를 그들의 사연을 생각하다가 애인과 함께 그들을 뒤로했더랬다.

 설 쇠러 서울에 올라왔다. 엄마 얼굴을 보니까 참 좋다. 

 
 백석의 시가 떠올랐다.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이    -백석-

오늘은 정월 보름이다
대보름 명절인데
나는 멀리 고향을 나서 남의 나라 쓸쓸한 객고에 있는 신세로다
옛날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먼 타관에 나서 이 날을 맞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고향의 내 집에 있는다면
새 옷을 입고 새 신도 신고 떡과 고기로 억병 먹고
일가친척들과 서로 모여 즐거이 웃음으로 지날 것이였만
나는 오늘 때 묻은 입든 옷에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혼자 외로이 앉어 이것저것 쓸쓸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옛날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 이렇게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외로히 쓸쓸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어느 먼 외진 거리에 한 고향 사람의 조고마한 가업집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 집에 가서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도 한 그릇 사먹으리라 한다
우리네 조상들이 먼먼 옛날로부터 대대로 이날엔 으례히 그러하며 오듯이
먼 타관에 난 그 두보(杜甫)나 이백(李白)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 날은 그 어느 한 고향 사람의 주막이나 반관(飯館)을 찾어가서
그 조상들이 대대로 하던 본대로 원소(元宵)라는 떡을 입에 대며
스스로 마음을 느꾸어 위안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러면서 이 마음이 맑은 옛 시인들은
먼 훗날 그들의 먼 훗자손들도
그들의 본을 따서 이 날에는 원소를 먹을 것을
외로히 타관에 나서도 이 원소를 먹을 것을 생각하며
그들이 아득하니 슬펏을 듯이
나도 떡국을 놓고 아득하니 슬플 것이로다
아, 이 정월(正月) 대보름 명절인데
거리에는 오독독이 탕탕 터지고 호궁(胡弓)소리 뺄뺼 높아서
내 쓸쓸한 마음엔 자꾸 이 나라의 옛 시인들이 그들의 쓸쓸한 마음들이 생각난다
내 쓸쓸한 마음은 아마 두보(杜甫)나 이백(李白) 같은 사람들의 마음인지도 모를 것이다
아무려나 이것은 옛투의 쓸쓸한 마음이다



AND

  On the seashore of endless worlds children meet.
 
The infinite sky is motionless overhead and the restless water is boisterous. On the seashore of endless worlds the children meet with shouts and dances.
 
They build their houses with sand, and they play with empty shells. With withered leaves they weave their boats and smilingly float them on the vast deep. Children have their play on the seashore of worlds.
 
They know not how to swim, they know not how to cast nets. Pearl-fishers dive for pearls, merchants sail in their ships, while children gather pebbles and scatter them again. They seek not for hidden treasures, they know not how to cast nets.
 
The sea surges up with laughter, and pale gleams the smile of the sea-beach. Death-dealing waves sing meaningless ballads to the children, even like a mother while rocking her baby's cradle. The sea plays with children, and pale gleams the smile of the sea-beach.
 
On the seashore of endless worlds children meet. Tempest roams in the pathless sky, ships are wrecked in the trackless water, death is abroad and children play. On the seashore of endless worlds is the great meeting of children.


 타고르의 시들 중에 유독 이 작품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 예전에는 민음사 버전을 읽었었는데, 새로 산 열린책들 버전의 번역은 영 느낌이 살지 않는다. 여튼 멋진시다. 'On the seashore at the end of the world'로 시작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강릉에 와서 아직 바다엘 못 갔다. 크리스마스 전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어느 바다에 가야 saeshore of endless worlds의 느낌이 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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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연/이병률

2010. 3. 9. 10:23

절연   - 이병률 -

어딘가를 향하는 내 눈을 믿지 마오
흘기는 눈이더라도 마음 아파 마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므로 뒤를 볼 수도 없으니
당신도 전생엔 그러하였으므로
내 눈은 폭포만 보나니

믿고 의지하는 것이 소리이긴 하나
손끝으로 글자를 알기는 하나
점이어서 비참하다는 것
묶지 않은 채로 꿰맨 것이 마음이려니
잘못 얼어 밉게 녹는 것이 마음이려니

눈 감아도 보이고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이는 것은
한 번 보았기 때문
심장에 담았기 때문
눈에 서리가 내려도 시리지 않으며
송곳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것은
볼 걸 다 보아 눈을 어디다 묻었다는 것

지독히 전생을 사랑한 이들이
다음 생에 앞을 못 본다 믿으니
그렇게라도 영혼을 씻어야 다음 생은 괜찮아진다 믿나니

많이 오해함으로써 아름다우니

딱하다 안타깝다 마오
한 식경쯤이라도 눈을 뜨고 봐야 삶은 그저 진할 뿐
그저 나는 나대로 살 터 당신은 당신대로 잘살기를
내 눈이 허락하는 반경 내에서 연(緣)은 단지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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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편/천양희

2010. 1. 4. 11:55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굉장히 좋아하는 시인데, 포스팅을 안했길래 올린다.
나이 먹을 수록 기억을 바탕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 같다.
유덕화는 여전히 젊어 보이지만 '열혈남아'는 20년도 넘은 영화가 되버렸다.
나는 적어도 20년을 넘게 살았다.
생이 직선으로 간다는 건 어떤건지 생각해 본다.
너무 뒤만 보지는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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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초즙 - 정양

2009. 6. 2. 18:03
초여름 산길에서 풀 뜯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내 또래쯤 되는 것 같다
백초즙(百草汁)을 담그려고 풀을 뜯는다고 한다

콩알 백 개 헤아려 품에 넣고
풀 한 무더기 뜯을 때마다 쉼표처럼
콩알 하나씩 그 자리에 놓으면서
품안에 콩알 다 없어질 때까지
아무 풀이나 보이는 대로 뜯는다는데

풀 한 가지에 한 소쿠리식 백 소쿠리를
항아리에 삭혀 우려낸 그 백초즙이
묵은 해소도 가슴애피도 소갈증도
몰매 맞은 삭신도 다 풀려버리는
명약 중의 명약이라는데
이렇게 아무 풀이나 뜯다가
독초라도 섞이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못난 사람 못된 사람 다 소용 닿듯이
맛만 보아도 대번에 숨이 넘어가는
소문난 독초들이 섞여야 더 약이 된다며
나를 돌아보며 확인하듯 할머니는
두어 번이나 고개를 끄덕인다

못난 풀 못된 풀 모진 풀
짓밟아도 뜯어내도 다시 돋는
모질고 모진 꿈들아

할어미의 풀짐을 메고 화끈거리며
할머니의 굽은 등을 따라간다
못난 풀 못된 풀 다 소용에 닿는,
아무 풀이든 한 데 섞이어
명약이 되는 그 이치가 풀짐보다 더 무겁다


서울에 잠깐 올라와서 '변산에서' 태그를 쓰자니 좀 거시기하다.
정양 시인 고향이 김제여서 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를 읽다보면 변산쪽이랑 왠지 통하는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공동체에서는 희정이 형이 매일 4시 30분에 일어나서 특별한 일이 없는한 온종일 백초효소를 담그기 위해서 풀을 뜯는다.
오늘 엄마한테 잠깐 다녀왔는데, 피부가 좋아졌다고 했다. 나는 아마 먹는 것이 좋아서 그런것 같다고 했다.
백초즙은 아니지만 그 내용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백초효소를 거의 매일 마셔서 그런것 같다.
시의 마지막 연은 크게 와 닿지는 않는데, 백초즙을 만드는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어서 시집을 변산에 두고 두고두고 읽고 있는 시 중에 한 편이다.  

포스팅을 하면서 다시 읽으니 못난 사람 못된 사람이 다 소용 닿는 곳이 내가 생각하는 마을 공동체의 모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못된 사람은 싫고 못난 사람으로 소용이 닿고 싶다. 일테면 경운기 운전도 서투르고 밭일도 남들보다 잘 못 하더라도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할 때나 단순히 힘쓰는 일이 있을 때, 내가 공동체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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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통영(統營) 2

2008. 12. 14. 20:13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가깝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동백(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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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 노향림

2008. 10. 9. 00:10

    소리     - 노향림 -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 남자친구는 트럼페터입니다.

 조금씩 폐허가 된 生活이 놓여 있지만
 그쪽 벌판을 잘 보지 않습니다.

 저 溫氣를 서로 부비는 풀잎들에게서
 이 마음 끝까지 뻗은 길을 소리들이 가고 있습니다.

 삭은 內衣를 걸친채 그는
 트럼펫 부는 일이 全部였습니다.

 누구든지 꿈을 선택하고
 꿈으로만 자신을 꾸미는 일.
 숲속의 나무들이 그런 일 속에 잔뜩 묻혀 있습니다.

 그가 부는 트럼펫 소리는 하늘에서
 먼저 가 있던 소리를 만나 어깨를
 감싸고 같이 걷습니다.

 북만드는 나무라도 일찍 찍으러 간
 모양입니다.
 내 남자친구는.

성미정 시로 기억하고 있었다니, 나이 먹는게 서럽다.
기억력 감퇴에는 토비콤이라는 약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타를 치는 남자친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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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 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네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 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증 가장 깊은 곳에 내려 앉은 물 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타고 흐르는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뭇 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 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하며
  스물 두살 앞에 쌓인 술병 먼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게를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어제 잠깐 짬을 내서 네이버의 공선옥 누나 블로그에 들렀다. 오랫동안 새 포스팅이 없다.
뭐 원래도 뜸하게 업데이트 된다. 예전에 좋게 본 장정일의 시를 복사해 왔다.
장정일은 '충남 당진 여자'라는 시를 썼는데, 장정일을 모르는 건영군은 당진에서 일하게 되었고, 내가 알고 있는 충남 당진에서 난 여자는 방송 작가일을 하고 있다. 시를 읽으면서 사철나무를 머릿속에 그려보지만 잘 그려지지 않는다. 이 시의 포인트는 '사철나무 그늘'이 아니라 '살다가 지친 사람들'에 있어서 그런것 같다. 그렇지만 바빌론 강가에 앉아서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려보면 눈물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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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향 - 정진규

2008. 4. 16. 10:53

자정향/정진규

모든 사물들을 실물크기로 그리고 싶다
내 사랑은 언제나 그게 아니 된다
실물크기로 그리고 싶다  
사랑하는 자정향(紫丁香) 한 그루를 한 번도 실물크기로 그려낸 적이 없다
늘 넘치거나 모자라는것이 내 솜씨다
오늘도 너를 실물크기로 해질녘까지 그렸다  
어제는 넘쳤고 오늘은 모자랐다
그게 바로 실물이라고 실물들이 실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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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 - 물통, 휴가

2008. 3. 7. 00:08

  물통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 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
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휴가

 바닷가에서 낚싯줄을 던지고 앉았다
 잘 잡히지 않았다

 날갯죽지가 두껍고 윤기 때문에 반짝이는 물새 두 마
리가 날아와 앉았다
 대기하고 있었다
 살금살금 포복하였다

 .....
 ....
 ...

 살아갈 앞날을 탓하면서
 한잔해야겠다

 겨냥하는 동안 자식들은 앉았던 자릴 급속도로 여러
번 뜨곤 했다
 접근하느라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미친놈과 같이 중얼거렸다

 자식들도 평소의 나만큼 빠르고 바쁘다
 숨죽인 하늘이 동그랗다
 한 놈은 뺑소니 치고
 한 놈은 여름 속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사람의 손발과 같이 모가지와 같이 너펄거리는 나무가
있는 바닷가에서

 

민음에서 나온 '북치는 소년'
정말 좋아하는 시집인데, 나를 떠날때가 된 것 같다. '물통'같은 시가 시집의 첫 시면 당연히도 멈출수가 없다.
게다가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휴가'를 만나서 굉장히 기뻤다.
역시나 나는 바닷가와 인간, 사람.... 뭐 이런것들에 유독 끌린다.

AND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백석-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도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다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新刊書)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世上事)' 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란'이라는 처녀가 그 처녀를 소개해 준 친구에게 시집을 간 일화가 있다고 한다. 백석 시집을 가끔 읽으면 기분이 좋다. 울지는 못하겠고 슬프기는 한데.... 그래서 머릿속의 슬픈 생각들이 자신을 울게 할 것을 생각만하는 마음...
나는 이런 마음이 좋다. 이런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는 백석도 좋다. 흰 바람벽에 글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시로 써 준 백석!

 2007년 2월 24일의 노트에서~~
AND

한밤중에 -진은영-

2007. 8. 24. 23:00

 고양이는 지붕의 알리바이다
 지나가는 고양이를 움켜쥐고 지붕의 붉은 울음이 솟아났다
 벨벳의 검은 꼬리가
 지붕의 등을 오래오래 어루만졌다
 죽은 장미를 버렸다 항아리의 고인 물을 따라
 붉게 떨리던 시간의 한때가 하수구 속으로 흘러갔다
 장미는 항아리의 알리바이다
 크고 검은 장화속에서 흰 발이 걸어나왔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한밤중에
 빈 항아리를 힘껏 껴안았다
 내가 부서졌다






-> 붉은 지붕! 붉은 장미 검은 하수구 흰 발






AND

어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앞을 지나다가 내가 한 이야기다.

이모도 그렇다고 했다. 학교 다닐 때 벌판이었던 그 동네가 지금은 온통 아파트다.

뭐 내가 사는 동네도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온통 벌판이었더랬다. 코스모스 벌판

그런데 지금은 코스모스는 한 송이도 찾아볼 수 없다.


   역전 이발/문태준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 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 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빛이 살고 있고
 말라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느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옛날 국수 가게/정진규

햇볓 좋은 가을날 한 곡목길에서 옛날 국수 가게를 만
났다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널듯 국숫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
이라고 했다 백합꽃 꽃밭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
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AND

20050810

2007. 8. 24. 22:32

 입추가 지나자마자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분다. 아직 말복은 안지났을텐데...ㅋㅋ


   우리들의 양식                 -이성부-


모두 서둘고, 침략처럼 활발한 저녁
내 손은 외국산 베니어를 만지면서
귀가하는 길목의 허름한 자유와
뿌리 깊은 거리와 식사와
거기 모인 구릿빛 건강의 힘을 쌓아둔다.
톱날에 잘리는 베니어의 섬세,
쾌락의 깊이보다 더 깊게
파고들어 가는 노을녘의 기교들.
잘 한다 잘 한다고 누가 말했어.
빛나는 구두의 위대를 남기면서
늠름히 돌아보는 젊은 아저씨.
역사적인 집이야, 조심히 일하도록.
흥, 나는 도무지 엉터리 손발이고
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
해머 소리, 자갈을 나르는 아낙네가 십여 명,
몇 사람의 남자는 철근을 정돈한다.
순박하고 땀에 물든 사람들
힘을 사랑하고, 배운 일을 경멸하는 사람들,
저녁상과 젊은 아내가 당신들을 기다린다.
일찍 돌아간다고 당신들은 뱉어내며
그러나 어딘가 거쳐서 헤어지는
그 허술한 공복
어쩌면 번쩍이는 누우런 연애.
거기엔 입, 입들이 살아 있고 천재가 살아 있다.
아직은 숙달되지 못한 노오란 나의 음주,
친구에게는 단호하게 지껄이며
나도 또한 제왕처럼 돌아갈 것이다.
늦도록 잠을 잃고 기다리던 내 아내
문밖에 나와 서 있는 사람
비틀거리며 내 방에 이르면
구석 어딘가에 저녁이 죽어 있다.
아아, 내 톱날에 잘리는 외국산 나무들.
외롭게 잘려서, 얼굴을 내놓는 김치, 깍두기,
차고 미끄러운, 된장국 시간.
베니어는 잘려 나가고
무거운 내 머리, 어제 읽은 페이지가 잘려 나간다.
허리 부러진 흙의 이야기
활자들도 하나씩 기어서 달아나는
뒹구는 낱말, 그 밥알들을 나는 먹겠지.
상을 물리고 건방진 책을 읽기 위하여
나는 잠시 아내를 멀리하면
바람이 차네요. 그만 주무셔요.
퍽 언짢은 자색 이불 속에 누워
아내는 몇 차례 몸을 뒤채지만
젊은 아내여 내가 들고 오는 도시락의 무게를
구멍 난 내 바짓가랑이의 시대를
그러나 나는 읽고 있다.
모두 서둘고, 침략처럼 활발한 저녁
철근공, 십여 명 아낙네, 스스로의 해방으로 사라진 뒤,
빈 공사장에서 녹슨 서풍이 불어올 때
나도 일어서서 가야 한다면
계절은 몰래 와서 잠자고, 미움의 짙은 때가 쌓이고
돌아볼 아무런 역사마저 사라진다.
목에 흰 수건을 두른 저 거리의 일꾼들
담배를 피워물고 뿔뿔이 헤어지는
저 떨리는 민주의 일부, 시민의 일부.
우리들은 모두 저렇게 어디론가 떨어져 간다.
AND

야채사 - 김경미

2007. 8. 24. 22:26

 야채사(野菜史) /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하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어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


오랜만에 김경미 시인 어딘가에 댓글을 달았던 마지막 연... 좋다!

무덤들마다 감자꽃 수북한 그림이 떠오른다.

way가 꼭 읽고 뭔가 느꼈으면 해서 올렸던 시였는데~~

AND

 

라펭 아질에서 / 박정대 

당신 이번 여름에 텅 빈 파리로 와요 몽마르트에 있는 라펭 아질로 와요 지나간 샹송들을 들을 수 있는 라펭 아질로 와요 원래는 카바레 드 자사생으로 불리던 곳 암살자의 주점에서 나 당신을 기다려요 당신 이번 여름에 카바레 드 자사생으로 와요 와서 삶의 두통들을 모두 암살해 버려요 당신의 멋진 덧니로 그것들을 다 암살해 버려요 그리고 밤새 우리 죽도록 사랑을 나눠요 사랑한다는 건 함께 고요히 죽어간다는 거 아마 밤새도록 나는 당신을 죽일 거예요 내 거친 수염으로 당신을 암살할 거예요 웃지 말아요, 당신 추억이 고통스럽다면 추억을 암살하러 와요 당신은 나를 죽이고 나는 당신을 암살하겠지요 아무도 모르게 우리 암살자의 주점에서 만나요 당신은 사랑의 맹독으로 나를 암살해 줘요 나는 밤새도록 당신을 만지고 그러면 당신도 밤새도록 나를 만지겠지요 그리고 우리 그냥 서로에게 암살당해요 우리가 그렇게 죽는다면 그건 암살자의 주점 탓이지요 라펭 아질이든, 카바레 드 자사생이든 당신을 만나서 당신을 암살하고 싶어요 그리고 죽은 당신의 귀에 대고 오래도록 달콤하게 사랑한다고 속삭일래요 암살자의 주점으로 어서와요, 당신 암살자의 주점에서 나 당신을 기다려요 당신 내 취향이에요, 어서와요, 당신 이미 죽은 당신, 내가 죽인 당신 다시 죽이고 싶은 그리운 당신


어쩌다보니 박정대의 시집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하나씩 풀어줘야지~~

AND

겹 - 이별률-

2007. 8. 24. 22:17
겹   -이병률-

 나에겐 쉰이 넘은 형이 하나 있다
 그가 사촌인지 육촌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모른다

 태백 어디쯤에서, 봉화 어디쯤에서 돌아갈 차비가 없다며
 돈을 부치라고 하면 나에게 돌아오지도 않을 형에게
 삼만원도 부치고 오만원도 부친다

 돌아와서도 나에게 전화 한통 하지 않는 형에게
 또 아주 먼 곳에서 돈이 떨어졌다며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는 그가 관계인지 높이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잘 모른다

 단지 그가 더 멀리 먼 곳으로 갔으면 하고 바랄 뿐
 그래서 오만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십만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며
 거의 갈라진 말소리에 대답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어느 먼 바닷가에서 행려병자 되어 있다고
 누군가 연락해왔을 땐 그의 낡은 지갑 속에
 내 전화번호 적힌 오래된 종이가 있더라는 것
 종이 뒤에는 내게서 받은 돈과 날짜 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더라는 것

 어수룩하게 그를 데리러 가는 나는 도착하지도 않아
 그에게 종아리이거나 두툼한 옷이거나
 그도 아니면 겹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할 뿐
 어디 더 더 먼 곳에서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했으면 하고
 자꾸 바라보고 또 바랄 뿐


고구미와 내 관계가 이렇게 되면 어떨까? 누가 누구의 겹이 될까? 최근에는 절연이란 시를
읽었는데 정말 좋았다!

AND

20070308 눈과 기형도

2007. 8. 24. 22:12
국립의료원에 가는데 눈이 왔다. 어제 못 잤지만 그렇게 많이 피곤하진 않았다.
way의 여행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다. 예방 접종이 꽤 오래걸려서 밖에 나와서 담배를 피우는데 눈이 많이 왔다. 갑자기 기형도가 생각났다. 아니 이 시가 생각났다.

   

             진눈깨비      /    기형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던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 길 위로 사각의 서류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개비, 놀라 넋도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지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개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소리내서 읽으면 더 좋은 시인 것 같다. 조동진의 '진눈깨비'라도 들을까....

추가로 이 글에 내가 달았던 댓글 - 국립의료원에서 나오는데 way가 지치고 피곤하냐고 했는데, 나는 모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았던 게 아니라 눈물이 나는 것을 참았다. 울컥

AND

만화방창 -김용택-

2007. 8. 24. 22:07
김용택 / 만화방창
 
 
 
내 안
 
어느 곳에
 
그토록 뜨겁고 찬란한 불덩이가 숨어 있었던가요
 
한 생을 피우지 못하고 캄캄하던 내 꽃봉오리,
 
꽃잎 한 장까지 화알짝 피워졌답니다
 
 
 
그대
앞에서
 
 

 

 
습자지 같은 사랑이...더라도...
 
萬化方暢을 영어로 하면 burst open 쯤 된다.
 
피어 오르는 건 뭐든 아름답다.
AND

 way 바래주러 나갔다. 집 앞에서 공항버스 타려다가 차가 많이 밀리길래 공항지하철도(?)를 이용했다. 공항버스 보다 50 퍼센트 이상 저렴하다. 인천국제공항이 처음 생긱고 얼마 안 되었을 때, 그곳의 상가들도 아직 다 입주하지 않았을 때, 그곳에 가서 참 이질적이라고 느꼈다. 지나치게 도시적인 모습... 왠지 공기가 잘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지하에 넓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코엑스 몰'도 조금 비슷한 느낌이고, 현대 백화점과 CBS, 하이페리온이 쭉 늘어서 있는 목동 도서관 뒷길도...... 아주 예전의 도떼기 시장 같이 않고 잠잠했던 백화점도....... 늘 어색했다.

 공항 건물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조용한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했다.

언덕위에 바다가 보이고 언덕 아래까지는 구불구불한 좁은 흙길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오늘 오랜만에 다시 그 생각을... 그리고 이 시...


           산머루 / 고형렬

 

 강원도 부론면 어디쯤 멀리 가서

 서울의 미운 사람들이 그리워졌으면.

 옛날 서울을 처음 올 때처럼

 보고 싶었던 사람들, 그 이름들

 어느새 이렇게 미워지고 늙었다.

 다시 전부 어디쯤 멀리 떨어져 살아

 미워진 사람들 다시 보고 싶게

 시기와 욕심조차 아름다워졌으면.

 가뭄 끝에 펑펑 쏟아지는 눈처럼

 서울 어느 밤의 특설령처럼

 못 견디게 그리운 사랑이 되었으면.

 그러나 우린 모두 사라질 것이다. 

AND

반성 39 - 김영승-

2007. 8. 24. 22:01
     반성 39 / 김영승

 오랜만에 아내를 만나 함께 자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왔다.

 
아내는 갈비탕을 먹자고 했고

 그래서 우리는 갈비탕을 한 그릇씩 먹었다.

 버스 안에서 아내는 아아 배불러

 그렇게 중얼거렸다.

 너는 두 그릇 먹어서 그렇지

 그러자 아내는 나를 막 때리면서 웃었다.

 하얗게 눈을 흘기며 킥킥 웃었다.

 한 친구가 어느 드라마의 불륜 커플이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안타까운 이별을 하면서 여관을 나와서 순대국을 먹고 말 없이 헤어지는 장면이 인상적이 었다고 했다. 그 친구와 그의 여자친구는 약간은 그럴것도 같은 분위기였다. 김영승 시인은 아내와 여관을 나와 갈비탕을 먹었다. 섹스 후에는 걸죽한 게 좋긴 하지.... way는 뼈해장국을 좋아한다. 나는 아무거나 다 좋아하고... 내 습자지 같은 사랑이 그리 걸죽하지도 않았고 당신의 받아들임도 끈끈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걸죽했다.
 모든 것이 변한다면 더 힘든 것은 당신일 것을 안다. 모든 것이 변해있을 거라고 말한게 그대로인 변함을 말한건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시 웃겨줄테니 건강히 돌아와라... 그런 건 처음인 내 웃음도 다시 볼 수 있겠지..
 
 그 친구 커플은 결혼한다. 곧!  
 
 나는 김영승이란 사람이 좋다.

AND

첫눈 - 정양

2007. 8. 24. 21:57

한번 빚진 도깨비는
갚아도 갚아도 갚은 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한평생 그걸 갚는다고 한다
먹어도 먹어도 허천나던
흉년의 허기도 그 비슷했던가
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소용없는 사람아
내려도 내려도 다 녹아버리는
저 첫눈 보아라
몇 평생 갚아도 모자랄
폭폭한 빚더미처럼
먼 산마루에만
희끗거리며 눈이 쌓인다






나는 허천난다는 말이 좋다. 외로울 때 쓰기 좋은 말이다.

AND

부부 - 박성우

2007. 8. 24. 21:45

주방장 모자 눌러 쓴 부부가

할로겐램프를 켠다

가스 켜지고 발전기 윙윙 돌아

옛날호떡 국화빵 애플파이

라고 써진 글씨가 환해진다

말랑말랑한 밀가루 반죽,

옛날호떡 국화빵 애플파이 된다

리어카 두 대 이어붙인 가게로

축제를 보고 가는 사람들이 흘러든다

눈짓 손짓 얼굴표정만으로도

벙어리 부부는 손발이 척척 맞는다

얼마씩 파냐고 물어오는 사람에게

아내는 가격표를 손등으로 툭툭,

두들겨 주고는 국화빵기계 돌린다

낮 단속에 걸렸을 때

눈말 멀뚱멀뚱 가스통을 뺏기던 부부,

빠져나오지 않는 말들을 말랑말랑 뭉쳐

옛날호떡 국화빵 애플파이 만든다

AND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2007. 8. 24. 21:23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AND

관계 -김선우-

(고백할 게 있어 어떤 벌레에 관한 얘긴데 말야
달팽이 몸속에서 알을 까고 자라난대)
두려워하진 마 암세포처럼 무식하게
숙주를 절명시키진 않아 기어다니거나
교접하는 데에도 아무 문제 없어 넌 열심히
먹이를 찾아다니고 나는 무럭무럭 커가는 거야
(놀랍지 않아? 몸속에 뭔가 기르고 있다는 거)
근데 말이지 난 이제 다 커버렸고
장년기를 보내기에 넌 너무 작고 초라해
좀더 쾌적한 새의 창자 안에서
말년을 보내는 게 내 운명이야
네 여린 눈자루로 침입해 들어갈 거야 고통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네 머리는 광채를 뿜어내겠지
넌 이제 한가롭게 마지막 산보를 즐기면 돼
멀리서 늠름한 새의 발톱이
빛나는 네 등짝을 찍으러 날아올 테니까
한평생 배밀이로 기어다니다
무덤도 없이 가랑잎 위에 뒹구는 걸 생각해봐
쓸쓸한 죽음은 질색이야 구름위를 날게 해줄게
따듯하게 버무려지는 네 육즙을 맛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송곡을 들려주겠어
새로운 내 집이 맘에 들 거야 짓이겨지면서,
그때야 넌 모든 걸 깨달을지 모르지만
모든 끝장은 단호한 거야 난 네게 빚 없어
(놀랍지 않아? 날 키운 건 너야)


봄밤 - 김수영

고향 오라버니 같은 남자와 마주앉아 술을 마신다.
뚝배기 속에서 끓는 번데기.
다섯 잠을 자던 누에는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일까.
다섯 겹 혹은 일곱 겹 주름을 뒤적이며
무심하게 안부를 묻는다.

이십대와 삼십대를 건너뛰는 동안
그리워할 일도 미워할 일도 없었던 것일까.
사각사각 푸른 뽕잎 위에 누워 낮잠을 잔 것처럼
눈이 부셔 흐린 안경을 잠깐 닦았던 것뿐인데....
우리는 그림자끼리 마주 앉아 있다.

그는 취하지도 않고 비틀거리지도 않고,
나는 젖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돌아서 가는 등 뒤로 마른 산처럼 어깨가 솟아있다.
나보다 10년을 또 먼저 가는 사람.
하염없이 흔들흔들 산길을 걷고 싶은 밤,
살찐 봄바람만 낯익은 골목으로 불어온다.
날개는 다들 어디다 벗어두었을까.

AND

무너지는 새 -마종기

2007. 8. 23. 11:56
 무너지는 새

가을이 되면 새들은 모두
함께 무리져서 날으기 시작한다.
끼리끼리 같은 방향으로 날기 시작하고
노래도 같은 곡조를 부르기 시작한다.
(자기 무게를 모르는 새들만
높이 날 수 가 있다고 했지.)

한 떼의 새가 몰려온 적이 있었다.
건강한 날개의 노래를 부르면서
어울려 소주를 마시면서 살자고 했다.
나는 과학같이 정확하고 싶었다.
(가을이 되기 전에 내가 떠났다.)

그 후에 가을이 되면 나는 하늘을 본다.
하늘을 보면 언제나 다 보인다.
한 떼의 새가 날아간 자리에
혼자 있구나, 하고 써 있는 게 보인다.
(혼자 있으면 생각이 많아지지.
많으면 날을 수가 없지.)

혼자 있구나. 나도 모르는 탈바가지 쓰고
어지럼증에 시달리는 톱니바퀴의 한평생.
날개에 묻은 많은 기름을 씻을 수가 없다.

이승의 무게를 버리려고 무너지는 새.


way가 '바람의 말'을 좋아해서 내가 찾아낸 시랄까? 암튼 좋은 시다!
어쩌면 way가 좋다고 했던 내가 쓴 글에 어두운 하늘에서 밝은 하늘 쪽으로 날아가는 새들과
닮아서 바로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그 길들과 그 하늘들, 그 공기들이 좋다.
나라는 전체가 흡수.
흡수는 함께일 때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혼자일때 더 큰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2006년 겨울 환기미술관에 다녀와서-

AND